2002년 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 공보물.

2002년 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 공보물.ⓒ 노무현재단


"제가 부산에 내려온 것에 대해 정말 잘한 일이라는 확신을 하게 됐습니다.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부닥쳐 보니 만만치 않았습니다.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많았는데, 막상 나서서 뛰어주는 분들이 적었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역주의 벽이 이렇게 두터운 것인가에 좌절하고,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게 용기를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노무현, 당신의 선택은 옳다고, 이기든 지든 도와주겠다고 나서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 여러분들이 손가락질을 무릅쓰고 도와주셨기에 많은 분들이 저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노무현 하나 국회의원을 만들기 위해 저와 여러분이 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나라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똘똘 뭉치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선거 노무현 후보 유세 중에서)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선거에 나선 노무현 당시 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후보는 이렇게 '지역주의 벽'을 온 몸으로 부딪쳐내고 있었다. 이른바, '바보 노무현'의 탄생이었다. 유리한 자신의 기존 지역구를 버리고 지역주의와 색깔론의 골이 패일대로 패인 '정치적 고향' 부산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앞서 노무현 후보는 '돈 선거 혐의'로 기소돼 의원직을 내놓은 이명박 의원의 지역구 종로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바 있다. 아마도 지역주의와 색깔론 타파를 제 손으로 이루겠다는, "이 나라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한 소명감 없이는 불가능한 무모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무모한 도전기는 2016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에 상세히 소개되기도 했다.

결국 그 도전은 실패로 끝이 났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게 석패했다. 하지만 그 끝으로부터 위대한 첫걸음이 시작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지역주의 문제에 선두에 섰던 김대중 대통령은 낙마한 노무현을 해양수산부 장관에 등용했고, 내각 입성 이후 '바보 노무현'은 민주당 상임고문과 최고위원을 거쳐, 2002년 국민경선제를 통해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이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을 조명한 작품이 바로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다.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정치인 노무현의 여정을 다시 길어 올린 것은 그 여정에 함께 했던 두 친구 덕택일 것이다. 그 '바보 노무현'과 '운명'으로 엮인 두 사람 중 한 명은 최근 6.13 지방선거에서 '8전 9기' 만에 울산시장으로 당선됐고, 또 한 명은 현직 대통령으로서 '지역주의 해체'를 몸소 실천해내는 중이다.

지역주의 타파라는 숙명

 2000년 총선 유세 당시 노무현 후보.

2000년 총선 유세 당시 노무현 후보.ⓒ 노무현재단


"이번 선거를 통해서, 지역으로 국민을 나누는 지역주의 정치, 그리고 또 색깔론으로 국민 편 가르는 분열의 정치는 이제 끝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지역주의 정치, 또 분열의 정치 구조 속에서 정치적 기득권을 지켜나가는 그런 정치도 이제는 더 이상 계속될 수 없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8일 오후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여당의 압승으로 끝난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위와 같이 평가했다. 보수의 몰락과 부산과 경남을 비롯한 보수 우위 지역에서의 승리를 평가하면서 '지역주의 정치'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제가 정치에 참여한 가장 주요한 이유 중 하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를 이룬 셈"이라던 문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그 공을 돌리는 한편 노무현이란 이름을 기어이 호출해냈다.   

문 대통령은 지역주의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 정말 꿈꿔왔던 일이고, 3당 합당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노력한 결과"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지역주의 정치, 색깔론에 의지하는 분열의 정치를 꺾어놔야 우리 정치가 진정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올해로 서거 9주기를 맞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꿈꿨던 지역주의의 타파와 동서의 화합을 그의 '친구'인 문재인 대통령이 가시적으로 이뤄낸 것이란 평가는 결코 호들갑이 아니다. 이러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노무현과 문재인의 지역주의에 대한 '운명'과도 같은 소명감은 최근 울산시장에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송철호 당선인의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노무현과 문재인의 운명 

"내 대통령 퇴임 끝나고 나서 우리 (선거) 또 나가자." (노무현 대통령)
"대통령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동안 대통령님이나 저나 그렇게 깨지고 이제 대통령님까지 하셨으면 명예도 있고 그만하셔도 안 되겠습니까?" (송철호 변호사)
"무슨 소리 하나? 우리가 지역주의를 극복했나? 지역주의 하나도 극복된 게 없는데 우리가 대통령 배지 하나 했고 당신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인데 그거 한 번 했다고 만족한다 이 말인가? 또 부딪혀서 지역주의 극복할 때까지 싸워야지." (노무현 대통령)

지난 15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과의 인터뷰에서 송철호 당선인이 털어 놓은 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일화는 꽤나 감동적이었다. 송 당선인은 부산과 영남 지역에서 노무현, 문재인과 함께 유명 인권변호사 3인방으로 활약했던 인물로, 지역주의 타파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뒤 지역 정치에 투신할 때 출마를 권유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1992년 14대 총선부터 '야당'으로 출마, 16대 총선까지 줄줄이 낙방을 고배를 마신 이후에도 계속 지역주의, 분열의 정치 해체에 투신해 왔다. 그런 후배에게 노무현 대통령은 또 한 번 고배를 마셨던 후보에게 출마를 권유하며 계속 "싸우자"고 독려했던 것이다.

"대통령님 다음에 임기 마치고 나가시면 분명히 떨어집니다." (송철호 변호사)
"떨어지기도 해야지.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해야 전 세계인들한테 대한민국 민주주의 이것밖에 안 된다고…." (노무현 대통령)
"그럼 해외 토픽에 나옵니다."  (송호철 변호사)
"해외 토픽에 나오면 더 좋지." (노무현 대통령)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정말 죽겠더라고요"라면서도 송 당선인은 형, 동생 사이였던 고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과의 어찌 보면 '징글징글'했을 관계를 "운명"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가 <뉴스공장>에서 소개한 문재인 대통령의 일화 역시 고인이 돼버린 친구와 같은 길을 걸었던 정치인 문재인의 내면을 엿보게 한다.

송 당선인에 따르면, 2011~2012년 경 또 다시 낙선을 하고 "더 이상 정치 안 하겠다"고 선언한 그에게 이호철 비서관이 찾아왔다고 한다. 집까지 이사한 터였지만, 당시 문재인 변호사가 송 당선인을 꼭 뵙고 싶었다는 이유였다.  

"이호철이 찾아왔어요. 문재인 쪽에서 꼭 좀 뵙자고 한다고. 그래서 만났더니 '형, 이사했다며? 다시 이사 가소.' 이사한 지 넉 달밖에 안 됐는데 또 이사를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는 내 맘대로 못 사나?'하니까 '그게 운명인데 어쩝니까?' 그래서 다시 이사를 갔죠. 무서운 분들한테 딱 트랩에 걸려 있었어요."

"그런 세상이 오기만 한다면야 내 없으면 어때"

 영화 <노무현입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 영화사 풀


"그게 운명인데 어쩝니까?"

꽤나 인상적인 하소연이 아닐 수 없다. 그 운명에 따른 결과, 정치인 문재인은 지역주의 타파라는 "이 나라의 새로운 역사"를 역사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 촛불혁명으로 성공시킨 국민들과 함께, 적폐청산이란 가치를 실현시키라는 그 국민들의 명령을 받아 안은 채. 그렇게 노무현이 염원했던 그런 세상, 그런 시대가 이제야 오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의 시대가 올까요?" (노무현)
"아, 오죠. 오지 않을 수 없죠. 반드시 옵니다." (유시민)
"근데 노무현의 시대가 오면 내는 그기 없을 것 같소." (노무현)

2002년 대선 경선 당시 후보 노무현은 캠프 자원봉사자 유시민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지난 5월 출간된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원작 <노무현이라는 사람>에서 유시민 작가가 소개한 일화다.

<노무현입니다>의 이창재 감독이 노무현을 알아가기 위해 만난 총 72명의 '노무현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 <노무현이라는 사람>에서 유시민 작가가 떠올린 기억 중 한 토막은 분명 누군가에게는 회한으로, 누군가에게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올지 모를 일이다. 유 작가가 노무현의 시대에 자신이 없을 것 같다던 노무현 후보와 나눈 대화는 이랬다고 한다.   

"아,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럼 어때요? 그 시대가 오기만 하면 되지요. 후보님은 새로운 변화의 첫 파도에 올라타신 거예요. 이제 첫 파도가 밀려와 가야 할 곳까지 갈 수도 있지만 못 가고 주저앉을 수도 있죠. 그러면 그다음 파도가 또 오겠지요.

계속 파도가 와서 어느 시점엔가 지금 후보님이 생각하는 대통령이 되려는 그 이유, 대통령이 되어 만들고자 하는 사회, 이루고자 하는 변화가 이뤄질 거예요. 그런데 첫 파도를 타고 계시기 때문에 거기까지 못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게 오기는 와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유시민)
"허, 그렇죠. 그런 세상이 오기만 한다면야 내 없으면 어때." (노무현)

"내 없으면 어때"라던 마지막 한 마디가 절절하게 다가오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리라. 결국 노무현의 시대는 왔다. 노무현과 운명을 같이 한 친구를 통해, 그 운명을 뒤늦게 공감하고 촛불을 든 국민들을 통해서. 앞서갔던 노무현은 이제 없지만, 그가 운명을 걸고 쓰고자 했던 "이 나라의 새로운 역사"는 그렇게 전진하고 있다.

"마지막 2000년 선거는 그 이전에 종로에서 당선되었기 때문에 지역구가 종로에 있는데, 훨씬 유리한 곳인데 왜 그걸 버리고 부산으로 가냐, '바보...' 이렇게 붙여줬죠. 그동안에 사람들이 나한테 붙여줬던 별명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별명입니다."

임기 말이던 2007년 대통령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별명을 이렇게 설명했다. 제일 마음에 드는 별명 '바보 노무현'. 그 역시 살아있었다면 새로운 역사를 두 눈으로 확인하며 "아, 기분 좋다"를 외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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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영화 기자, 오늘은 프리랜서 글쟁이. 살다보니 시나리오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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