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 기자 말

*주의! 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LA 컨피덴셜 > 포스터

< LA 컨피덴셜 >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스튜디오


과묵하고 사랑표현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지옥이라도 갈 것 같은 남자. 맨주먹으로 건장한 남자 여럿을 쓰러뜨릴 수 있을 만큼 강하지만 가슴 아픈 추억에 여린 내면을 가진 남자. 그가 목숨 바쳐 지키는 대상이 자신이기를, 그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자신이기를, 그를 바라보는 여성들은 환상에 빠진다.

호주에서 배우 활동을 하던 러셀 크로우는 1995년 <퀵 앤 데드>를 통해 할리우드에 진출한다. 비교적 성공적인 첫 발을 내딛은 러셀 크로우는 1997년 < LA 컨피덴셜 >의 난폭하지만 의협심 강한 형사 버드 역을 맡으면서 배우로서의 안정적인 연기력과 여성 관객의 판타지를 채워주는 남자 스타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게 된다.

1990년에 출간된 제임스 엘로이의 소설을 각색한 < LA 컨피덴셜 >은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전형으로 시대적 배경 또한 1950년대 로스앤젤레스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속 필립 말로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지만 필립 말로와 다른 성격을 가진 세 명의 경찰이 등장한다.

전혀 다른 캐릭터의 이들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각자 다른 줄기에서 출발해 하나의 뿌리로 모아지는 구조로 각각의 캐릭터에서 또다시 여러 갈래의 가지들이 뻗어나간다. 하지만 선명한 캐릭터와 유기적인 이들 캐릭터의 관계, 그리고 개연성 있는 이야기는 복잡한 플롯에도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카페에서 총격 사건 발생... 희생자 중엔 경찰도

 < LA 컨피덴셜 >의 한 장면

< LA 컨피덴셜 >의 한 장면 ⓒ 워너 브러더스 스튜디오


경찰이 경찰서에 수감된 범죄자들을 무차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 간부는 경찰들을 심문하기 시작한다. 이때 세 명의 경찰들이 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의 극명한 차이에서 관객은 '경찰'이라는 집단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전형성을 보게 된다.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동료에게 불리한 증언을 거부하는 버드 화이트(러셀 크로우)와 자신에게 해가 가지 않는 선까지만 증언을 하는 잭 빈센느(케빈 스페이시), 그리고 원칙주의자에 기회주의자인 에드 액슬리(가이 피어스)까지. 이들은 물과 기름처럼 전혀 섞일 수 없는 부류이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정의 실현을 위해 애쓰고 있는 경찰들이다. 의리를 지키고 징계를 받거나 앞잡이로 욕을 먹으면서 승진을 하거나. 이들의 조직 내 위치와 관계도 변화를 맞게 된다.

시내 카페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이들 희생자 중에는 버드의 파트너였던 스탠스도 포함되어 있는데 경찰은 이 사건을 강도 사건이라고 단정 짓고 흑인 용의자 셋을 추적한다. 시간이 갈수록 버드와 에드는 경찰이 엉뚱한 용의자를 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각자의 방식으로 사건의 전모와 진범을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세 명의 형사, 버드, 잭, 에드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사건의 숨겨진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유난히 민감한 버드는 어린 시절 라디에이터에 묶인 채 폭력적인 아버지가 엄마를 죽을 때까지 폭행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한 번 흥분하면 악력만으로 의자를 부수고 사람을 들어서 집어 던지는 등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그는 스탠스의 죽음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영화배우 베로니카 레이크를 꼭 닮은 매춘부, 린(킴 베이싱어)을 알게 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누아르 장르에 등장하는 팜므파탈의 전형적인 외형을 지니고 있지만,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구원하는 역할을 한다(모든 것을 수용하는 그녀의 온화함은 놀라울 정도다). 순정적인 마초와 아름다운 여인이 만나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판타지를 자극하고, 버드의 남성적인 매력과 대조를 이루는 그의 연약함은 린의 사랑뿐만 아니라 여성 관객으로 하여금 연민과 모성애를 자아낸다.

괴물을 쫓다가 그보다 더 한 괴물이 된 사람들

 < LA 컨피덴셜 >의 한 장면

< LA 컨피덴셜 >의 한 장면 ⓒ 워너 브러더스 스튜디오


사시사철 온난한 기후, 아름다운 해변가와 항상 미소 짓고 여유 있는 사람들,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일만 일어날 것 같은, 사람들의 꿈과 환상을 자극하는 LA. 이 도시가 감추고 있는 이면은 눈부신 햇살의 화려함만큼 어둡고 잔인하다. 밝고 건강해 보이는 도시는 이미 마약과 매춘에 병들어 있고, 배우가 되기 위해 LA에 온 청춘들은 성형수술을 하고 유명인 닮은꼴 매춘부 노릇을 하고 있다.

진짜와 가짜가 섞인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배우를 보고 매춘부라 생각하기도 하고 매춘부를 보고 유명 배우라 믿기도 한다. 빛과 어둠의 간극만큼 매력적인 도시의 눈부신 빛을 향해 사람들은 달려든다. 도시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매혹당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빛이 아니라 어둠의 편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좌절된 꿈과 희망이 넘치는 도시의 특성은 단지 사건의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로 극의 중심을 이룬다.

서로 얽히고설킨 형사와 범죄자들 사이에는 옳고 그름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어제는 적이었다가 오늘의 동지가 되기도 하고 아침에는 동지였던 이에게 저녁에는 총을 겨누기도 한다. 강력계 형사가 되기 위해서는 유죄가 확실하나 증거가 부족한 범죄자를 처단하기 위해 불법적인 일도 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영화에서 더들리 경찰 반장은 말한다.

괴물을 쫓다가 그보다 더 한 괴물이 된 사람들의 집합소와 같은 곳에서 상극인 버드와 에드는 공동의 목표, 스탠스를 죽인 진짜 범인을 잡기 위해 힘을 합치고 이들의 조합은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이상적인 팀을 이룬다.

러셀 크로우가 섹시한 배우로 오래 남을 수 있었던 이유

 < LA 컨피덴셜 >의 한 장면

< LA 컨피덴셜 >의 한 장면 ⓒ 워너 브러더스 스튜디오


여러 인물들이 각각의 배경과 이야기를 가지고 다른 인물들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는 동시에 실마리도 제공하는데 이 정보들은 산만하게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끝에 하나로 깔끔하게 모아짐으로써 사건이 해결되었을 때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 영화에 참여한 모든 배우의 결정적인 영화가 될 만큼 < LA 컨피덴셜 >은 잘 만들어졌고, 대중과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큰 성공을 이루었다. 1997년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로 1998년 아카데미 영화제, 거의 모든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으며 여우조연상과 각본상을 수상한다. 특히 러셀 크로우는 배우로서도 스타로서도 급부상하게 되는데, 1999년 <인사이더>에서 대배우 알 파치노와 대등한 연기를 펼치고 2000년 <글래디에이터>에서 검투사 막시무스를 연기하며 아카데미 영화제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한다.

거친 야수성 안에 숨겨진 순수함과 섬세함을 느낄 수 있는 캐릭터는 러셀 크로우라는 배우와 찰떡궁합을 이루며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놓았다. 조각 미남은 아니지만 섹시한 배우로 그가 오랜 시간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안정감 있는 연기 때문일 것이다.

리들리 스콧, 론 하워드 등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들과 여러 작품을 함께하며 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2000년대가 지나가고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활약이 예전만 못하고 주춤한  것이 사실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지만 그가 배우로서 쌓아올린 신용은 아직 견고해서 그의 출연은 여전히 관객의 신뢰를 얻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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