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션스8>의 포스터.

영화 <오션스8>의 포스터.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오션스 일레븐>(2002)은 동명의 1960년작을 리메이크해 흥행에 성공한 작품입니다. <오션스 트웰브>(2004), <오션스 13>(2007)까지 이어지며 2000년대 케이퍼 필름(caper film: 값진 물건을 훔치려는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범죄 영화의 한 장르. 블랙코미디 요소가 가미된다)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던 작품입니다.

<오션스8>은 대니 오션에게 데비(산드라 블록)라는 동생이 있다는 설정을 추가한 일종의 스핀오프 시리즈입니다. 5년 전 믿었던 애인의 배신으로 교도소에 들어갔던 데비는 가석방 허가를 받아 출소합니다. 단짝이었던 루(케이트 블란쳇)를 찾아간 데비는 교도소에서 내내 구상했던 작업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들의 타깃은 매년 열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갈라 행사에서 1억5천만 달러(한화 약 1700억 원)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훔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오직 여성으로만 이뤄진 팀이 필요합니다. 

장르적 완성도 갖춘, 여성들만의 사기극

 영화 <오션스 8>의 스틸컷. 각기 다른 성격과 재능을 가진 여성들의 협업이 돋보인 영화다.

영화 <오션스 8>의 스틸컷. 각기 다른 성격과 재능을 가진 여성들의 협업이 돋보인 영화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케이퍼 영화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값진 물건을 훔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긴 다음, 성공적으로 수사망을 피하는 전체 범죄 과정입니다. <오션스8>은 이런 기본 과제를 비교적 막힘 없이 깔끔하게 잘 풀어낸 편입니다. 목표와 방법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실행 과정에서 생기는 변수를 적절히 통제해 나갑니다. 대단한 반전이나 복잡한 계획은 없지만, 순간의 기지와 인간의 심리를 역이용하여 경쾌하게 풀어나간 것이 오락 영화로서 이 작품의 장점입니다.

전통적으로 남성이 주도하던 이 장르에 굳이 여성을 내세워 작품을 만든 이유는 분명합니다. 여성 인물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사기극이라는 콘셉트 아래 연대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낸 것이 돋보입니다. 중심인물인 데비와 리즈를 포함해 <오션스 8>의 멤버들은 각각 성격과 인종, 나이, 결혼 여부 등에서 모두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의 재능과 장점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차이를 부각하여 서로의 단점을 비판하기보다는,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잘하는 것을 추켜세워주며 시너지를 내려고 하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류의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배신과 암투, 수위 높은 폭력 장면 같은 것은 이 영화에 없습니다. 대신 목표에 진지하게 몰입할 줄 아는 전문가다움과 수준 높은 팀워크가 있을 뿐입니다.

여성 멤버만으로 이뤄진 구성이 아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풍자적인 유머 감각도 좋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콧대 높은 여배우에 대한 상투적 이미지를 역이용하고, 창고 가득 쌓인 밀수품을 이베이에서 샀다고 둘러대면 남편이 그러려니 한다는 얘기를 하는가 하면, 백인 남성 너드 캐릭터 대신 해커 나인볼(리한나)의 여동생에게 뛰어난 과학 실력을 부여한 점들이 좋은 예입니다. 이런 요소들은 곳곳에 널려 있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유쾌한 방식으로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산드라 블록과 케이트 블란쳇의 앙상블은 시크하고 멋진 여성의 매력을 한껏 뽐냅니다. 다른 인물들도 흔히 '여성'이라는 말 안에 뭉뚱그려져 있는 여성성의 다양한 면모를 다채롭게 펼쳐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자기 삶의 경험에 따라 정감 가는 캐릭터 하나씩은 챙겨서 나올 수도 있지요. 저 같은 경우에는 사라 폴슨이 연기한 태미 역할이 맘에 들었는데 일종의 경력 단절된 '워킹맘' 같은 처지가 제 또래 주변 여성들의 실제 삶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주체가 된 여성 

 영화 <오션스8>의 스틸컷. 사기극을 주도하는 데비(샌드라 불럭)와 루(케이트 블란쳇)의 앙상블은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요소 중 하나다.

영화 <오션스8>의 스틸컷. 사기극을 주도하는 데비(샌드라 불럭)와 루(케이트 블란쳇)의 앙상블은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요소 중 하나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케이퍼 영화는 한 마디로 등장인물들의 욕망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반사회적인 절도 행위지만, 값진 물건에 대한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욕망을 다루기 때문에 관객은 쉽게 몰입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이 장르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남성이었습니다. 여성은 주인공의 애인이거나, 구원받아야 할 대상, 기껏 잘해야 주인공이 대적해야 할 적수에 그치기 일쑤였습니다. 즉, 남성은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있었지만, 여성은 늘 욕망의 객체나 훼방꾼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 사실은 그 자체로 지금껏 상업 영화 제작 환경이 얼마나 남성 편향적이었는지 알려줍니다. 수많은 남성 제작자와 감독은 여성을 욕망의 주체로 다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션스 8> 같은 영화의 등장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여자들의 케이퍼 영화'라는 설정 자체가 여성을 욕망하는 주체로 그리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것이니까요. 에필로그에서 8명의 여성이 각자 자신의 '소박한' 욕망을 실현하는 장면을 놓치지 않고 보여 준 것 역시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런 시도가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대중적인 재미를 갖춘 괜찮은 오락 영화의 형태로 나왔다는 점은 더욱 높이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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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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