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의 권력질서가 국가 중심으로 편제되다 보니, 개별 인간의 지위도 그에 따라 둘로 갈린다. 소속 국가의 관리를 받는 사람은 '국민(국적자)',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국적자'나 '난민'으로 규정된다.

무국적자나 난민은 개인의 됨됨이나 인격과 관계없이 흔히 '문제적 인간'으로 취급된다. 세상과의 교류가 단절된 채 수십 년간 산 속에서 정신수양에 매진하는 사람도 산 밑의 정치 상황 변동에 따라 무국적자나 난민으로 규정되어 문제적 인간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다.

국가는 이런 사람들을 특히 우려한다. 국가의 관리에서 벗어난 사람은 국경을 임의로 넘나들면서 정치 질서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금도 걷기 힘들어지고 군인으로 충원할 대상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국가들이 1951년 난민지위협약이나 1967년 난민지위의정서 등을 체결한 것은 이들에 대한 인도적 관심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들에 대한 우려도 반영하는 것이다. '국가 중심의 세계질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이중적 정서는 서양열강에 대한 19세기 전반 조선 정부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조선 정부는 연해를 표류하는 서양인 피난민들에 대한 인도적 구호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로 인해 사회질서가 영향을 받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쇄국정책으로 유명한 흥선대원군도 그랬다. 그 역시 시장개방을 요구하는 미국을 상대로 '조선 연해에서 표류하는 미국인 피난민은 보호해주겠지만, 수교·통상만큼은 절대 안 하겠다'는 종래의 입장을 고수했다. 해상 피난민을 인도적으로 구호하되, 그들과 소속국이 조선에 영향을 미치는 것만큼은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난민 대하는 국가의 '이중적 정서', 영화 <터미널>

 영화 <터미널>의 한 장면. 톰 행크스가 동유럽 국가 '크로코지아'에서 미국으로 온 난민 빅터 나보스키 역을 맡았다.

영화 <터미널>의 한 장면. 톰 행크스가 동유럽 국가 '크로코지아'에서 미국으로 온 난민 빅터 나보스키 역을 맡았다. ⓒ CJ 엔터테인먼트


난민에 대한 국가권력의 우려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배우 톰 행크스의 영화 <터미널>에도 잘 녹아 있다. 톰 행크스가 연기한 주인공 빅터 나보스키는 가상의 동유럽 국가인 크로코지아 국민이다.

나보스키가 탑승한 비행기가 뉴욕의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기 직전에 그의 신변에 변화가 생긴다. 그가 탄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 크로코지아에 쿠데타가 발생해 정부가 전복되는 바람에, 졸지에 무국적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나보스키는 공항에 내렸지만 공항 입국 심사대를 통과할 수 없게 된다.

이 때문에 공항에서 무기한 체류하게 된 나보스키. 그에 대한 공항 당국의 시각은 무국적자나 난민에 대한 국가권력의 시각을 상징한다. 나보스키는 비어 있는 공간을 활용해 침대도 만들고, 아래 내의만 입은 채 화장실에서 샤워도 하고, 먹고 살기 위해 공항 구내에서 돈벌이까지 한다.

나보스키는 공항 이용객들이 동전을 회수하지 않은 채 두고 간 카트를 제자리에 갖다 놓고 카트 속 동전을 회수한다. 그 돈으로 공항 내 매장에서 햄버거도 사 먹고 과자도 사 먹는다. 또 공항 내의 인테리어 공사현장에 가서 건축 기술 솜씨도 발휘한다. 덕분에 공항 국장보다 많은 수입을 챙기기도 한다. 그런 모습이 공항 국장한테는 황당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다. 

나보스키는 심지어 공항 안에서 '썸'과 사랑도 발전시킨다. 자주 부딪히는 여성 승무원에게 꾸준히 말을 건 결과다. 나중에는 직원들의 배려로 영업시간이 종료된 레스토랑에 들어가 둘만의 식사 시간을 갖기도 한다.

대단한 불법적 행위는 없지만, 공항 국장의 눈에 그는 질서를 교란하는 문제적 인간이다. 나보스키가 공항에 체류하는 9개월 동안, 국장은 CCTV로 끊임없이 관찰하면서 그를 내보낼 방법을 궁리한다. 나보스키의 신변을 보호하면서도 그런 궁리를 하는 국장의 모습은, 무국적자나 난민에 대한 국가의 이중적 정서를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영화 <터미널>의 한 장면. 톰 행크스가 동유럽 국가 '크로코지아'에서 미국으로 온 난민 빅터 나보스키 역을 맡았다.

영화 <터미널>의 한 장면. 톰 행크스가 동유럽 국가 '크로코지아'에서 미국으로 온 난민 빅터 나보스키 역을 맡았다. ⓒ CJ 엔터테인먼트


극 중에서 나보스키를 추방하기 위한 국장의 노력은 정말 눈물겹다. 국장은 그가 보는 앞에서 일부러 경비원들이 자리를 비우도록 만든다. 탈출을 통한 불법 입국을 유도하는 것이다. 국장의 의도는 나보스키가 경찰에 체포될 상황을 일부러 만드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보스키는 국장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국장은 난민 신청도 유도해본다. 흔히 난민은 정치적 박해 가능성 때문에 소속 국가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 원치 않은 사람을 가리키지만, 난민지위협약 제1조는 동일한 상황에 처한 나보스키 같은 사람도 난민 범주에 포함시킨다.

국장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게 두렵지 않느냐?"며 난민신청 요건에 맞는 답변을 유도한다. 고국에 가면 정치적 박해를 받게 될 거라는 답변을 유도한 것이다. 하지만 영어 회화가 서툰 나보스키는 국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말해 버린다. 몇 번을 물어도 마찬가지다. 실패한 국장은 할 수 없이 이 '사실상의 난민'을 자기가 친히 보호하는 동시에 규제까지 해야 하는 곤란을 계속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난민지위협약에 가입한 한국, 난민 문제 '남의 일' 아니다

영화 <터미널>은 무국적자나 난민의 처지에 놓인 사람에 대한 국가의 태도를 코믹하게 묘사했지만, 이 문제를 대하는 실제 국가들의 입장은 극도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보호해줘야 할 필요성과 자국의 질서를 지켜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신중한 태도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 지방정부와 대한민국 중앙정부도 현재 비슷한 차원의 고민을 안고 있다. 최근 내전 중인 예멘을 탈출한 난민 일부가 제주도를 통해 대한민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30일간 무사증(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제주도로 입국해 난민 신청을 해놓은 예멘인 숫자가 지난 5월 30일 기준으로 519명이나 된다. 

1990년 남북통일 전부터 예멘은 내전이 심각했다. 남북 예멘이 각각의 내전을 겪었을 정도다. 통일 후에는 남부가 분리독립을 추진하면서 상황이 격화됐다. 2011년부터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쓴 재스민 혁명 때는 이 나라에서도 대통령 퇴진 운동이 벌어졌다.

지금도 정부군과 반군의 대결뿐 아니라 알카에다 무장세력의 개입까지 겹쳐, 복합적인 내전 구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구 70%인 2천만 명이 끼니도 해결하기 힘든 처지에 놓여 있다. 예멘인들이 굳이 제주도까지 찾아와 난민 신청을 하고 있는 것도 이런 국가적 배경 때문이다.

 지구본에 표시된 예멘의 위치.

지구본에 표시된 예멘의 위치. ⓒ 김종성


대한민국은 1992년에 난민지위협약에 가입했지만, 그 후로도 한동안 난민을 받아주지 않았다. 2001년 이전에는 그랬다. 건국 60년 가까이 난민 문제와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난민을 받아주는 나라가 됐다. 난민 문제로 고민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한국은 1992년 12월 난민지위협약에 가입하였으나, 2001년 이전에는 난민 신청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근래에는 연 10여 명의 난민을 받아들여 2011년 6월까지 총 250명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했다. 이와 별도로 137명에게는 난민에 준하는 인도적 지위가 허용되었다." - 정인섭·정서용·이재민의 <국제법 판례 100선> 중

한국도 난민을 받아주는 나라가 되다 보니, 관련 문제에 대한 판례도 축적되고 있다. 입국 당시에는 난민이 아니었던 외국인에게까지 난민 지위를 인정해준 판례도 나왔다. 서울행정법원이 2006년 2월 3일 선고한 판결(사건번호 2005구합20993)이 그렇다.

이 판결에서는, 산업연수생이나 관광객으로 입국한 뒤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버마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에 가입해 미얀마대사관 앞에서 반정부 시위를 한 미얀마인들에 대해서도 '미얀마에 돌아가면 박해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난민 지위를 인정해줬다. 미얀마에서 반정부 활동을 한 전력이 없더라도 난민 지위를 인정할 수 있다는 판결이었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도 난민에 대해 어느 정도 관대한 나라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난민 지위를 인정해주면, 난민지위협약 제7조에 따라 외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해야 한다. 국적을 가진 외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난민에게도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재산을 취득하거나 직업을 가질 자유 등을 보장해야 한다. 또 종교의 자유나 노동권 등과 관련해서는 난민지위협약 제4조에 따라 내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보장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난민에 대한 국가의 정서는 때로 이중적이다. 난민을 보호하고자 하는 동시에 규제하고자 한다. 국가들이 난민지위협약을 체결한 것도 그런 두 가지 상황을 모두 처리하기 위해서다. 난민을 보호하는 국가는 난민지위협약 제2조에 따라 난민에게 준법의무뿐 아니라 납세의무까지 요구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난민을 제3국으로 퇴거시킬 수도 있다. 난민 유입으로 인해 국가가 과도한 부담을 지지 않도록 해뒀던 것이다. 

난민의 지위가 약해지면 개인의 지위도 그만큼 약해진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난민 관련 게시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난민 관련 게시글. ⓒ 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이렇게 국가들은 난민을 인도적으로 구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나라 질서도 보호하려 애쓴다. 난민 유입으로 인한 자국민의 반발이나 사회적 혼란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제주도 상황도 마찬가지다. 난민 유입으로 인해 도민들의 안전과 생계가 영향 받는 상황을 우려해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청와대 청원이 20일 오전 11시 현재 29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이처럼 적지 않은 국민들이 난민 유입을 걱정하고 있으므로, 정부로서는 난민과 관련된 인도적 문제와 더불어 사회혼란에 대한 국민적 우려까지 동시에 반영하는 답변을 내놓아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데 난민 문제는 국가권력에만 이중적 고민을 안기는 게 아니다. 난민 신청을 받은 국가의 국민들한테도 마찬가지다. 이런 나라의 국민들은 난민 유입이 사회질서 혼란이나 직업 침해를 유발하는 측면도 당연히 고려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 문제가 개인들의 권리 신장과도 연관돼 있다는 점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난민에 대한 국제적 보호가 약해지면, 국가의 보호를 받는 개인들의 지위도 어느 정도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난민의 지위가 약해진다는 것은 개별 인간의 지위가 그만큼 약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국가권력이 상대적으로 강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국가권력의 관리를 받는 국민들의 지위도 약해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인 상당수가 노예제 폐지를 찬성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흑인 노예의 처지가 열악해지면 미국 땅에서 사는 인간의 평균 지위가 약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백인 서민들의 지위까지 연쇄적으로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미국인들 사이에 있었다. 그러니까 노예제 폐지를 찬성한 백인들은 결국 어느 정도는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했던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민 신청을 받은 국가의 국민들은 난민 유입으로 인한 부작용과 더불어, 난민 보호가 인간의 인권과 국민의 인권을 신장시키는 측면이 있다는 점도 동시에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같은 이중적 고민을 요구하기 때문에, 난민 문제는 국가뿐 아니라 개인들에게도 참으로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멘난민 제주도 터미널 톰행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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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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