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게 자녀란 어떤 존재일까. 아마도 '너무나 소중해 조금도 흠을 내고 싶지 않은,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행복을 빌어주고 싶은'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넘치는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기가 참 어렵다. 부모로서는 최선을 다했는데 자녀들은 숨이 막힌다 할 때도 있다. 이런 반응에 부모들은 분노하면서 좌절하거나 죄책감에 빠져 지내기도 한다.

민사 44부 판사들의 성장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면을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8회분은 부모에게 자녀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자녀에 대한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졌다.

부모의 바람대로 대기업 갔다가 자살 시도한 남자

바른(김명수 분)은 중증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시도한 한 남자의 사건을 맡는다. 부모는 이 남자가 다니던 회사의 부당대우가 원인이라고 소송을 걸었고, 회사는 이 남자의 나약함을 문제 삼는다. 도대체 명문대를 졸업하고 일류기업에 다니며 예쁜 딸을 둔 한 가정의 가장인 남자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남자는 법대를 졸업했지만 고시합격에 실패했고,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을 대신해 출세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를 위해 대치동 학원가에 살며 아들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아마도 이 남자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부모에게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이야기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부모가 만들어 준 학원 스케줄대로 공부만 하며 자랐을 것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시인 혹은 작가의 꿈은 내면 깊이 밀어 넣은 채 말이다.

이렇게 부모의 꿈을 대신 이뤄주며 성장한 남자는 부모가 원해서 들어간 대기업 생활이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여전히 아들을 품 안의 자식으로 생각하는 부모는 회사에 찾아와 아들을 잘 봐 달라며 사정을 하고 아들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개입한다.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 ⓒ JTBC


이 사례는 회사의 부당대우까지 더해지면서 남자가 자살을 시도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다. 드라마 속 판사는 남자의 가족을 불러 "단 한 번이라도 독립된 한 명의 인간으로 존중해 준 적 있냐?"라고 질책했다.

하지만 이 남자의 사연은 그저 픽션이 아니다. 유치원에 다니기 전부터 조기교육의 명목으로 부모가 선택한 교육을 받고 자라는 요즘 아이들. 정체감을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중요한 시기인 청소년기에도 '일단 공부를 잘해야 나중에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부모의 설득에 학원과 독서실만 오가는 청소년들. 막상 부모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청년들. 집안의 기대에 맞춰 힘들게 취업을 하고 보니 내가 원한 삶이 아니었다며 후회하는 성인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이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자신의 꿈을 위해 양육권 소송을 제기한 아버지

8회에 등장한 두 번째 사건은 이혼 후 딸들을 다시 키우고 싶은 아버지가 제기한 양육권 분쟁이었다. 이 사건에서 남자는 어린 딸들을 반드시 자신이 키워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한다. 딸들과 적극적으로 놀아주는 좋은 아빠이지만, 자녀를 되찾고 싶은 마음에 딸들 앞에서 엄마를 비방하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한세상(성동일 분)은 딸들에 대한 이 아버지의 사랑이 과도함을 눈치챈다. 그리고 딸들에 대한 순수한 사랑 이외에 다른 것들이 작용했음을 밝혀낸다. 고아로 자란 아버지는 마당이 있는 시골 집에서 뛰놀며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 한다. 이는 자신이 어린 시절 늘 바라왔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다. 이를 위해 자금을 마련하고자 열심히 일만 해온 아버지는 가정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내와의 이혼이었다.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 ⓒ JTBC


하지만, 여전히 그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 아버지는 자신이 꿈꿔왔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딸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런데 정작 재판부가 던진 "둘째 딸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무엇인가요?"라거나 "첫째 딸이 가장 좋아하는 건요?"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다. 결국 이 아버지 역시 딸들이 바라는 것과 원하는 것은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딸들에게 투사한 것이다.

부모와 자녀도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8회에 다뤄진 두 사건은 부모가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과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자녀들에게 투사하고, 자녀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첫 번째 사건은 너무 늦게 이 사실을 깨달았다.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난 극 중 남자에게 획일적인 성공만을 강요하는 부모와 회사의 요구는 무척 벅찼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에게 순종만 하며 자라온 이 남자는 적절하게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때문에 부모와 세상에 대한 분노를 자신 내면으로 돌린다.

정신분석에서는 분노가 내면으로 향해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것을 우울이라고 부른다. 이 남자의 우울은 자기 존재를 존중해 주지 않는 부모와 세상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모는 "아들을 사랑한 죄"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물론 부모의 사랑하는 마음은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바른의 말대로 "단 한 명의 인간으로 존중해준 적이 없이" 한 사랑은 그 방향이 잘못됐다.

다행히 두 번째 사건은 아직 늦지 않았다. 이 아버지는 재판부의 현명한 판결을 통해 딸들과 나는 다른 사람임을, 어린 시절 충족되지 못했던 욕구는 이젠 흘려보내야 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아마도 드라마 속 아버지는 한동안 힘든 시간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가 버린, 잃어버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애도하고 나면 보다 새로운 눈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내면을 간파한 세상의 판결 덕분에 딸들 역시 아버지의 어릴 적 욕구를 투사 당하지 않고 자신만의 꿈을 키워갈 수 있게 됐다.

자신이 태어난 대로 살아간다는 것

"아이들은 이미 자기 세계 속에서 자기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은 아빠를 기다려주지 않고 훌쩍 먼저 커 버리죠. 원고, 미안합니다. 원고 자신의 고통 때문에 아이들의 세계를 지켜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마저 잃어버린 것 같군요."

두 번째 사건을 판결하면서 한세상 판사가 남긴 이 말은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먼저 아이들이 자기만의 세계가 있음을,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꿈을 지닐 수 있음을, 부모와는 다른 독립적인 한 인간임을 인정해야 한다.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음을 느낄 수 있을 때 자신의 참모습대로 살아갈 힘을 얻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자신이 얻지 못한 것은 자신에게서 끝나야 함을, 나의 고통 때문에 아이들의 세계를 파괴해서는 안 됨을 깊이 새겨야 한다.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 ⓒ JTBC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건 부모가 스스로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이나 어린 시절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무엇이었는지'를 성찰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할 수 있다면 그 꿈을 위해 이제라도 노력하면 된다. 단 자녀가 아니라 부모 스스로가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혹시, 이미 충족시키기엔 늦어버린 욕구나 꿈이 발견됐다면, 이는 그냥 체념하고 흘려보내는 지혜 또한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할 수 있는 것과 이젠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구분하고 이를 수용할 줄 아는 것이 진정으로 어른다운 자세인 것이다.

물론, 부모가 어린 시절 안정된 가정에서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라고, 자신의 꿈을 모두 이루어 자녀에게 투사할 꿈이나 욕구 따위가 없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아마 세상의 어떤 부모도 자녀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데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지나친 죄책감은 갖지 말았으면 한다. 깨닫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자녀들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8회 마지막 장면에서 바른은 "눈동자에 담긴 아이 모습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고 독백한다. 눈동자에 담은 아이의 모습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생생한 그 모습일 수 있도록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방향을 수시로 점검하고 때로는 비워내는 것. 이게 진정으로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나아가 이런 부모들이 많아질 때 바른의 말처럼 "자신이 태어난 대로 살고 싶은" 인간 본성이 실현되고 다양한 개성이 존중받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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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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