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킹키 부츠>의 사진들.

ⓒ KB Theatre Ltd


비영어권 국가 최초로 한국에서 라이센스 공연을 펼친 뮤지컬 <킹키 부츠>가 2018년 세 번째 시즌을 마친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킹키 부츠>는 성 소수자의 서사였으며 현실에서 당장 일어나기 힘든 판타지 같은 해피 엔딩을 무대 위에서 구현했다. 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한편,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호평 받았다.

<킹키 부츠>의 줄거리는 망해가는 공장을 가업으로 물려받은 찰리가 공장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 하다가, 롤라를 만나고 '킹키 부츠'를 만드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공장의 '남성적'인 인물들도 변하고, 공장에 대한 자부심이 크게 없던 찰리는 공장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된다. 물론 '정상적'인 모델을 쓰고 싶다며, 찰리와 롤라가 소원해지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찰리의 사과에, 롤라는 패션쇼 장으로 돌아와 '킹키 부츠'를 세상에 알린다.

이러한 줄거리를 통해 <킹키 부츠>는 '우리 모두 빛나는 존재'라는 주제를 얘기하려 한다. 그 속에서 내세운 것은 '드래그 퀸'(옷차림, 행동 등을 통해 여성을 연기하는 사람) 롤라의 역할이었다. <킹키 부츠>가 시도하려던 것은 좋았다. 식상하기도 한 주제이지만, 우리 모두 다 소중하고 빛나는 존재라고 역설하는 극이 그 주제로서 나쁠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현지에서 관람한 <킹키 부츠>는 어디인지 모르게 자신이 말하려는 주제와 모순되는 듯 보였다.

여전히 소외되는 여성 인물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킹키 부츠>의 사진들.

ⓒ KB Theatre Ltd


우선 여성 캐릭터 로렌과 니콜라가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소외됐다. 물론 그 둘은 여태껏 연극 뮤지컬계에서 보이던 이분법에 의해 명확히 구분되는 인물들도 아니고, 저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긴 하다. 하지만 <킹키 부츠> 전체 서사에서 제외 되어도 별다른 지장이 없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담당하고 있는 서사는 명확하지 않다. 로렌이 왜 '연애의 흑역사(The History of Wrong Guys)'를 부르는지, 도시에 가고 싶어 하던 니콜라는 대체 이야기 내에서 무슨 축을 담당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여성 캐릭터에게 중요한 것은 캐릭터 자체의 매력뿐만 아니라, 서사 예술이라는 큰 틀에서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는가이다. 두 여성 인물은 찰리나 롤라 혹은 극 중 주된 갈등을 담당하는 돈에 비해서도 서사가 부족하다, <킹키 부츠>의 줄거리를 요약할 때, 굳이 두 사람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전체 이야기는 성립한다.

어쩌면 그 이유는, 이들이 모두 찰리와 이성애 관계 속에 등장하고 그 위주의 서사 안에서 기능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킹키 부츠>는 로맨스 서사가 아니다. 굳이 극 중에 로맨스가 필요 없다. 이는 <킹키 부츠>가 던지는 '남성성'이라는 화두와 맞닿아 더욱 아쉬움을 부여한다. 이 작품은 롤라를 통해 전통적인 '남성성'에 대해 질문한다. 그런데 정작 여성 인물들은 여전히 찰리라는 남성 인물과의 로맨스 속에서 '여성'으로만 드러난다. 여성 캐릭터의 존재감이 얕다보니, 그들이 이전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쉬울 수밖에 없다. 좋은 여성 캐릭터는 서사와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 서사에서 필연적인 기능을 할 때에 비로소 훌륭한 여성 캐릭터가 된다.

롤라 그리고 상품화 되는 소수자성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킹키 부츠>의 사진들.

ⓒ KB Theatre Ltd


롤라는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이지만, 그가 아무리 매력적이라고 하더라도 주인공 찰리를 돕는 조력자에 그친다. <킹키 부츠>에서 롤라는 매력적인 '타자'이다.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공장을 살려내는 주동력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롤라는 돈을 벌어줄 수단이다. 찰리가 처음 롤라에게 손을 내미는 이유는, 그의 아이디어가 돈을 벌어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너는 너 자체로 빛나"라는 <킹키 부츠> 메시지의 근거는 시장성과 연결되어 있다. 롤라는 주인공의 조력자로서 킹키 부츠라는 상품을 성공시켰다.

'당신의 소수자성도 매력이 될 수 있습니다. 롤라처럼요'라는 건 누군가의 소수자성이 매력 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서커스나 프릭쇼도 남들과 다른 외모의 사람들, 소수자 혹은 짐승을 이용했다. 그들은 매력적인 타자들이었다. 얼핏 보면 소수자성을 긍정하고 소중히 다루는 듯하지만, 이를 전시하는 과정에서 타자화와 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 중 하나는 그들이 사회적 발전에 방해가 되고, 때로는 주체들이 일궈놓은 현대에 무임승차한다는 인식이다. <킹키 부츠>는 이 타자들이 사실 유용한 존재들이라고, 그들은 사회의 민폐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킹키 부츠>의 결말은 상당히 미래 지향적이다. 모두가 함께 모여서 노래를 하고 춤추는 곳, 이는 권력에 따른 폭력이 너무도 만연한 세상에 비해 나아가야 할 지향점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곳에 닿기 위해서는? 주체들의 이익을 증폭 시킬 매력을 가지고 타협을 하면 되는 것일까? <킹키 부츠>가 제안한 해결책은, 투쟁보다는 타협으로 읽힐 여지가 크다.

그 타협에는 전체 소수자에 대한 억압을 멈춰라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시장성이 없는 타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롤라는 운이 좋게 당당하고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롤라와 같지 못한 타자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롤라처럼 당당해지라고? 애초에 억압 받는 이들에게 '네가 가진 소수자성은 나쁜 것이 아니니 당당해지렴, 그러면 사회에서 널 수용해줄 거야'라고 위로할 수 있을까.

물론, <킹키 부츠>는 매력적이지 않은 타자들은 사회에 편입될 수 없다고, 그들을 배제하자고 주장하는 극은 아니다. 하지만 <킹키 부츠>에서 얘기되는 것은 주체가 봤을 때, 자신의 권력을 크게 위협하지도 않으면서 외려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그런 타자들이 주체와 동등하게 서는 모습에 집중한다.

평범한 백인들의 세계 그리고 찰리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킹키 부츠>의 사진들.

ⓒ KB Theatre Ltd


<킹키 부츠>에서 보여주는 것 중 하나는 아래에서부터의 변화다. 공장의 직원들은 공장주인 찰리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찰리와 그들 모두의 성공을 가져온다. 실제 웨스트엔드 공연에서는, 그들이 '평범한' 사람임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사회적인 미의 기준을 따르지 않고 다양한 외양의 배우들의 캐스팅했다. 단, 백인 내에서 말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는, 결국 평범한 백인들의 세계였을까.

이는 백인 중심적 사고를 보여주는 웨스트엔드의 한계이기도 하다. 앙상블 배우뿐만이 아니다. 필자가 관람한 웨스트엔드 공연에서는, 롤라와 롤라의 언더커버 역할을 맡는 엔젤(롤라와 함께 공연하는 드래그 퀸들) 한 명 외에는 모든 배우가 백인이었다. 물론, '백인 세계'로 대변되는 '평범'하지만 동시에 권력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변화 과정을 부각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인식의 변화로 더 나은 세계를 만들자는 것, 하지만 이는 동시에 시혜적이기도 하다.

세상이 변하는 데에 인식 변화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타자의 존재가 기존 사회의 내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권력 내부의 사람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킹키 부츠>에서의 서사는 다소 시혜적이고 위험한 태도로 보일 수 있다.

이 점에서 찰리가 지닌 캐릭터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킹키 부츠>는 어쨌든 찰리의 '성장기'이다. 가족의 가업으로 물려받은 그는, 사정이 좋지 못한 공장을 다시 살리고 그 공장혹은 공장으로 대변되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이 서사의 초점 중 하나는 찰리가 어떻게 훌륭한 '사장'이 되는가이다. <킹키 부츠>의 해피엔딩은 찰리가 자신의 공장에서 내보이는 킹키 부츠로 패션쇼에 참가해 이를 성공적으로 해냈기에 해피엔딩인 셈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를 보여주려 했으나 이런 맥락 하에 <킹키 부츠>가 과연 유쾌한 전복적 상상력을 보여준 윤리적 서사인지 의심이 된다. 시스젠더 헤테로 백인 자본가 남성이 사장으로서 다시 일어서는 데 서사가 달려갔기 때문이다.

찰리가 반드시 소수자성을 지녔어야 했다는 의미도 아니고, 찰리가 몰락해야 했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기존의 <킹키 부츠>가 보여주는 찰리의 성장기는, 소수자들을 주변화하고, 더 나아가 타자화했을 뿐 아니라, 그 권력의 위계에서 나는 차이를 다소 권력자 중심적으로 해석했다.

<킹키 부츠>라는 극은 분명 소수자 롤라까지 주요 인물로 내세우며 분명 인권의 가치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뮤지컬이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해피엔딩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저 나름의 대안을 제안하고 있는 극이다. 그런데 결국 그 과정은 작품의 주인공이자, 작품 내 캐릭터 중 가장 권력자에 속하는 찰리의 성공과 맞닿아 있다.

찰리의 재기를 위해 소수자성을 지닌 인물들이 사용 됐다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이야기기도 하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사회의 '찰리'를 따르고 도우면, 저 극 중의 인물들처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이는 어쩌면 다수자의, 기존 사회의 힘을 타자들의 소수자성을 이용하여 더욱 키우겠다는, 그리고 키워야 한다는 욕망의 발현일지 모른다.

소수자를 극에서 다룬다는 것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킹키 부츠>의 사진들.

ⓒ KB Theatre Ltd


물론 반드시 모든 극이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하고, 권력의 해체를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모든 서사들이 검열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다른 극도 아니고 <킹키 부츠> 아닌가. '소수자'와 '인간의 소중함'과 같은 주제를 내걸고 있는 극이다. 이는 상당히 정치적인 서사이고, 그래서 정치적인 비판이 필요하다. <킹키 부츠>가 제시한 해결책과 행복한 세계가 과연 정말로 훌륭한 해결책이고 행복한 세계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킹키 부츠>는 좋은 넘버들과 훌륭한 볼거리를 지닌, 유쾌한 데다 감수성까지 갖춘 잘 만든 쇼 뮤지컬이다. 하지만 그 이면들 들여다 봤을 때, <킹키 부츠>를 마냥 좋은 극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극을 '소수자 극', '윤리적인 극'의 상징으로서만 수용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지 않을까. 오히려 <킹키 부츠>를, 그 극 자체보다 비판과 재고의 여지를 두고 바라봤을 때 더 의미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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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 해외 관극도 함께하며, 잘 만든 서사를 기다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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