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불쌍한 암소> 포스터.

영화 <불쌍한 암소> 포스터.ⓒ Vic Films Productions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서툴지만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기 마련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성공조차도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했다. 계속해서 비범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장들의 첫 영화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을까? 그래서 현재 생존해있는 70세가 넘은 거장들의 첫 영화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들은 과연 떡잎부터 달랐을까?" - 기자말

노동 영화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켄 로치 감독은 지난 50년 동안 끊임없이 소외된 계층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왔다. 관객들은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체로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공감과 연민을 느끼고, 이들을 통해 드러나는 사회의 부조리에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의 첫 영화 <불쌍한 암소> 역시 소외된 계층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그만의 스타일을 아직 찾아보기는 힘든 영화로(두 번째 영화 <케스>에 이르러서 그의 스타일이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막으로 에피소드를 나누고 과도한 독백을 사용한 것이 프랑스 누벨바그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67년에 완성된 <불쌍한 암소>는 조이(캐롤 화이트)라는 젊은 여자가 여러 남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그녀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로 여성의 성에 대한 솔직하고 과감한 묘사가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인 영화였다.

불행한 부부, 새로운 사랑을 찾은 여인

 영화 <불쌍한 암소>의 한 장면

영화 <불쌍한 암소>의 한 장면ⓒ Vic Films Productions


조이가 홀로 병원에서 아들을 출산하는 장면에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아이의 아빠이자 남편 톰은 그녀가 퇴원을 할 때까지 그녀를 찾아오지도 않고 애 아빠가 맞나 싶을 만큼 아기에게 그 어떤 애정을 보이지도 않는다. 조이는 돈이 많을 때는 그와의 관계도, 세상도 완벽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조이를 존중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그녀에게 명령을 하기가 일쑤며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조이에게 톰은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고, 톰에게 조이는 자신의 시중을 드는 예쁜 시녀에 불과하다.

톰이 도둑질로 감옥에 가자 조이는 그의 친구 데이브와 사랑에 빠진다. 그는 조이를 아껴주고 아들 조니에게도 더없이 다정하다. 두 사람은 함께 집을 꾸미고 여행도 떠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이 시간은 너무 짧다. 데이브 역시 도둑질로 경찰에 잡혀 12년 형을 언도받아 그녀 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가 재판을 받는 장면은 빈민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자의 인생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판사가 읊어 내리는 그의 전과목록은 냉소적인 시선으로 보면 결국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하지만 상점에서 담배를 훔친 일로 소년원에 수감되고 이것이 전과로 남아 훈방조치로 끝날 수 있는 일들로 다시 감옥에 들어가는 일의 연속은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하면서 결국 이것이 개인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데이브는 물론이고 조이 역시 도둑질이라는 것에 대한 그 어떤 윤리의식이 없다는 데 있다.

 영화 <불쌍한 암소>의 한 장면

영화 <불쌍한 암소>의 한 장면ⓒ Vic Films Productions


데이브 마저 감옥에 들어가자 조이는 바 종업원으로 일하는 동시에 속옷 모델 일을 시작하고 여러 남자의 유혹을 받는다. 그녀는 데이브에게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기다리며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고 편지를 쓰면서도 다른 남자들을 만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각각의 목적에 맞게 남자를 취하는 조이의 모습은 전에 본 적 없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성 캐릭터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들이 단지 자신의 몸만을 탐하는 것인지 아닌지 그녀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의 진심보다 자신의 욕망이 우선하기 때문이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선은 여전히 보기가 거북하다. 속옷 모델로서 그녀가 하는 일은 속옷 회사와의 계약 하에 상품 홍보를 위한 촬영이 아니라 여자의 벗은 몸을 보고 싶어 하는 남성들이 사진 촬영을 핑계로 모인 자리에서 그들을 위한 포즈를 취하는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탐욕스러운 시선을 조이가 즐기는 모습은 그녀가 성에 있어서 능동적인 것과 별개로 무지가 가져온 수치심의 결여로 볼 수밖에 없다.

조이의 독백, 이 영화의 여성-남성들이 씁쓸한 이유

 영화 <불쌍한 암소>의 한 장면

영화 <불쌍한 암소>의 한 장면ⓒ Vic Films Productions


영화의 제목에 쓰인 '암소: cow'라는 단어는 영미권에서 여성을 욕되게 부를 때 쓰는 속어라고 한다. 그렇다면 조이는 영화의 제목처럼 '불쌍한 암소'일까? 영화에는 그녀 말고도 두 명의 여성 캐릭터가 더 등장하는데 이웃인 앤 아줌마와 바에서 함께 일하는 베릴이다. 두 사람 모두 남성들에 의한 성 착취에 익숙한 여성들로 금전적인 대가를 위해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이들은 남자를 통해 팔자를 고쳐보겠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이가 많은 앤 아줌마가 이제 마지막 기회라며 데이트를 준비하는 모습이 얼마나 필사적인지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고 안타깝다.

앤의 현재는 어쩌면 조이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열여덟에 결혼 해 아기를 낳고 여러 남자를 만나면서 조이의 인생은 항상 만나는 남자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 자신을 무시하고 권위적이었던 톰이 출소하자 그와 이혼을 준비 중이던 그녀는 다시 그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회색빛 더러운 아파트에서 쾌적한 주택으로 이사했지만 톰은 여전히 폭력적이고 그녀를 하인 부리듯 한다. 톰이 제안하는 안락한 삶의 유혹에 넘어간 조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그녀의 말은 공허하게만 다가온다.

조이의 독백은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시작되는데 그녀의 독백이 실은 인터뷰이로서 그녀가 하는 대답이었다는 것을 영화의 마지막에 알게 된다. 그녀의 독백, 그러니까 대답이 있을 때마다 카메라는 거리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그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화면에 담아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을 영화에 담는다. 공원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들,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 등등 다양한 군상들의 다수가 노인이라는 점은 아직은 젊고 예쁜 조이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면서도 그녀의 그리 밝지 않은 미래를 예상하게 한다. 

<불쌍한 암소>는 남성과 여성을 나누고 한쪽 편을 대변하지 않는다. 영화의 장르적 특성과 조이의 명랑한 성격은 관객이 그녀의 인생에 감정이입하는 것을 막는다.

 영화 <불쌍한 암소>의 한 장면.

영화 <불쌍한 암소>의 한 장면.ⓒ Vic Films Productions


앞서 얘기했듯이 이 영화는 켄 로치의 개성이 돋보이는 영화는 아니다. 조이라는 여자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 흐름 안에서 빈민가의 풍경과 거기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사회의 문제점들을 보여주지만 직접적이지는 않다. 특히 데이브와 조이의 사랑을 묘사할 때 뮤직비디오의 한 부분 같은 멜로 드라마적 영상을 사용한 것은 첫 작품이라 해도 의외이기는 하다. 두 번째 영화 <케스>에서부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한 켄 로치는 사회의 영향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개인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오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끊임없이 사회를 고발해 왔다.

냉철한 문제의식과 한없이 따뜻한 인간애의 이상적인 조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영화들은 영화제에서 특히 큰 사랑을 받았고, 2016년에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두 번째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게 된다(첫 번째 수상작은 2006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다). 폴 래버티의 뛰어난 각본(<칼라 송>부터 함께 작업하기 시작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또한 폴이 각본을 썼다)도 각본이지만 여든 노장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따뜻한 시선은 관객에게 무한한 감동을 전달한다.

<불쌍한 암소>는 완성된 조각품의 밑그림을 보는 것 같은 작품으로 아직은 미숙했던 젊은 감독의 여러 가지 시도가 보이는 흥미로운 영화다. 켄 로치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특별한 영화가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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