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포스터.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포스터.ⓒ 리틀빅픽쳐스


1991년도 개봉. 시간이 흘러 서서히 잊혀가던 어느 날 크라이테리온의 간택을 받아 '새것으로' 탈바꿈. 그리하여 우리는 2017년에 와서야 에드워드 양 감독의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만나게 되었다. 국내에선 26년 만의 '첫' 개봉이다.

대만 최초의 소년 살인범, '뉴웨이브' 영화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한 장면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한 장면ⓒ 리틀빅픽쳐스


이것은 대만영화다. 대만 최초의 소년 살인범을 다루고 있으며, 초기 대만사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개봉한 1990년대는 '뉴웨이브'로 대표되는 예술영화와 타국 영화에 시장을 내준 상업영화가 맞부딪쳤다. 그곳은 전장이었고, 전장의 혼란 속에서 많은 대만 영화가 기억밖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잊혔다는 것은 아쉽다. 영화 <영웅본색>처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영화가 아니여서라고 말하기엔 대만 영화계의 수준이 너무 높았다.

당장 우리가 아는 몇몇 대만영화를 떠올려 보면 뿌옇고 시꺼먼 두 색깔이 공존한다. 하얀 일본 영화와 검은 할리우드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그들은 미술관 조명 아래 놓인 조각상처럼 약한 키아로스쿠로를 품에 안는다. 그런데 그 오묘한 색 대비는 어딘가 모를 슬픔을 안고 있는 듯 보인다. 공교롭게도, 대만과 한국의 역사가 비슷한 전철을 밟아왔음을 떠올려 보면 가볍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공산주의를 피해 섬에 고립되었고, 혼란 속에 독재자가 우세했으며 지금까지도 주변국들의 피 터지는 싸움에 연루되었다는 점이 그러하다.

과거 한국영화계처럼 자국 영화의 침체를 겪었을지언정, 이토록 아름다운 영화를 다시금 꺼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접하는 판본은 크라이테리온에서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것인데, 작품의 복원 과정을 보면 이 영화의 원본이 얼마나 빛이 바랬는지 알 수 있다. 두 필름의 대비를 보면, 마치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 듯한 시원함이 느껴진다. 어둠은 좀 더 어둡고 빛은 좀 더 빛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시원함이 역사의 해후를 대변하는 것 같지는 않다. 분명 이 작품은 대만사의 초기를 다루고 있고, 그게 한국 근현대를 떠올린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몹시 이상한 일이다. 말하자면 이상한 일의 연속이랄까. 우리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26년 만에 만났고, 그 기간 동안 대통령이 6번이나 바뀌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면 무언가 풀리지 않은 앙금이 있는 것처럼 가슴이 먹먹해지고는 한다. 그리고 이 글은 그 앙금에 관한 이야기다.

붉은빛이 주는 희미한 불안감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한 장면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한 장면ⓒ 리틀빅픽쳐스


기술적인 면으로 보았을 때, 이 영화는 더욱이 모호함을 유지하며 관객의 불안감을 가중한다. 일단은 카메라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철저하게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행인으로서의 면모가 크다.

그 증거로 화면 속의 인물과 카메라의 시선이 삼각형으로 완성되는 걸 볼 수 있다. 역삼각형 구도로 짜인 이 화면에서 우리는 꼭짓점이다. 그런데 우리 눈이 두 개고 그 두 개로 하나의 시점을 만들어 내는 것을 떠올려 보자. 즉, 카메라의 눈과 인간의 눈이 정반대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두 삼각형을 붙여서 모래시계 형태다.

모래시계가 가운데를 중심으로 종이접기를 한 듯한 모양새인 걸 떠올려 보면, 우리가 보는 세계의 반대편에 영화가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저들을 알고 저들은 우리를 모른다는 점에서 경찰서의 반투명 거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즉, 앞선 두 인물의 시선을 성공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위치다. 기술적으로는 영화의 현실 재현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내용상으로는 영화와 현실을 헛갈리지 말라며 반박하는 모양새다.

조명으로 보았을 때, 영화 내내 빛과 어둠의 대비가 이루어지는 걸 지적할 수 있다. 아마도 인공 조명을 최대한 배제하고 찍었을 게 확실한 이 영화는 보는 사람에게 눈을 침침하게 한다. 인공조명을 배제하고 자연조명으로 찍었기에 실내에선 한없이 어둡고 야외에선 한없이 밝다. 영화 포스터의 아름다운 모습도 그렇게 촬영되었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해 이 영화는 '키아로스쿠로'를 의도한 건 아니다. 자연상태의 조명에서 은밀하게 드러나는 인물의 얼굴은 의도적으로 부각한 인간의 추악함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추악함을 곧바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자연스러운 비판을 유도하는 것이다. 간혹 가다가 어두운 실내에서 촛불을 밝히는 장면이 나오곤 하는데, 고작 촛불만큼의 양심만이 남아 있었노라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가 남긴 키아로스쿠로의 앙금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한 장면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한 장면ⓒ 리틀빅픽쳐스


키아로스쿠로란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강렬한 인상을 주는 기법이다. 아마 당신도, 주인공 말고 온통 새까만 배경을 한 어느 미술 작품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혹은 어둠 속에서 손전등으로 얼굴 아래를 비추어 상대방을 기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른바 귀신 놀이다.

지금 당신이 떠올리는 느낌처럼 이 기법은 보는 사람에게 대상을 경계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사람은 주변을 돌아볼 수 없으니 갑자기 튀어나온 물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식별할 수 없다. 군 복무 시절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고라니에 놀라는 것과 비슷하다. 경각심을 가지니 물체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고라니와는 달리 그림이기에 관람자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지만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진다. 쉽게 말해, 키아로스쿠로는 대상에 대한 통찰력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다.

그런데 그 통찰력은 '섬뜩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말하자면, 위기를 피하려는 본능이 작용한 결과다. 그렇다면 그 위기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그 위기감의 근원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하고는 했다. 그건 그림이 그려진 배경에서 찾을 수도 있고, 관람자의 슬픈 경험에서 우러나는 것일수도 있다. 전자라면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고, 후자라면 트라우마에 대한 자기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는 그 두 가지 모두를 상정해 볼 수 있다. 만약 이 작품을 회화라고 가정한다면, 청소년 살인을 피사체 삼아 뒷 배경에 대만 초기 역사를 세워둔다. 마치 키아로스쿠로처럼 배경은 어둡고 피사체는 밝게 빛난다. 그렇다면 어두운 건 대만 초기 역사다.

흔히 사용하는 인용구 중에 '어둠을 밝히다'라는 게 있다. 이 문구는 어둠을 사람이 볼 수 없는 비가시의 영역, 공포의 대상으로 가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어둠을 몰아내 안전해지고 싶어한다. 이 작품도 어둠을 몰아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전구에 불을 켜는 누군가의 손이 보이고, 이어서 화면이 새빨개진다. 이 영화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관객은 이 영화가 역사에 관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한다고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어지는 새빨간 화면에서 우리는 마치 피범벅이 된 듯한 불안감을 느낀다. 살인 사건이라는 제목과 붉은색 화면이 매치된다. 화면 전체가 새빨개지며 마지막으로 밝은 전구를 집어삼킨다. 그건 마치 검은 위협 뒤에 붉은 위협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즉, 불을 밝혔음에도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에서 검은색 배경이 역사의 무언가라고 가정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역사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역사를 극복한 후에 이어지는 위협'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를 극복한 후에 이어지는 위협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한 장면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한 장면ⓒ 리틀빅픽쳐스


영화가 그렇게 느껴지는 건 오프닝과 결말이 유독 괴리되기 때문이다. 작품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소년이 살인을 저질러 감옥에 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화 내용 자체로는 소년이 살인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데, 묘사되는 사회상을 보면 당시 정부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 담겨 있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소년은 '그런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그런 소년에게 이입하여 대만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일깨우게 된다. 그런데 결말에서 감독은 관객의 추측을 뒤엎어 버린다.

결말보다 조금 전에 소년이 소녀를 면담했던 영화감독을 만나는 장면이 있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소년이 소녀를 알던 사람을 하나 둘 찾아가는 것인데, 감독을 향한 소년의 대사가 인상 깊다. 소년이 감독에게 "소녀는 어디에 있나요"라고 묻자, 감독은 소년에게 "여자아이가 사라져 버렸어. 연기가 자연스러웠는데"라고 답한다. 그러자 소년은 "자연스러워요? 가짜도 구별 못 하면서"라고 소리친다.

아무래도, 우리가 그 대사에서 떠올리는 건 '영화는 가짜 현실'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소년의 대사는 관객에게 현실로 눈을 돌리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어도 결국엔 영화는 가짜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진실은 항상 현실에 있으며 그걸 풀어내는 게 관객의 몫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런 걸 볼 시간에 어서 행동하라고 재촉하는 것이다.

그가 영화감독이라는 점에서 작품의 감독인 에드워드 양을 대변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소년의 대사는 지식인 계급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수동적인 위치의 관객에게 원래 정보(실화)를 가공하여 미디어(영화)로 보여주는 작업은 지배층과 하층민 사이의 지식인들에게 주어진 의무다. 말하자면 사회를 움직이는 부르주아들이야말로 현실 세계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실화 바탕 영화가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역사를 극복하는' 듯한 이 장면 뒤에는 다시금 '붉은 위협'이 닥쳐온다.

소년이 감옥에 들어가고 난 뒤 소년의 친구가 찾아와 무언가를 전달해 달라 요청한다. 그 물체는 바로 녹음테이프다. 편지로 해도 될 일을 굳이 녹음기로 전달하는 이유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그 테이프 안에 응원의 목소리가 담겨있다는 건만은 확실하다. 몇 번의 거절 끝에 테이프를 받아 든 직원은 소년이 돌아간 뒤에 곧바로 쓰레기통에 버려 버린다. 대사로 "쓰레기"라고 명확하게 언급한 후 카메라도 쓰레기통을 지긋이 응시한다. 

그 다음 장면에선 망가졌던 라디오가 땅바닥에 떨어졌다가 정상으로 돌아온다. 영화 중간에 모종의 호기심으로 분해되었다가 고장 났던 라디오다. 완전히 고쳐진 것도 아니어서 손으로 들어 엉거주춤 서 있어야 잘 들린다. 영화 내내 목소리에 대한 메타포로 등장하던 라디오와 녹음기의 관계는 이 장면에서 종료된다. 녹음기가 개인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진실의 선'이라면 라디오는 위로부터 전해지는 '거짓 선전'일 텐데, 녹음기는 버려지고 라디오는 고쳐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둘 다 절반만 변한다. 녹음기는 테이프만 있으면 다시 기록될 수 있고 라디오는 어중간하게 고쳐졌다. 즉, 개인이든 지식인이든 승리와 패배를 나눌 수 없도록 모호한 태도를 유지한다.

영화는 자막을 통해 소년이 15년 동안 복역한 후 출소했다고 말한다. 그로부터 몇 장면쯤 지나서, 영화가 끝나기 전 장면에는 소년의 어머니가 교복을 들고 있다. 출소한 소년은 서른쯤이니 덩치가 커져서 그 교복을 입지 못할 것이다. 말하자면 소년은 변해도 교복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소년이 저지른 살인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역사의 그 무엇도 기록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 기록은 반푼이에 불과해서 희미한 불안감을 남긴다. 붉은빛이 덮쳐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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