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숙과 변호인단은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연다.

문정숙과 변호인단은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연다. ⓒ (주)NEW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일제강점기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때가 까마득한 오래 전 일 같아도 한두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그 시대에 성인으로 혹은 어린아이로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아직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특히 강제징용·(근로)정신대·위안부 등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 이들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해방되지 못한 이들이다. 광복은 찾아왔지만 아직 어둠속에 갇혀 있다. 우리가 오랫동안 일본의 '입법'을 통한 배상과 사죄, 명예회복을 요구해왔지만 실현되지 못했고, 우리 정부가 이들에게 해준 보상도 여러 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국과 일본의 민간에서는 꾸준히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행동이 있어왔다. 일본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및 정신대 피해자들이 보상 및 사죄를 요구한 '관부재판'도 그러한 노력 중 하나였다. 1심과 항소심에서 일부 승소를 이끌어낸 뜻깊은 재판이었음에도 그동안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널리 알려야 하는 진실을 영화라는 도구를 통해 적절히 이끌어내 준 것 같다. 

몰입할수록 힘들고 아픈, 그녀들의 사연

 할머니들과 문정숙(김희애)은 재판을 위해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로 향한다.

할머니들과 문정숙(김희애)은 재판을 위해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로 향한다. ⓒ (주)NEW


<허스토리>는 1991년 부산에서 여행사 사업을 하는 문정숙(김희애)이 위안부 및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이들을 도와 일본을 상대로 재판을 제기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문정숙은 실존 인물인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이사장을 모델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1심만 6년을 끈 재판을 사비를 대가며 지원했던 김 이사장의 선하고 우직한 마음이 영화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영화는 이때만 해도 비교적 젊었던 할머니들 한 분 한 분의 사연을 묘사해 나간다. 처음엔 자신도 없고 움츠리고 나서기 꺼려했던 할머니들이 재판이 진행되면서 점점 변화하는 모습도 매끄럽게 포착해낸다. 관객으로선 몰입할수록 힘들고 아픈 사연이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의 몰입도도 무리없이 붙잡아 둔다. 기자는 영화를 보기 전에 '촌스럽게 울지 말자'고 다짐하며 상영관에 들어갔지만 숨겨왔던 원고들의 사연이 법정에서 하나하나 드러나자 눈물을 참기가 힘들어졌다. 객석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쳤고 훌쩍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한국처럼 크지 않은 영화산업 규모에서 그동안 적지 않은 위안부 소재 영화가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종종 만들어질 것 같다. 나문희가 주연한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동원 피해자가 가진 여러 모습을 영화 속에 다양하게 표현해냈다. 접근법이 신선하다는 평이 많았고, 실제로 위안부 피해자들로부터 한가지 모습만 보려 했던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만든 면이 있었다. 실제 사실과 픽션을 균형있게 섞은 감각도 돋보였다. 반면 <허스토리>는 피해자의 상처를 좀 더 직시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영화를 만든 이도, 역할에 집중한 배우도, 상영관을 찾아 일정한 시간을 내어준 관객도 큰 에너지가 소요되고 높은 공감능력이 요구된다.

실제로 민규동 감독이 영화 막바지에 쓰러졌다고 한다. 배우들도 할머니들께 누를 끼치지 말자고 서로 격려하며 촬영해 나갔다고 한다. 촬영이 끝난 뒤 주연배우가 우울증을 앓았다는 인터뷰 기사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영화는 태도가 중요하다. 좋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 좋은 영화를 만든다. 재능이 부족한 사람도 좋은 마음자세를 가지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영화를 여러 편 만든 감독과 영화인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영화에 과거 회상 장면이 한 컷도 없는 이유

 1심 재판이 6년을 끌면서 할머니들과 소송지원단은 일본 극우파들에게 무수한 공격을 받는다.

1심 재판이 6년을 끌면서 할머니들과 소송지원단은 일본 극우파들에게 무수한 공격을 받는다. ⓒ (주)NEW


영화에는 할머니들의 젊은 시절을 보여주는 과거 회상 장면이 한 컷도 없다. 섣불리 과거회상 신을 넣어서 눈물폭탄을 터뜨리기 보단 할머니들의 회상과 진술, 과거의 잔인했던 경험이 현재의 삶에 미치는 복잡다단한 영향들에 초점을 맞췄다. 문정숙이 피해자 진술을 모으기 위해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위안부였다가 나중엔 위안소 주인이 된 피해자(박정자)를 만나는 장면도 기존 위안부 소재 영화에선 다루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2시간이라는 타임 프레임(time frame) 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사실을 배치하고 줄거리를 전달하는 데 급급하고, 곳곳에서 디테일이 뭉개진 인상을 주기도 한다. 또 대중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가질 법한 편견 혹은 이중적인 시선을 영화 곳곳에서 일부 드러낸 것은 좀 아쉽다. 해방 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위안부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공개했을 당시, 이젠 노인이 된 피해자에게 우리 사회는 존중과 위로를 더 많이 보냈고, 용기 있는 투쟁에도 기꺼이 동참했기 때문이다.

또 이 영화에도 그간 위안부 피해를 담은 영화나 여러 콘텐츠에 은연중에 들어간 부정확하거나 모호한 정보가 약간 들어가 있다. 무엇보다 재판 자체는 실화이고, 영화 마케팅도 그 점을 강조해왔기 때문에 관객이 영화를 볼 때 영화 속 원고들의 피해 사실 하나하나가 실제로도 개별적 사실이라고 착각할까 우려된다.

일례로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일본인 담임이 법정에 나와 증언한 부분이 그렇다. 일본인 담임의 법정 증언은 영화에서처럼 실제 있었던 일인 건 맞다. 영화에선 이 일본인 선생이 서귀순(문숙)을 근로정신대에 직접 보낸 것으로 나오고, 그에 대해 직접 사죄한다. 그러나 이 일본인은 구술 자서전에선 다른 선생이 제자를 근로정신대에 보낸 것이라며, 본인은 "이제 갓 졸업한 어린아이를 멀리 일본에 있는 공장에 보내는 것이 말이 되냐며 화를 냈다"고 썼다.

이 자서전은 <스기야마 토미 1921년 7월 25일생>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출판돼 있다. 스기야마는 해방 당시 제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가 한일 민간교류에 활발히 참여했다.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드는 교육을 했다며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사죄도 한 양심적인 일본인이다. 이렇듯 영화와 자서전이 서로 다른 것에 의문이 있고,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잘 만들어진 대중 영화, <허스토리>

 문정숙(김희애)의 친구이자 동료 사업가인 신 사장(김선영)은 부산여성경제인협회가 위안부 피해 신고 전화를 개설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는 위기 때마다 문 사장을 돕는다. 김선영의 사투리 연기가 자연스럽다.

문정숙(김희애)의 친구이자 동료 사업가인 신 사장(김선영)은 부산여성경제인협회가 위안부 피해 신고 전화를 개설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는 위기 때마다 문 사장을 돕는다. 김선영의 사투리 연기가 자연스럽다. ⓒ 신상미


그럼에도 <허스토리>는 잘 만들어진 대중 영화이고, 이런 상업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위안소 제도와 일본의 조직적인 국가범죄에 대해 인지하고, 피해자에게 공감하는 인권 감수성을 높일 수 있다. 이 영화를 통해 할머니들의 용기 있는 투쟁과 평범한 이들의 헌신이 널리 알려지고, 의미있는 승리의 기록을 일본 정부에 재차 각인시켜 책임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또 김문숙 이사장이 사재를 털어 '민족과여성 역사관'을 운영하면서 어려움이 많다고 하는데 영화를 계기로 후원과 관심이 모아지면 좋을 것 같다. 

<허스토리>엔 영화 <박열>에 나왔던 배우들이 제법 등장한다. 박열-가네코 부부에게 동정심을 보였던 다테마스 예심판사 역의 김준한이 <허스토리>에선 재일교포 이상일 변호사를 연기했고, 박열을 변론했던 후세 다쓰지 역할의 야마노우치 타스쿠가 부산 주재 일본영사관 직원 역을 맡았다. <박열>에서 내무상 미즈노 렌타로를 연기했던 재일교포 3세 김인우는 재판장을 연기했다.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아나키즘 사상을 연구해온 김명섭 박사는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극우파에겐 천황을 비판한 대역죄인"이라며 "<박열>에 출연한 재일교포·일본인 배우들이 일본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하지 못할 정도로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 바 있는데(관련 기사 : 역사학자들이 본 <박열>, 영화엔 없는 안타까운 이야기) 그래서인지 국내 영화에 출연한 그들의 모습이 유난히 더 반가웠다.

배우들 모두가 연륜 있는 연기를 펼치며 극에 몰입도를 높였는데 특히 문정숙의 친구인 신 사장(김선영)의 감초 연기와 배우 문숙의 아우라가 인상에 남았다. 김준한도 재일교포가 구사할 법한 한국어 발음을 자연스럽게 잘해냈다. <허스토리>는 오는 27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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