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기리에 방송 중인 JTBC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는 알려진 것처럼 현직 판사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원작이 있는 다른 드라마와 달리 원작 소설을 쓴 문유석 판사가 드라마의 시나리오도 같이 썼다는 것이다.

소설이지만 신임 여성 판사인 박차오름이 법원에서 겪는 우여곡절을 현직 판사의 경험을 토대로 풀어낸 <미스 함무라비>는 드라마화 소식이 알려졌을 때부터 화제를 모았다. 우리 나라 판사는 법원에서 '땅땅땅' 망치를 때리지 않는다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토막 상식부터 선과 악으로만 나눌 수 없는 재판 속 무거운 정수도 담아냈다.

그렇다면 드라마의 각색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드라마는 원작 소설의 재판 에피소드를 보다 깊게 다루고, 동시에 캐릭터의 매력을 더했다. 책과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박차오름 역할을 맡은 배우 고아라.

박차오름 역할을 맡은 배우 고아라. ⓒ JTBC


판사가 소설을 쓰게 된 계기

"2015년 봄에 한겨레 신문으로부터 매주 한 차례 원고지 30매 분량으로 내가 담당한 재판이나 조정 사례를 연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네 이웃의 분쟁'이라는 제목으로. 하지만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사생활 침해의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농담 삼아 '차라리 픽션인 소설이라면 몰라도'라는 군말을 덧붙였던 것이 화근인데, 설마 하니 평생 써본 적 없는 소설을 정말로 쓰라고 할 줄은 모르고 한 소리였다. (중략) 매회 한 가지 분쟁을 다루어야 하는 신문 연재의 특성상 연작 콩트가 걸맞아 보였다." - 책 <미스 함무라비> 에필로그 중에서

문유석 판사가 책 <미스 함무라비>에 쓴 에필로그를 보면 <미스 함무라비>는 한겨레 신문에 연재된 소설이기는 하지만, 초기 기획 단계에서는 소설보다 재판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콩트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신문에 연재됐던 소설을 모두 묶어 펴낸 것이 책 <미스 함무라비>다.

허구이긴 하지만 실제와 가까운 재판 사례를 소개하는 것이 초기 목표였기 때문에 드라마의 중심이 되는 캐릭터나 캐릭터가 만들어내는 서사는 원작 소설에서는 다소 부수적인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미스 함무라비'라고 불리는 신임 판사 박차오름, 그보다 냉철한 3년차 판사인 임바른, 부장판사인 한세상, 옆방 판사인 정보왕까지 주인공들의 콩트 같은 이름은 인물을 파악하는데 드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인터넷 상에서 화제를 불러 모았던, 박차오름 판사의 '부르카' 에피소드는 책에서 그대로 드라마로 가져왔다. 박차오름 판사가 입은 짧은 치마를 보고 "판사 옷차림으로 가당치 않다"고 지적하는 부장판사의 말에 천연덕스럽게 집에서 가져온 부르카를 꺼내입는 박차오름 판사. 이는 '신입또라이'로 불리는 박차오름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장면으로 책에 있는 내용이 그대로 드라마에 쓰였다.

"그게 판사 옷차림으로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해!"
"법원조직법이나 법관윤리강령에 치마 길이 규정이 있나요?"
부들부들 떨며 한 부장이 입을 떼려는 순간 박 판사가 선수친다.
"뭐, 그렇게 못마땅하시다면 조신하게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쇼핑백을 든 채 화장실로 들어간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의 모습은 임 판사는 물론 부속실 여직원까지 경악시켰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을 시커멓게 덮어쓰고 눈 부위도 망사로 가렸다. (중략) 다들 입을 떡 벌리고 멍하니 있는데 부르카 안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가진 옷 중에 가장 조신한 옷인 것 같아서 챙겨 왔어요."" - 책 <미스 함무라비> 중에서

 고아라가 연기한 박차오름 판사의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차도르' 에피소드. 책 속에도 거의 비슷하게 등장한다.

고아라가 연기한 박차오름 판사의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니캅' 에피소드. 책 속에도 거의 비슷하게 등장한다. ⓒ JTBC


 차도르를 입고 등장한 박차오름(고아라)를 보고 황당해하는 판사들.

니캅을 입고 등장한 박차오름(고아라)를 보고 황당해하는 판사들. ⓒ JTBC


드라마 속에서는 눈도 가리는 부르카 대신 눈만 노출한 니캅으로 바뀌었지만, 박차오름의 씩씩한 성격은 그대로다. 배우 고아라는 자칫 과하게 연기하기 쉬운 박차오름 캐릭터를 특유의 매력으로 연기해내고 있다.

1. 박차오름과 임바른의 러브라인, 책에선...

"주폭 노인 에피소드 초고 마지막에는 주인공들의 사이가 좀더 진전되는 신이 있었다. 고민 끝에 결국 빼고 말았다. 일에 더 집중하라고 벙커 부장 노릇을 한 셈이다. 두 주인공에게 미안하다." - 책 <미스 함무라비> 중에서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서 임바른 역할을 맡은 배우 김명수.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서 임바른 역할을 맡은 배우 김명수. ⓒ JTBC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원작 소설에서도 박차오름과 임바른(김명수 분)은 학창 시절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회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임바른 판사가 무리해서 일하는 박차오름 판사의 일을 밤을 새서 도와주는 모습도 드라마와 똑같이 등장한다.

하지만 책 속에서는 이후 둘 사이의 이렇다 할 변화된 관계가 없다. 이들의 관계를 드라마에서는 보다 분명히 정의내리기 시작했다.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6회에서 임바른 판사가 박차오름 판사에게 자신의 호감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박차오름 판사가 임바른 판사의 고백을 거절하긴 하지만, 적어도 이들의 관계는 책보다 훨씬 깊게 진전된 셈이다.

2. 조연 캐릭터들의 매력, 드라마 속에서 극대화

 원작에는 없는 캐릭터 이도연을 연기한 배우 이엘리야.

원작에는 없는 캐릭터 이도연을 연기한 배우 이엘리야. ⓒ JTBC


서울중앙지법 민사 제44부 속기 실무관 이도연 역할을 맡은 배우 이엘리야. 드라마에서는 박차오름과 임바른 사이의 러브라인만큼, 정보왕과 이도연 사이의 러브라인도 중요한 서사로 전개된다. 비록 그 러브라인이 이뤄질지 아닐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첫 회부터 냉정하면서도 맡은 일은 어김없이 해내는 역할로 눈길을 끌었던 이도연 실무관은 원작 <미스 함무라비> 속에는 없는 캐릭터로 드라마에서 만들어진 인물이다. 원작 소설 속에서는 주로 법원 속 판사들의 세계를 중심으로 에피소드가 전개된다면 드라마 속에서는 판사를 제외하고 법원에서 일하는 다른 인물들도 풍부하게 다루려고 한다.

또 세 살짜리 아들을 둔 싱글맘으로 등장한 제44부 실무관 윤지영(염지영 분)과 법원 경위 이단디(이예은 분) 같은 인물도 마찬가지로 드라마 속에서 창조된 인물이다. 이들 외에도 드라마 속에서는 법원에서 일하는 청소 노동자 등 다양한 인물들을 보여주었다. 상대적으로 가볍게 언급되고 지나갔던 임바른 판사의 가족들의 사연도 드라마에서는 보다 깊게 다루어진다.

3. 직장 내 성폭력 에피소드는 더 자세하게

"대기업에 어떻게든 들어가보려고 더러워도 참고 비위 맞춰주며 입사했어요. 인턴 여사원들 대부분이 이런 꼴을 당했어요. 입사한 후에도 회식 때마다 꼭 러브샷에 블루스, 심지어 해고당한 바로 다음날 팀원들 집합시켜서 또 회식을 했어요. 어차피 형식적인 조치고 나는 실세라 곧 돌아온다, 이럴 때 누가 충성하고 누가 배신하는지 볼 거다, 배신자는 가만두지 않겠다. 그날은 더 오버하더라고요. 싫다는데 굳이 절 바래다준다며 따라와서는 강제로 키스하려 덤비고, 엉덩이를 만지고..." 눈에 물기가 비쳤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어갔다." - 책 <미스 함무라비> 중에서

 책과 드라마를 번갈아 보면 박차오름 역할에 배우 고아라가 적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책과 드라마를 번갈아 보면 박차오름 역할에 배우 고아라가 적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 JTBC


책 <미스 함무라비>에서 상대적으로 짧게 다루어졌던 인턴 사원 성희롱 재판 에피소드는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3회에서 보다 입체적으로  자세하게 다루어졌다. 두려움과 압박감 같은 감정을 드라마에서 보다 깊게 짚었다. 또 최근 미투 운동이나 해시태그 업계_내_성폭력 운동을 드라마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점은, 최근 시류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겠다.

남성 판사인 임바른 판사와 정보왕 판사가 시장에 가서 평소 여성들이 당하는 성희롱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일화도 드라마에서 추가됐다. 드라마 속 박차오름 판사는 당황하는 판사들을 보고 이렇게 일갈한다. "이제 여성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아시겠어요?" 드라마 속 대사 중에 2010년대 여성 운동의 가장 뜨거운 분기점이 됐던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이 추가로 언급됐다는 것도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김제동은 책 <미스 함무라비>의 추천사를 이렇게 썼다. "소설인데 만화처럼 그림이 보였어요. 읽는 내내. 판사가 소설도 쓰고 게다가 재밌기까지 하니, 짜증나네요." 책과 드라마를 대조하는 내내 문유석 판사에게 이 말을 비슷하게 되돌려주고 싶었다. '연작 소설에 이어 시나리오까지 잘 쓰다니, 짜증나네요!'

덧붙이는 글 <미스 함무라비>(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2016.12. / 1만3500원)
미스 함무라비 고아라 성동일 김명수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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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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