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유독 일본 영화에서 배경에 대한 관조가 도드라짐을 느끼곤 한다. 이유를 물어도 콕 집어 답하기 어렵다. 사실 미(美)라는 게 주관적이니 콕 집어 말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나름의 충실한 답변을 찾아보는 게 좋을 듯하다. 따라서 이 글은 배경이 주는 효과에 관한 것이자, 일본 영화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인물이 아니라 배경이 주인공인 장면들

일본 영화를 보면 인물이 아니라 배경이 주인공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인물을 따라가던 카메라가 갑작스럽게 배경을 비춘다. 그 화면 전환은 여러 장면으로 이어지며 일련의 풍경을 완성해 낸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 바람에 흩날리는 나무, 메마른 벤치에 쏟아지는 햇살. 이것들이 모여 '여름'이라는  분위기를 완성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다시 인물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이때 우리는 여름 속에 인물이 있기보단, 여름과 인물이 별개의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걸 배경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단지 영화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단지 매체의 차이만 있을 뿐, 기본적으로 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건 같다. 이를테면 신카이 마코토의 < 초속 5cm >에서 벚꽃, 언덕, 선로의 이미지를 예로 들 수 있다. 영화 내내 문득 삽입되는 그 배경들은 별개로 놓고 보면 아무런 의미조차 없어 보인다. 그러나 < 초속 5cm >의 1부가 끝났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그 배경 모음이 없었다면 이야기의 끝이 허무했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 < 초속 5cm >의 한 장면

영화 < 초속 5cm >의 한 장면ⓒ 태원디지털엔터테인먼트




그 이유에 관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배경은 인물보다 보편적이다. '열 길 우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사람은 성격을 가늠 짓기 어렵다. 영화는 재미를 주어야 하기에, 인물들의 성격은 현실보다 독특하고 그만큼 독특한 사건을 겪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 속 인물을 보며 새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영화 속 인물처럼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반면 배경은 세계 어디를 가나 비슷한 풍경이 있다. 그에 덧붙여서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건 배경이 주는 느낌이 흔히 말하는 심상이기 때문이다. 사람도 어딜 가나 비슷한 사람이 있겠지만, 적어도 배경만큼 비슷하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배경은 인물보다 보편적이지 않다. 위의 문단을 뒤집는 게 아니다. 영화가 배경을 묘사하는 시점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 초속 5cm >에서는 하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새의 시점이 있다. 그것을 포함해서, 카메라가 인물을 쫓는 게 아니라 고정된 시점 옆으로 인물이 지나가곤 한다. 즉, 카메라가 잡는 건 배경이지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 그 카메라가 잡는 시점은, 사람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배경 그 자체인 것이다.

결국 배경은 영화에서 단순히 인물을 보조하기 위한 게 아니게 된다. 배경은 인물과 별개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주는 효과는 무엇인가. 이 부분을 철학적으로 깊게 파고들면 무척 다양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몰라도 영화를 재밌게 보았다. 그러니 우리가 아는 선에서 답변을 찾아보자.

 영화 < 초속 5cm >의 한 장면

영화 < 초속 5cm >의 한 장면ⓒ 태원디지털엔터테인먼트


세상을 사변적으로 바라보기

우리가 살면서 배경에 의의를 두지는 않지만, 영화에선 배경 하나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쉽게 말해 영화에서는 배경이 낯설게 느껴진다. 즉, 우리가 보는 세상이 사실은 누군가가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를테면 망원경이나 카메라로 바라보는 풍경을 떠올려 보자. 고작 테두리 안에 갇혀 있을 뿐인데도 눈으로 보는 것과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결과적으로 영화에서 배경이 주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익숙한 장면을 낯선 곳에서 바라볼 때 생기는 이질감이, 우리에게 장면이 주는 심상을 온전히 전달한다. 대상을 사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배경을 사변적으로 보아서 얻는 이득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면서 배경에 부여한 의미들, 그 추억들을 떠올리며 얻을 심상을 생각해 본다면 사변적으로 보는 건 손해가 아닐까?

어떤 맥락에서 사변적으로 본다는 건 손해가 아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하듯이, 어렵게 생각하던 게 무척 쉽게 풀릴 때가 있다. 상대방과 싸웠을 때 우리는 줄곧 사과하기를 망설이곤 한다. 그 망설임은 사과의 본질이 '먼저 손을 내민다'임을 깨달을 때 사라진다. 즉, 사변적 사고에는 본질을 탐구하는 힘이 있다. 그러니 배경을 사변적으로 바라본다는 건 경험을 제하고 심상만을 취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 초속 5cm >의 주인공처럼 전철을 타고 반나절 거리의 첫사랑을 만나러 가본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영화를 보며 배경에서 경험을 찾을 필요는 없다. 배경에서 떠올리는 경험은 등장인물의 몫으로 남겨두면 된다.

 영화 < 초속 5cm >의 한 장면

영화 < 초속 5cm >의 한 장면ⓒ 태원디지털엔터테인먼트


우리가 경험을 제하고 배경에서 얻는 건 일종의 이미지다. < 초속 5cm >의 오프닝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영화가 시작하고 물웅덩이에 떨어진 벚꽃이 보인다. 골목에 세워진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보인다. 자동차도 있고, 자동차가 세워진 언덕길도 보인다. 두 사람이 언덕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두 사람은 전철 건널목 앞에서 멈춘다. 여자아이가 건널목 바깥쪽에 서 있고, 전철이 지나간다. 이후 여자아이의 행적은 이사를 하였으리라고 추측될 뿐이다.

벚꽃은 봄에 핀다. 작중 시간은 봄이다. 아마도 학기 초일테고, 학기 초는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봄 날씨가 온화하듯, 작중에 묘사되는 언덕길은 어딘가 모르게 푸근한 느낌이다. 일본에는 언덕길이 참 많은데, 대부분 성인이 되면 도심으로 진출하니 언덕길이란 곧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여기에 덧붙여서 벽 앞에 자전거가 있다. 일본에서 자전거는 중고등학생들의 주요 통학수단이다. 자전거 옆의 자동차는 어른들의 이동수단이다. 어른도 중고등학생도 아닌 두 주인공은 아무 탈것 없이 걸어가기만 할 뿐이다. 정리하자면,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아주 어린 시절의 첫 만남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도심으로 진출하니 다시 만나자는 그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언덕길이란 그런 이미지다. 이 영화를 보는 연령대 중 이십 대가 많은 걸 고려해보면, 언덕길은 빠르게 내려가는 만큼 빠르게 지나간 날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이른바 '십 대의 시간관'이라 불리는 개념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점점 빠르게 흘러만 간다. 이 영화를 보는 이십 대에게도,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하루를 바쁘게 살다 보면 유년 시절이 쉽게 잊혀진다. 어렸을 때는 모르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어린 시절이 무척 빠르게 흘러갔으리라 추측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 시절을 언덕길의 이미지로 표현하게 된다. 이는 호소다 마모루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도 나타난 바가 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에서도 나타난 바가 있다.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작품 포스터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작품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여고생 마코토는 언덕길에서 붙는 가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한바탕 구르게 된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장남 료타는 늙은 아버지와 함께 언덕길을 내려간다. 그런데 이 언덕길의 마지막에는 시간의 끝을 알리는 무언가가 항상 자리 잡는다. < 초속 5cm >에서 언덕길의 마지막에 있는 건 전철 건널목이다. 전철이 달려가는 중에 건널목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는 없으니 그들은 단절되고 만다. 봄도, 전철도 일정 주기로 반복되지만 어찌 됐든 그 순간에 넘어갈 수가 없다. 여기서 '그 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너머로 사라지기에 그들은 영영 만나지 못한다.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한 채로 영영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일본 영화는 그래서 판타지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시간이란, 언덕길처럼 빠르게 내려가는 것이고 그 끝에는 항상 죽음에 가까운 단절이 있다. 결국 죽음을 극복하는 마법 같은 염원을 담아내고야 만다. 이를테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여고생 마코토는 전철에 치이는 순간 '타임리프'를 통해 과거로 이동하게 된다. 반대로, 극복하지 않는 인물들도 있다. 흘러가는 시간이 비가역적임을 인정하고 순순히 살아가는 것이다. < 초속 5cm >의 선로는 그런 이미지다.

'세카이'와 '메이와쿠' 

벚꽃이 만개하는 봄, 언덕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삶, 자전거로 등하교하는 학생들, 전차와 전철이 오가는 플랫폼. 이것들은 여러 일본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니 일본 문화에 익숙하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니다. 전 세계에 일본 영화 팬이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이 이미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한 편의 정물화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카메라는 벽에 걸린 액자처럼 고정된 시점으로 세상을 관망한다. 관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배경을 생산해낸다. 그림 속 세상이 멈춰 있듯, 소리를 배제한 채 배경만을 보여준다. 그 이미지는 둘 만의 대화가 오가는 상황, 혹은 인물이 개입되지 않은 배경 자체만을 보여준다.

배경 자체만을 보여준다는 것은 몹시 폐쇄적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배경이 고정되어 있다는 건, 주어진 수식을 풀어내는 것과 같다. 풀이 방법이 다를지는 몰라도 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다. 우리가 그 장면에서 무엇을 떠올리든 간에, 결과적으로 배경 속 이미지에 집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미지를 조합하는 방법이 다를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배경이 중시되는 작품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배경묘사가 싫은 게 아니라 정해진 결론을 강요받는 게 싫은 것일 수도 있다.

 영화 < 초속 5cm >의 한 장면

영화 < 초속 5cm >의 한 장면ⓒ 태원디지털엔터테인먼트


정해진 결론, 폐쇄적인 배경, 소리 없는 세상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건 몹시 낭만적이다. 갑갑한 이곳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배경과 소리로만 존재하는 '낭만적인 당신'이다. 그래서 일본 영화는 인물을 구원하기 위해 두 사람만의 세계를 설정하곤 한다. 낭만적인 당신, 두 사람만의 세계는 외부와 분리된 '세카이(セカイ)'다. 그 세카이에서 인물은 배경이든 실제 인물이든 자신을 구원할 무언가를 찾게 된다. 그게 배경처럼 추상적인 것으로 묘사된다면 허공에 허우적대는 것처럼 보일테고, 특정 인물을 그리워한다면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일본 자체의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흔히 매체에서 묘사되는 일본인은 '죄송합니다'를 연발하곤 한다. 이른바 '메이와쿠(迷惑)'라고 불리는 일본의 예의법도다.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자는 메이와쿠의 표어는 겉으로 보기에 무척 좋아 보인다. 예의를 지키자는 게 잘못은 아니니까. 그러나 메이와쿠 문화의 극단성은 여러 상황에서 악영향을 끼친다.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일 수 있다는 생각은 그들 사회를 보수적으로 만든다. 개구리가 세상 밖으로 나가려면 물장구를 쳐야 하는데, 물장구가 누군가에겐 피해를 줄 수 있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식이다.

한국의 예절문화가 유교의 언어라면, 일본의 예절문화는 사무라이의 칼로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일본 시민은 살기 위해 말을 신중히 하고 행동을 정갈히 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개인의 사고는 점점 폐쇄적으로 바뀌어 갈 수밖에 없다. 입을 닫으니 조용한 세상이 보이고, 밖으로 꺼내지 못할 배경이 눈에 들어온다. 다들 말하지는 않아도 암묵적으로 비슷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영화의 배경은 단지 일본에만 한정되지 않게 된다. 일본 영화에서 유독 배경이 눈에 띄는 건, '말하지 못한 자'의 설움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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