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가끔 글을 통해서만 나를 만나던 사람을 직접 마주하면 이런 농담을 듣곤 한다. 생각보다 밝은 분이셔서 놀랐다는 말. 처음 몇 번은 당황했지만 요즘은 무슨 뜻인지 알고 웃어넘긴다. 나는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해 독자를 몰입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쓰는 사람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밝은(?) 주제보다는 사회적 부정의나 고통과 같은 삶의 질곡에 보다 관심이 많다. 그러다보니 지금껏 쓴 글에 담긴 나의 이야기를 나열하면 그야말로 수난사가 따로 없다. 중독의 입구까지 갔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경험, 일상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마주하고 움츠러들었던 일, 가까운 사람을 상실하고 방황했던 순간 등등.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불만은 없다. 사람들에게 내 인생에는 행복하거나 소소하게 즐거운 순간이 더 많았으며 그래서 생각보다 괜찮은 삶을 살고 있음을 알리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나를 포함해 어차피 우리 모두는 서로에 대해 그렇게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게 정말 문제가 된다면 그 때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을 알려주면 될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 나는 내가 겪은 고통과 '피해'(이 단어로 나의 경험을 설명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대체할 말이 없으므로 인용한다)에 지나치게 천착하고 이것이 글에 반영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곤 한다. 물론 '고통'과 '피해'라는 주제에 집중하는 것은 별로 신경쓸거리도 아니거니와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고통', '나의 피해'가 되는 순간 문제는 달라진다. 스스로를 특별히 더 불행하고 아픈 존재라고 여기기 쉽고 이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그리고 유일하게 고통스럽다'는 생각으로 연결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의 인생도 심각하게 괴로워진다.

 영화 '지랄발광 17세'

영화 '지랄발광 17세' ⓒ 소니 픽쳐스


익숙하지 않은 고통을 겪는다는 것

아마 영화에서 찾자면 <지랄발광 17세>의 주인공 네이딘이 이 사례에 가장 구체적으로 걸맞은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네이딘은 이미 7살 때부터 세상이 폭발해 망해버리길 바라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이해는 간다. 자신감 넘치고 어린 시절부터 잘나서 엄마를 비롯한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 하는 오빠와 달리 그녀의 삶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학교에는 어울려 주기는커녕 네이딘을 괴롭히는 사람들만 가득했고 이런 이유로 등교를 거부하는 그녀는 아침마다 엄마와 충돌을 일으킨다. 이런 네이딘을 유일하게 이해해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아빠는 그녀가 13살이던 시절 사망하고 유일하게 남은 주변인이라 할 친구 크리스타는 네이딘이 그토록 질투하고 싫어하는 오빠의 여자 친구가 되어버린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 만한 상황. 이 영화는 네이딘이 역사교사인 브루너에게 자살을 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가 죽음을 이야기할 만큼 극단적인 상황에 놓여있냐는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할 것은 네이딘이 17살이라는 점이다. 가장 친한 친구가 싫어하는 사람과 애인이 되고 일이 마음대로 풀리기는커녕 악화일로를 걷는 거의 모든 상황을 처음 겪는 시기다. 삶이 생각보다 괜찮아질 가능성이 있음을 아직은 알기가 힘들다. 하다못해 나이 지긋한 사람도 익숙한 범위를 넘어서는 고통을 겪으면 절망에 빠진다. 영화 속 네이딘 역시도 마찬가지의 상황에 놓여있는 것뿐이다.

참고로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17세의 가장자리(The Edge of Seven)'다. 자신의 삶에 대한 네이딘의 반응은 그 시기라면 당연히 나올 수 있는 것이지 특별히 '발광'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한국 제목의 번역이 심각한 오역이라고 생각한다.('지랄'이라는 간질을 속되게 이르는 단어를 쓴 점도 문제다)

 영화 '지랄발광 17세'

영화 '지랄발광 17세' ⓒ 소니 픽쳐스


힘든 사람이 자신뿐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하지만 네이딘의 행동이 자연스럽다는 게 그녀가 언제까지고 그런 태도로 살아도 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영문 제목처럼 적어도 유년의 끝에 우리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오직 나만 힘들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결국 오빠와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그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삶 역시도 녹록지 않음을 토로한 이후 네이딘은 사과를 전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상하게 힘든 사람은 나뿐이라고 생각하게 돼, 그럼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으니까"

삶의 고됨과 고통이 성장의 자원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자신의 정체성이자 개성으로 만드는 것은 유해하기 짝이 없다. 누군가 나보다 더 힘들 때, 아니 조금이라도 아픔을 가지고 있기만 해도 나의 '특별함'은 무너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인식조차 못하게 된다. 또한 세상이 나에게 유독 박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마치 받을 빚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게 된다. 누구도 나를 좋게 대하지 않았음은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모두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 함을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 내가 바라는 일을 해주지 않았을 때에 그 사람은 적, 나쁜 사람 혹은 해를 가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러는 사이 진정으로 내게 필요한 도움의 손길과 행복의 가능성은 점차 멀어지고 진심으로 걱정하며 다가온 사람은 상처를 입고 만다.

 영화 '지랄발광 17세'

영화 '지랄발광 17세' ⓒ 소니 픽쳐스


회복의 첫 걸음을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지랄발광 17세>의 네이딘 역시도 이를 깨닫고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비록 원하지 않았지만 오빠와 크리스타의 선택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던 어윈에게 진심으로 다가선다. 사실 네이딘이 원했던 것처럼 모두가 이 세상에서 특별한 존재가 될 필요는 없다. 특별하지 않음이 결코 하찮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왜 내게 이런 일이'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하필이면 자신이 그런 아픔을 겪는 것에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고통 그 자체에는 명확한 원인이 있을지언정 그게 나의 것이 된 데에는 아무런 인과가 없다. 말하자면 인생의 좋지 않은 일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며 무작위로 발생하고 그래서 평범하다.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고통은 결코 부정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 속에서 개인의 특별함을 찾으려는 순간 우리는 곁을 볼 수가 없게 된다. 관계도 연대도 불가능해진다. 물론 유혹은 강력하다. 나 또한 '이 정도로 당하고 살았으면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모든 일에 대가가 뒤따른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죄를 짓고도 얼마든지 잘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끔찍한 일을 겪고도 그만한 보상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사람도 많다. 물론 이러한 부정의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오직 자신의 고통만을 끊임없이 되새김질 하며 무한한 자기 연민에 빠져선 안 된다. 고통은 벗어나야 할 것이지 정박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이를 인식하는 것이 회복의 첫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고통 지랄발광 17세 관계 회복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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