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후 3시 30분 서울 종로구 관수동 서울극장에 마련된 독립영화 상영관 인디스페이스에서 영화 <오목소녀> 상영과 '더 평등한 영화·현장 제작기'를 주제로 한 스페셜 토크가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오목소녀>의 연출을 맡은 백승화 감독과 영화의 주요 스태프인 김진아 PD, 이지민 촬영감독이 함께 했다.

스페셜 토크 행사는 <오목소녀> 연출부에서 일한 남순아 감독의 사회로 진행됐다. 남순아 감독은 지난 2016년 백승화 감독의 전작 <걷기왕>에 작가로 참여했으며, 당시 백 감독과 함께 제작진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 예방교육을 한국 영화계 최초로 실시해 화제가 된 인물이다. 백승화 감독과 남순아 감독은 한국독립영화협회의 성평등 위원회에 소속된 영화인이기도 하다.

 6일 오후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오목소녀> 스페셜 토크 안내 포스터.

6일 오후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오목소녀> 스페셜 토크 안내 포스터. ⓒ 인디스토리


영화 <오목소녀> 제작진들이 말하는 영화계 현장의 문제들

남순아 감독은 "영화계 성평등에 관해 <오목소녀> 제작 과정에서 스태프들도 고민을 많이 했다. 그중에는 잘된 점도 있고 잘 되지 못한 점도 있다"라며 "단발적으로 끝나지 않고 이런 경험들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해 누적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리를 만들었다"라고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남 감독은 이어 "오늘 토크가 제작기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하나의 현장만으로 이야기하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에 성 평등을 요구하는 영화계 흐름에 맞춰 진행하려고 한다"라면서 지난 2년간 영화계의 성평등 이슈 중 일부를 거론했다. 사례로 인용된 것은 지난 2016년 10월 시작된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비슷한 시기에 <걷기왕> 제작진들이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은 사실이 알려진 것과 페미니스트 영화영상인 모임 '찍는 페미'가 만들어진 것 등이었다.

<오목소녀>는 지난 2017년 가을 촬영 시작했다. 제작진들은 당시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것을 성취했다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생각한 한계점이 무엇이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김진아 PD는 현장에서 촬영 일을 하며 겪은 고민에 관해 "(현장에서 일할 때) '여자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인식도 있었고, 성폭력이나 위계 폭력에 관해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같이 대안을 얘기할 동료를 쉽게 만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사안 그 자체도 문제지만 같이 싸워나가거나 함께 고민할 사람이 없어 힘들었다"며 "지난 3년간 해시태그 운동 등 좀 더 가시화된 사례를 통해 얘기 나눌 동료가 많이 생겼다. <오목소녀> 현장도 그런 모임의 하나였기 때문에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오목소녀>의 백승화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는 감독으로 일했지만 소위 막내라는 포지션으로 일하다 보면 영화 현장에서 위계적인 폭력들이 일상적으로 있었다"면서 "늘 시간이 부족해서 '빨리빨리' 찍어야 하는 곳이라 고성이나 욕설 등을 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런 경험을 언급한 백 감독은 "언젠가 내가 연출을 하게 되면 다른 식으로 해보고 싶었고 다른 현장(분위기)을 고민했다"고 덧붙였다. 또 "평상시 좋은 사람도 현장에서 일하면 업무에 쫓겨 화를 내거나 고성을 지르더라"며 "그런 점에 대해 고심하는 동료들을 더 찾게 됐다. <오목소녀>에서는 캐릭터나 촬영에 관한 생각과 동시에 현장에서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과 작업해보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6일 오후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오목소녀> 스페셜 토크 현장 사진. 왼쪽부터 차례대로 남순아 감독, 이지민 촬영감독, 백승화 감독, 김진아 PD.

6일 오후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오목소녀> 스페셜 토크 현장 사진. 왼쪽부터 차례대로 남순아 감독, 이지민 촬영감독, 백승화 감독, 김진아 PD. ⓒ 인디스토리 제공


남순아 감독은 "요즘 상업영화는 '12 on 12 off'라는 식으로 12시간 작업을 지키도록 하는데, 단편이나 독립영화의 경우엔 지켜지지 않는다"라고 본인이 경험한 현장에 관해 고백했다. 남 감독은 과거 스태프로 일한 경험을 회상하며 "17시간 동안 돈도 제대로 못 받고 일을 하느라 '힘들다'고 하면 옆에서 조명기사가 '이게 힘드냐, 난 스무 시간 이상 일해봤다'고 말하고 그 옆에 있던 사운드 기사가 '난 서른 시간 넘게 일해봤다'고 말하더라"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성폭력뿐만 아니라 위계로 인한 폭력이나 대의만을 위해 진행되는 현장 문화에 관해 의문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영화계 최초 '성희롱 예방교육', "이젠 제작사가 주도했으면..."

영화 <걷기왕> 당시 스태프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성희롱 예방교육'에 관해 백승화 감독은 "현장에서 폭력적이었던 경험을 저도 겪었고 다른 사람도 겪었다. 저희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방어 대책 같은 거였다"라고 말했다.

백 감독은 "성폭력 예방교육을 영화계에서 경험해본 적이 없었는데, 찾아보니 의무 사항이었다"라면서 "현장에서 겪는 성폭력·위계 폭력에 관해 우리 나름의 방어를 하자는 차원에서 교육을 실시했다. 관련 내용을 콘티북에 싣고 스태프들도 볼 수 있게 했다"고 덧붙였다.

'영화계 최초의 성희롱 예방교육'으로 알려져 화제가 됐지만, 당시 경험에 관해 백승화 감독은 "기존 성희롱 예방교육이 일반 기업의 환경에 초점이 맞춰져 영화계 현장 스태프들에게 안 맞는 부분도 있어서 아쉬웠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2년 전 <걷기왕> 이후 목소리가 많이 나와 상업영화 현장에서도 교육이 많이 이뤄진다고 들었다"라며 "(이런 성희롱 예방 교육이) 스태프 개인이 주도해서 할 일은 아니다. 제작사나 투자사들이 더 주도적으로 했으면 좋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남순아 감독은 영화 <걷기왕> 당시 성희롱 예방교육에 관해 "'촬영장 내 성희롱 예방을 위한 수칙 10가지', '동료들을 위한 매뉴얼' 등을 콘티북에 실었는데 당시엔 맨 뒤였다"라며 "<오목소녀>에선 첫 장에 실었다. 위대한 발전"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남순아 감독은 <걷기왕> 촬영 이후 '영화계 내 성희롱 강사 양성 교육'을 통해 직접 성희롱 예방교육 강사가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걷기왕>에선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성희롱 예방교육을 듣는 입장이었지만 <오목소녀> 때는 강사로서 스태프들을 상대로 강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백승화 감독은 "남 감독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영화계에서 이 주제로 고민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백 감독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성희롱 예방교육 강사를 양성하고, 최근 영진위가 영화 제작 지원을 받으려면 관련 교육을 의무 이수하도록 조치한 것을 거론하며 "이런 걸 보면 '바뀌어 가는구나' 싶었다"고 덧붙였다.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하며 좋았던 건, 단순하게 성폭력에 대한 강의만 한다기보다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현장에선 위계에 의한 폭력이 더 많이 일어난다. 성폭력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에는 올바르지 못한 조직 문화도 있는데, 그런 것도 교육 때 같이 짚었다. '성폭력이 나쁘다'는 것과 더불어 (성폭력과 위계로 인한 폭력이) 왜 발생하는지 같이 고민하니까 스태프들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백승화 감독)

예방 교육과 강사 양성 등 제도에 관해 언급한 이후엔 현장에서 직급이 높은 스태프의 영향에 대해서도 논의됐다. 김진아 PD는 <오목소녀> 촬영 첫날을 회상하면서 "백승화 감독이 '어떻게 영화를 찍고 싶다'라고 첫날 지향하는 조직 문화에 관해 얘기한 게 성희롱 예방교육보다 더 효과적이었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평소 영화 촬영 현장에선 고성을 지르고 욕설이 난무하는 편인데, 전체 스태프를 모아두고 '우리 현장에선 폭력적인 행동은 허용하지 않겠다'라고 감독이 직접 언급함으로써 주요 스태프들에 방향성을 인지시켰고 직급이 높지 않은 스태프들도 안심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지민 촬영감독도 동의한다며 "현장에서는 (스태프들이) 감독의 컷 사인을 가장 기다린다. 그래서 감독이 말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털어놨다. 그는 "'빨리빨리'라고 소리 지르는 게 잦은데 <오목소녀> 현장에서는 바뀐 걸 실감했다는 스태프 얘기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남순아 감독도 "조직이 권위적이라면 분위기가 조직 리더의 멘탈에 따라 좌우된다"라며 현장에서 촬영을 지휘하는 책임자의 태도도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백승화 감독은 "성희롱 예방교육이 모든 걸 방지하는 만능열쇠는 아니었다"라면서 "두 시간 예방교육으로 많은 사람이 큰 변화나 깨달음을 얻는 건 아니었다. 강압적인 문화가 우리 현장에선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저부터 잘하겠다'고 첫날 얘기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계에서도 시작된 '성희롱 예방교육'... 이후엔 어떤 행보 필요할까

 6일 오후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오목소녀> 스페셜 토크 현장 사진. 왼쪽부터 차례대로 남순아 감독, 이지민 촬영감독, 백승화 감독, 김진아 PD.

6일 오후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오목소녀> 스페셜 토크 현장 사진. 왼쪽부터 차례대로 남순아 감독, 이지민 촬영감독, 백승화 감독, 김진아 PD. ⓒ 인디스토리 제공


이날 스페셜 토크에 참여한 사람들은 <걷기왕>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시행한 덕분에 다른 영화 제작 현장에도 영향을 줬다고 강조했다.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촬영 현장에서도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거나 스태프들에게 현장 수칙을 공지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를 긍정적인 시작으로 본다면, 다음 단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사회를 맡은 남순아 감독이 '다음 스텝'을 묻자 백승화 감독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오목소녀>는 고민했던 걸 실제로 현장을 만드는 데 있어서 직접 해보게 되는 계기였다. 중요한 건 영화 현장이 늘 바쁘고 예산이나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부분도 해결돼야 현장에서 고성이 나오는 등의 문제도 같이 해결된다고 본다. 적은 예산으로 현장에서 압박을 받는다. 상업영화에서는 표준계약서 얘기가 나오는데 독립영화에서도 논의가 돼야 한다. 대안을 찾아가는 게 다음 단계인 것 같다."

'다음 단계'에 관해 이지민 촬영감독은 "여성이 아니더라도 페미니즘적인, 위계 폭력에 반대하는 인식을 하는 사람을 많이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남순아 감독은 "<걷기왕> <오목소녀> 때 스태프들은 성희롱 예방교육 강의를 들었는데 배우들은 사정상 듣지 못했다. 다음 현장에서는 배우들도 교육을 듣게 하고 싶다"고 밝혔다.

김진아 PD는 "성희롱 예방 교육뿐만 아니라 즐거운 노동 환경이 되려면 영화계에 숙제가 많다. 제대로 된 임금을 받고 무리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슷한 문제들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교육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영화계의 노동 현실이 개선돼야 궁극적인 변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얘기다.

2018년 들어 사회 각계에서 미투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문화계 내 성폭력 등으로 인한 파장은 영화계에도 미치고 있다. 최근 특정 배우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면서 영화에서 해당 인물의 촬영분을 덜어내고 재촬영하거나 심지어 어떤 작품은 개봉을 무기한 보류한 상태다.

이날 스페셜 토크에서 나온 결론을 종합해 보면, 영화 촬영 현장에서 성폭력이나 위계로 인한 폭력 등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제작사에서 더 책임감을 갖고 처리할 매뉴얼을 갖춰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야 '가해자와 피해자 개인 간의 문제'로 방치되지 않고 원만한 해결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최근 영화계에서 배우가 성폭력 혐의에 연루돼 하차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촬영 현장의 노동 시간 단축도 이슈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오목소녀> 제작진이 이날 공유한 경험은 앞으로 영화인들이 고민할 지점을 적절하게 잘 짚었다고 할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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