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솔로 싱글 '숙녀'를 발표한 원더걸스 출신의 유빈.  머리 모양부터 의상에 이르기까지 예전 1980년대 일본 시티팝 여가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최근 솔로 싱글 '숙녀'를 발표한 원더걸스 출신의 유빈. 머리 모양부터 의상에 이르기까지 예전 1980년대 일본 시티팝 여가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 JYP엔터테인먼트


최근 공개된 원더걸스 출신 유빈의 솔로 곡 '숙녀'는 요즘 국내에선 생소한 장르인 '시티팝(City Pop)'을 표방한 노래다.

"이번 디지털 싱글 [都市女子]를 아우르는 '시티팝'은 1970~80년대 유행한 도회적 팝 장르로 신디사이저, 키보드, 드럼 머신 사운드를 중심으로 한다. 펑크, 디스코, 미국 소프트 록, R&B 등에서 영향을 받아 세련된 느낌과 청량한 선율이 특징이다."(소속사 측 보도자료 중)

실제로 '숙녀'의 전반적인 사운드 구성, 뮤직비디오를 살펴보면 과거 1980년대 무렵 (비록 한국에선 불법이었지만) 언더그라운드 시장에서 밀수 혹은 불법 복제된 LP를 통해 알음알음 인기를 얻었던 일본 여가수들의 음반, 헤어스타일 및 의상 컨셉트 등을 많이 연상케 한다.



일부 극소수 마니아들의 전유물이던 시티팝은 지난해 윤종신의 'Welcome Summer'(월간 윤종신 2017년 7월호)를 시작으로 요즘 국내 대중음악계에서 조금씩 기지개를 펼치고 있다.  올해 들어선 지난달 'Frame'에 이어 6월 'My Queen'으로 이어지는 시티팝 곡들을 연이어 내놓을 예정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비록 이들 싱글은 '좋니' 에 비해선 크게 인기를 얻진 못했지만 관록있는 음악인의 변신이라는 점에서 관심 기울일 만한 시도였다.  여기에 의외의 인물, 유빈도 시티팝을 들고 색다른 도전에 나섰다.

그런데 시티팝은 도대체 무슨 음악이지?

시티팝 탄생에 영향 끼친 1970~80년대 미국 AOR 음악

 명 프로듀서 데이빗 포스터가 만든 OST < 성 엘모의 불 >, 보즈 스캑스의 < Hits > 표지.  이들이 만든 세련된 감각의 AOR 음악은 1980년대 일본 시티팝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명 프로듀서 데이빗 포스터가 만든 OST < 성 엘모의 불 >, 보즈 스캑스의 < Hits > 표지. 이들이 만든 세련된 감각의 AOR 음악은 1980년대 일본 시티팝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워너뮤직코리아, 소니뮤직코리아


'시티팝'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언급해야할 장르가 있다. 그건 바로 AOR이다.

훗날 '버블 경제'라고 부르는 1980년대 고도 성장기를 맞이한 일본의 주요 음반사들은 당시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최첨단 녹음 장비를 수입하고 미국의 유명 음악인들을 대거 초빙, 팝 혹은 퓨젼 재즈 음반들을 아예 직접 제작하기에 이른다.

덕분에 데이브 그루신, 리 릿나워, 데이빗 포스터 등 쟁쟁한 연주인들의 작품들은 미국이 아닌 오직 일본 시장을 위해 발매되는 경우가 많았다.

편의상 이러한 음악인들이 구사하는 장르를 전문가들 사이에선 AOR이라고 언급하곤 했다. 초창기엔 'Album Oriented Rock'이라고 해서 말 그대로 음반 한장에 승부를 거는 저니, 스틱스, 포리너 등 대중성 지향 록 밴드들의 음악을 AOR로 지칭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Adult Oriented Rock'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AOR의 범주에 속하는 음악 장르는 무척 다양하다.

록큰롤/포크/컨트리 록에 기반을 둔 웨스트코스트 록(이글스, 두비 브러더즈, 린다 론스타트, 닐 영 등)부터 소프트 록(토토, 에어 서플라이, 크리스토퍼 크로스, 보즈 스캑스, 마이클 맥도날드), 펑크 혹은 디스코 및 R&B (어쓰 윈드 앤 파이어, 쿨 앤 더 갱,  애버리지 화이트 밴드), 퓨젼 재즈(데이브 그루신, 리 릿나워, 마이클 프랭스, 알 재로, 스틸리 댄) 등 적당한 비트 및 부드러운 멜로디, 그리고 세련된 코드 진행이 어울어진 가볍게 듣기 편한 음악들을 폭넓게 AOR로 분류한다.



이 과정에서 몇몇 AOR 계열 해외 음악인들은 본토보다 일본에서 유독 큰 인기를 얻는 기현상을 낳기도 했다.

스타 프로듀서 데이빗 포스터의 초기 밴드 에어플레이, 본토에선 거의 무명에 가까운 록그룹 페이지스(훗날 'Broken Wings', 'Kyrie' 등의 히트곡을 만든 밴드 미스터 미스터로 재편), 싱어송라이터 빌 라바운티와 마크 조던, 작곡가로서의 성과에 비해 솔로 가수로선 미미했던 랜디 굿드럼(앤 머레이의 'You Needed Me' 작곡)과 바비 칼드웰 (피터 세테라의 'The Next Time I Fall' 작곡)등의 음반은 유독 일본에서만 발표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로 재발매가 이뤄질 정도였다.

소프트 팝/록, 혹은 펑키 퓨젼 등 당시로선 세련된 감각을 자랑하는 일련의 창작물들이 좋은 반응을 얻자 일본 음악계에선 아예 일본 가수들에 의한 AOR 성향 음반을 속속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가 점차 보편화 되면서 1980년대 '시티 팝'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의 정착이 이뤄진다.

여가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일본 시티팝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국내 일부 마니아들에게 인기를 얻은 시티팝 모음집 < City Pop >, < Light Mellow > 표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국내 일부 마니아들에게 인기를 얻은 시티팝 모음집 < City Pop >, < Light Mellow > 표지. ⓒ Warner Music Japan


미국 유명 세션 연주자들이 대거 녹음에 참여할 만큼 AOR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일본 시티팝이지만 이 둘은 약간의 차이점을 드러낸다.

AOR은 싱어송라이터 혹은 밴드에 의해 주도되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탁월한 연주력이 뒷받침되는 작품들이 많았다. 

반면 일본의 시티팝에선 스타더스트 리뷰-허니 앤 비 보이스 등의 그룹, 야마시타 타츠로-기요타카 스기야마-아베 야스히로 같은 남자 솔로 가수 뿐만 아니라 여성 솔로 가수의 의존도가 비교적 높았고 댄스 팝 성향 곡들이 좀 더 두드러진 편이었다. 

특히 화려한 기타 혹은 신시사이저 및 전자 드럼 연주를 밑바탕에 두고 진행되는 반짝거리는 눈부신 조명 속 현란한 안무 및 의상은 미국 AOR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일본 시티 팝만의 독창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무렵 발표된 마츠바라 미키의 'Stay With Me', 다케우치 마리야의 'Plastic Love', 나카하라 메이코의 'Fantasy', 미야모토 노리코의 'My Life' 등의 노래는 이후 김완선, 장혜리 등 몇몇 여가수들의 작품에도 제법 큰 영향을 끼쳤다.



빛과 소금, 김현철, 김완선...한국 가요 속 AOR 혹은 시티팝 음악

 8090세대의 사랑을 받은 동아기획의 대표 음악인 빛과 소금, 김현철의 데뷔 음반 표지

8090세대의 사랑을 받은 동아기획의 대표 음악인 빛과 소금, 김현철의 데뷔 음반 표지 ⓒ 케이앤씨뮤직


1980년대 중후반 이후 탁월한 연주력 및 작곡 실력을 겸비한 젊은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국내에서도 AOR 혹은 시티팝 계열로 분류할 법한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당시엔 해당 장르에 대한 이름 및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기에 어린시절부터 즐겨 들었던 해외 팝/록/퓨전재즈의 영향을 받은, 기존 가요적 화법을 탈피한 창작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걸작들이 탄생했다.  빛과소금, 김현철 등 동아기획의 젊은 음악인들이 만들어낸 초기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김현식의 백업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에서 출발해 사랑과 평화를 거친 장기호(보컬/베이스), 박성식(키보드) 2명을 중심으로 한경훈(기타)가 가세한 3인조 밴드 빛과 소금(1990년 데뷔)은 당시로선 연주인들 사이 연구 대상이던 GRP(데이브 그루신이 설립한 재즈 레이블) 사운드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음악으로 주목 받았다.

앞서 1989년 사랑과 평화 4집 시절 발표했던 '샴푸의 요정', '그대 떠난 뒤'를 재녹음한 버전을 담은 그들의 1집을 시작으로 장기호의 미국 유학 시절 제작된 5집까지 작품들은 척박한 한국 음악계의 환경 속에서 탄생한 역작으로 손꼽을 만하다.

천재 싱어송라이터의 등장으로 찬사를 받았던 김현철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데뷔 음반에 담긴 '동네', '오랜만에', '춘천가는 기차', '나의 그대는' 등 모든 수록곡은 1980년대 작품 답잖게 세련된 감각의 팝/퓨전 재즈 성향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이밖에 조규찬과 손잡고 만든 2집(1992년)에 담긴 '그런대로', '까만 치마를 입고', 마니아 층을 넘어 대중들에게도 인기가수로 인정 받은 정규 3집(1994년) 대표곡 '달의 몰락', 프로젝트 연주 그룹 야샤의 이름으로 발표한 '연습실에서' 등 그가 20대 초반 만들어낸 곡들은 창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AOR 또는 일본 시티팝의 영향권에 놓인 작업물들이었다.

1980년대의 대표 댄스가수 김완선 역시 시티팝스러운 작품을 그 무렵 내놓으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4집(1989년)의 인기곡 '기분 좋은날'을 시작으로  록 기타리스트 손무현과 손잡고 발표했던 정규 5집(1990년)의 주요 곡들인 '가장무도회',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등은 사운드+춤+의상 등 전반적인 부분에서 일본 시티팝 여가수들을 벤치마킹해 성공한 케이스로 손꼽을 만하다.

덧붙이는 글 필자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jazzkid 에도 수록되는 글 입니다.
시티팝 유빈 A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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