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치안본부 대공분실.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다.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다. ⓒ 김종성


고문 수사로 악명 높았던 옛 남영동 대공분실(치안본부 대공분실) 청사가 시민사회에 환원된다. 지난 25일 김상곤 부총리가 주재한 '2018년도 제5차 사회관계장관회의'에서 이 점이 논의됐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남영동 건물은 박정희 정권 때인 1976년 5월부터 치안본부 대공과 대공분실로 사용됐다(대문에는 OO해양연구소 간판이 걸렸다). 대공분실이라고 했지만, 북한 간첩이 아니라 민주화 인사들만 잡아들여 악질적 고문과 불법 취조를 자행했다. 그러다 1987년 박종철 열사가 509호실에서 숨진 일을 계기로 세상에 알려졌고, 2005년 7월부터 경찰청 인권센터로 쓰이고 있다.

이곳을 경험한 고문피해자 중 생존자 30명은 지난 2월 '나는 남영동에서 악마를 보았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고문피해자 증언대회를 열기도 했다. '악마를 보았다'고 할 만큼,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원한을 심어준 장소다. 이런 장소를 과거 청산 차원에서 인권기념관 형태로 민간 경영에 위탁하겠다는 게 정부 구상이다. 오는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구체적 방안을 발표한다.

'남영동에서 악마를 보았다'

 영화 <남영동 1985>.

영화 <남영동 1985>. ⓒ 아우리 픽쳐스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조사실에서 자행된 고문은 상상을 초월한다. 5층은 다른 층과 달리 창문도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김근태 전 장관의 고문 사례를 다룬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영동 1985>에 당시 고문이 어떠했는지 담겼다. 일부만 봐도 '남영동에서 악마를 봤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영화에서는 욕조에 머리를 밀어 넣는 물고문, 온 몸을 전선으로 묶는 전기고문은 기본이고, 사람을 침상에 눕히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뒤 꼭지 뗀 샤워기로 코와 입에 물을 주입해 위장과 대장을 '말끔히' 비워주는 고문, 똑같은 상태에서 물에 고춧가루를 타서 뿌리는 고문 등이 묘사됐다.

지저분한 '고문'도 많았다. 영화 속 김근태(박원상 분)가 식판을 놓고 식사하는 그 식탁 위에 김 계장(이천희 분)이 발을 올려놓고 발톱을 깎는 장면, 고문기술자 이근안(이경영 분)이 땅바닥에 놓인 식판을 구둣발로 문지른 뒤 "드시라"고 권하는 장면 등등이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있는 박종철 기념관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있는 박종철 기념관 ⓒ 박정훈


영화 첫 장면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전 의장인 김근태(당시 38세)가 대공분실로 끌려 들어오는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김근태가 아닌 김종태로 나온다. 악마 같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도 이두한으로 나온다. 끌려온 김근태와의 첫 대면에서 조 전무(명계남 분)로 불리는 경찰 간부가 이런 말을 한다. 두께 5센티미터는 넘어 보이는 백지 뭉치를 내밀며 던진 말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기록하세요. 시간은 충분히 드릴 테니까."

'충분히 드릴 테니까'란 말은 이 수사가 시간제한 없이 진행될 불법 수사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곳에서 벌어질 일이 한 편의 용공사건 조작임을 보여준다. '조서를 꾸민다'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조서를 꾸미고 조작하는 일이 벌어질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끔찍하게 고문당한 38세 김근태

이제까지의 모든 행적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라고 말한 뒤, 수사관들은 김근태를 고문해가며 사실관계 조작을 유도한다. '북괴' 지령 하에 거물급 재야인사들과 함께 폭력 혁명을 준비했다는 시나리오가 나올 때까지 계속 고문해댄다. 이런 상황이 무려 23일간이나 계속된다. '시간은 충분히 드릴 테니까'란 약속을 이행한 것이다.

수사관들은 육체와 정신을 고문해가며 한없이 쥐어짰다. 네가 만든 폭력혁명 조직이 어떤 조직이었다고? 모른다고? 그럼 가르쳐주세요! 뭐야? 가르쳐달라고?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더 맞아보면 기억나겠지? 아, 생각났습니다! 그래? 그럼 사실대로 적어봐! 이런 식으로 고문이 이어진다.

어느 순간부터는 수사관들이 묻지도 않고 스토리를 술술 내뱉었다. 혁명조직의 설립 동기, 이념 계획, 투쟁 방향, 배후 인물, 자금 출처, 조직 구성 등등을 쏟아냈다. 그러고는 받아쓰라고 강요한다.

이런 장면도 있었다. 이근안이 전기고문을 가하며 "배후를 대라"고 하자, 김근태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 "장준하"였다.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우다 의문사로 생을 마친 장준하가 무심결에 언급된 것이다. 이미 10년 전에 운명한 사람이 거론되자, 이근안은 "장준하? 장준하?" 하면서 "김일성·이순신·예수님·부처님은 없나요?"라고 비웃는다. 그 말에 수사관들은 일제히 웃어댄다.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찍은 사진.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이런 과정을 거쳐 한 편의 용공사건을 조작한 뒤 수사관들은 그걸 암기시킨다. 여러 날 동안 육체를 괴롭혀놓고는 머리로 암기하라는 강요까지 한 것이다. 암기했는지 확인해보려고 쪽지 시험도 냈다. 괄호 속 빈칸을 채우는 테스트였다. 배후 인물이나 접선 장소 등을 적어 넣으라는 것이었다.

김근태 당시 의장이 검찰과 법정에서 조작한 그대로 진술해줘야 용공사건 조작이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검사와 판사의 질문을 무사히 넘기려면, 진술 내용도 자연스러워야 하고 그의 진술 태도도 자연스러워야 했다. 그래서 조작 내용을 암기시키는 고문 수사까지 추가했던 것이다.

김근태가 그 긴긴 내용을 다 암기해내자, 수사관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감탄하고 환호했다. 운명공동체나 되는 듯이 축하해줬다. 영화 내내 수사관들은 "역시 서울대 출신은 달라!", "서울대가 이것도 몰라?" 등등의 말을 많이 했다. 박수를 치는 이 순간에는 '역시 서울대!'를 머릿속에 되뇌었을 것이다.

독재정권과 그 부역자들

부역 경찰들이 이처럼 용공사건 조작에 열을 올린 것은 독재자가 그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간첩 사건이 수도 없이 보도되는 속에서 좀 더 신선하고 그럴싸한 시나리오가 나오길 원했다. 그런 걸 수없이 읽어본 독재자를 만족시키자면, 부역 경찰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조작 결과를 생산해야 했다. 그러자니 더욱 더 고문하고 더욱 더 쥐어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용공사건이 발표되면 보수 언론들은 정신없이 받아썼고, 보수적 지도층은 이를 토대로 반공 논리를 확산시켰고, 영문도 모르는 일반 국민들은 강요된 위안을 느끼고 표시해야 했다. 이를 기반으로 독재 정권은 정치상황을 안정시키려 했다.

부역 경찰들은 독재자의 요구뿐 아니라 안기부(중앙정보부·국정원)와의 경쟁구도도 의식해야 했다. 영화에도 그런 장면이 있었다. 고문 도중에 김근태가 기절하자, 박 전무는 잠간 쉬자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때 강 과장(김의성 분)이 조심스레 "이거는 좀 오버 아닙니까?"라며 시나리오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자, 박 전무는 "너 진급하기 싫어?"라며 이렇게 고함쳤다.

"야 인마! 오늘 안기부 발표 봤어, 안 봤어? 얘네들 큰 거 한 건 했어! 구미유학단 간첩사건!"

박 전무는 분발을 촉구했다. 안기부가 조작한 것보다 좀 더 센 것을 발표해야 한다며 다그쳤다. 독재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공안기관들끼리 이런 경쟁까지 벌였던 것이다.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찍은 사진.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독재정권들은 조서를 꾸미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관계까지 꾸며대며 국민을 속였다. 그 과정에서 박종철·김근태를 비롯한 무고한 시민들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곳이 조만간 시민사회에 환원된다. 비인권적 고문 실상을 더욱 더 널리 알리고 대한민국의 인권 수준을 개선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곳을 방문하려면 지하철 남영역에 내려 걸어가든가 내비게이션에 '경찰청 인권센터'를 입력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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