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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양승태 대법원장 퇴임식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양승태 대법원장 퇴임식이 진행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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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역사적 교훈을 통해 이룩한 사법체계의 근간이 흔들리거나 정치적인 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어렵사리 이루어낸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말 것입니다...법관에게는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의 독립을 지켜야 할 헌법적인 의무와 책임이 있을 따름입니다."

어느 대법원장이 퇴임식장에서 남긴 말이다. 그는 유독 산을 좋아했다. 심지어는 일과시간 중에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법원의 판사, 직원들을 산으로 불러 모았다. 바쁜 판사들은 업무를 중단하고 마지못해 산에 올랐지만 그는 이것을 '소통'이라고 불렀다.     

보수적인 대법원장? 위선적인 헌법위반자?

산을 좋아하는 보수적인 대법원장 양승태. 역사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을지 모른다. 불행하게도 그는 단순히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위선적인 헌법위반자에 가깝다. 대법원장 시절 자신의 퇴임사와는 달리 재판의 독립을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방기했다. 아니 거꾸로였다.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들면서까지 정치세력과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거래하였다. 판사들을 뒷조사하고 통제했다.

그 사이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자신이 직접 한 일이 아니라고?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그가 직접 임명하고, 그의 지시로 움직이던 법원행정처 관료 판사들이 자행한 일이다. 삼권 분립과 법관 독립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법관 블랙리스트 사태'로 빙산의 일각이나마 양승태 대법원의 민낯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 침묵을 지켜온 그가 직접 입을 열고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왔다.   

25일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조사보고서가 나왔다. '법관 블랙리스트 사태' 관련 법원 보고서로서는 3번째다. 법원 내부의 조사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보고서는 양승태 대법원 시기의 특징과 관련 2가지 심각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첫째, 판사 길들이기와 압박, 통제를 자행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판결까지도 치밀하게 대응해 왔다. 둘째, 청와대와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판결로 '거래'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블랙리스트 없다고? ... 광범위한 판사 통제와 뒷조사 확인

이번 조사결과가 나오자 일부 언론에서는 법관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기사 제목은 'PC 뒤지고 또 뒤져도... 판사 블랙리스트는 없었다' 였다.

판사 3천 명의 성향을 번호를 매겨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파일이 나와야 블랙리스트일까. 이번 조사에서 밝혀진 것만 보자.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의 성향을 분석하고 동향을 파악한 자료가 나왔다. 또한 고등법원 소속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추천 판사 명단,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 의장 선거관련 동향 자료 등에서도 판사 성향이 빠지지 않았다. 나아가 법원내부 게시판(코트넷)에 글을 올리거나 대법원 정책에 비판적인 판사들의 경우 대응책을 마련하고 뒷조사까지 하고 있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1심 판결을 비판했던 김동진 부장판사 징계의 배후에도 대법원이 있었다. 누구든지 법원에 반기를 들면 찍히게 되고,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수많은 문건들이 블랙리스트와 다를 게 뭐가 있는가.

양승태 대법원은 유독 판사들을 심하게 통제하려 했다. 국제인권법연구회 특히 그 중에서도 인사모(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 소속 판사들은 눈엣가시였다. 그들을 우리법연구회와 동일시하고, 선발성 인사나 해외연수 선발에서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방안도 검토됐다.

물론 문건작성자는 '아이디어 차원'이라고 변명한다.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가. 악덕 기업의 노조 탄압 방식이 떠오른다. 사측의 노조 탄압 문건이 나오면 실무자의 실수이고 아이디어 차원이라고 둘러댄다. 인사상 불이익도 명백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오해일 뿐이라고 강변한다.

판사들이 익명으로 참여하는 인터넷 카페도 그냥 두지 않았다. 상고법원 반대, 국정원장 사건,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임명 제청, 쌍용차 해고노동자 판결 선고 등이 카페에 올라오자 위험하다고 보았다.

대법원은 대처 방안으로 ① 카페의 자발적 폐쇄를 유도하고,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② 법관윤리강령 위반으로 몰고간다는 전략을 세운다. 카페에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회원으로 가장하여 카페 내 활동 중단에 대한 글을 게시한다'는 비윤리적인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또한 대법원장의 숙원사업인 상고법원을 비판하는 판사를 뒷조사하고 재산까지 파악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 선거에도 적극 개입하고, 후보별 예상 득표를 분석하기까지 했다.

양승태 대법원은 '판사동일체'를 지향했나?

검사는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 검찰총장부터 말단 검사까지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상명하복의 관계에서 유기적 조직체로 활동해야 한다는 원칙이 검사동일체의 원칙이다.

판사는 어떨까. 헌법에도 명시된 것처럼 독립이 생명이다. 법원 안팎의 간섭이나 압력에서 자유롭게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것이 판사의 이상형이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 시절은 마치 판사동일체의 원칙을 지향한 것처럼 보인다. 판사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판결에 간여하려 끊임없이 시도했다. 몇 가지만 짚어보자.

박정희 정권 시절 긴급조치 피해자 손해배상 사건에서 국가의 민사책임을 인정한 1심 판사를 징계하려 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위헌이라고 판단하면서도 국가가 법적인 의무를 지지는 않는다고 판결한 바 있다. 그러자 '법관의 잘못된 재판에 대한 직무감독 검토계획'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이 판사에 대한 징계방안까지 검토됐다. 대법원 판결과 의견을 달리하여 국가의 잘못을 엄격하게 인정한 것을 '잘못된 재판'으로 매도한 것이다.

"원세훈 사건, 1심과 달리 항소심 예측이 어려워 불안"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에서도 대법원은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 사건은 청와대에겐 정권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래서인지 1심 판결(선거법 위반 일부 무죄)에 대해 청와대가 '환영·안도'하였고 "비공식적으로 사법부에게 감사 의사를 전달하였다는 후문"까지 전했다.

그런데 특히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대법원은 항소심 재판에 대해 "'1심과 달리 결과 예측이 어려우며, 행정처도 불안해하고 있는 입장임'을 (청와대에) 알림"이라고 보고서에 담았다. 그렇다면 1심 재판은 결과를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재판관여의 간접증거이다.

이 사건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당시 기획조정실장)이 항소심 전후에 청와대 법무비서관과 대화를 나눈 사실,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검토보고서를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 제공한 사실, 파기환송심 재판장과 배석판사와 전화통화까지 한 사실이 드러났다.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시도했고, 간접적으로 법원행정처의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행정처는 공식적, 비공식적 채널을 총동원하여 판사들을 뒷조사하고 판사들을 순치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토록 판사들을 통제하고, 판결에까지 간여하려 한 까닭은 무엇일까. 임종헌 전 차장이 2015년 직접 작성한 문건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에서 드러난다.

"국가적․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서 BH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 수행."

청와대를 불편하게 하는 돌출 판결을 막는 것, 이것이 양승태 대법원의 역할이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청와대와 판결로 거래를 시도한 것이다.

청와대와 판결로 거래 시도한 양승태 대법원

청와대와 판결로 거래를 시도한 양승태 대법원.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선, 상고법원과 같은 대법원의 역점 사업을 관철하기 위해서이다. 더 나아가, 보다 많은 권력을 보장받으려고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대법원장의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법원이 거래 대가로 삼은 사건은 엄청난 사건들이다. 앞서 언급한 임 전 차장의 문건을 다시 보자.

그동안 사법부가 VIP와 BH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권한과 재량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해 온 사례를 상세히 설명  - ①합리적 범위 내에서의 과거사 정립(국가배상 제한 등), ②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사회적 안정 을 고려한 판결(이석기, 원세훈, 김기종 사건 등), ③국가경제발전을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둔 판결(통상임금, 국공립대학 기성회비 반환, 키코 사건 등), ④노동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판결 (KTX 승무원, 정리해고, 철도노조 파업 사건 등), ⑤교육 개혁에 초석이 될 수 있는 판결(전교조 시국선언 사건 등)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VIP와 BH에 힘을 보태 옴

사법부가 청와대와 협력한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긴급조치는 위헌이지만 국가의 민사상 손해배상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에겐 내란선동죄로 중형이 선고되었다. 통상임금도 정기상여금에 포함된다고 하면서도 소급적용은 안 된다고 했다. 1심과 2심의 승소에도 불구하고 KTX 여승무원들은 KTX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부당해고로 비난받던 쌍용차는 법원으로부터 합법적인 정리해고 요건을 인정받았다. 민주주의 후퇴를 반대한다는 시국선언 교사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전교조는 법외노조상태가 되었다.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직결되는 사안이 대법원에 갔고, 시민들은 그래도 자유와 평등, 소수자 보호를 강조하는 법원에 작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이미 정답이 정해진 재판에 들러리가 된 셈이다.

통진당 지역구 지방의원직 박탈방안까지  

대법원의 일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에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 난 다음 지역구 지방의원직을 박탈할 방안까지 검토한다. 지방자치단체장이 행정소송을 내게 하거나 검토지역으로 어디가 적당한지 등 세부 사항도 제시했다. 

황당하게도 문건은 "법원이 개입한 사실이 외부로 알려질 경우 감당하기 힘든 파장이 있을 수 있음"이라고 잘못을 이미 자인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눈엣가시였던 통합진보당의 씨를 말리는 일을 돕기 위해 심판자라는 자신의 임무마저 잊어버렸을까. 마치 심판이 특정 선수에게 상대를 이기는 방법을 미리 알려주는 격이다.

그들은 법원 공무원과 노조까지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다. 법관동향 파악을 위해 '문제 될 가능성이 높은 법관 관련 공개된 SNS(가령 facebook) 점검'을 언급하면서 "부장판사인 경우 그 배석판사나 참여관, 실무관의 SNS 점검"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김동진 판사에 대한 징계 이후 법원직원(노조)에 대해 "법원 직원들의 경우 법관들에 비해 정치적 중립성 위반, 명예훼손 등 격하고 정제되지 않은 표현의 글이 올라올 가능성이 크다"면서 "코트넷운영지침에 따른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다. 대법원에겐 법원직원들 역시 동반자가 아닌 통제의 대상일 뿐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특별조사단의 결론은 너무 실망스럽다. 양승태 대법원 시절의 법관독립 파괴 행위를 그저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결론 내린다. 대책이라는 것도 사법부관료화 방지책, 재판독립 침해 시정장치 마련 등의 추상적인 절차뿐이다. 미봉책으로는 내부 자정이 불가능하다. 관련자들에게 단호하게 형사적 책임을 물어야 할 때다. 그 정점에는 법원을 망치고 떠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을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얼마 전 법관 파면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을 청와대가 대법원에 구두로 전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삼권분립 위반이라며 일부 판사들이 반발했다. 판사들에게 묻는다.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법관의 독립이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그런데도 침묵할 것인가. 대법원과 청와대가 교감하며 판결을 거래한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입을 닫고 있을 것인가.

이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권력분립을 망각하고 판결을 거래하여 민주주의를 깨뜨린 그를 현행법에 따라 심판해야 한다. 직권을 남용하고, 증거를 인멸하려 한 이들도 함께 법정에 세워야 한다. 그래야 사법부가 바로 설 수 있다.

판사들이 침묵하다면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 우리는 광장에서 촛불의 힘을 보았다. 만일 시민들의 촛불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양승태 후임 대법원장까지 임명하여 퇴임 후 안전장치까지 마련해 놓았을 것이다. 구속은커녕 형사처벌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와 함께 대를 이어 영원히 보수에게 추앙받는 대통령으로 평가받았을지도 모른다.

끔찍하다. 시민들이 정치에, 법원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주권자들이 나서야 할 때다. 사법부의 권력도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태그:#대법원, #양승태, #법관블랙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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