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자꾸 납니다. 고마워서. 이런 날이 와서. 지난 10년의 암흑기 동안 넘어지지 않고 싸워온 KBS 동지들이 고맙고,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그들이 고맙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촛불시민들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10년을 기다리니, 그 시간을 버티니 눈물나게 고마운 날도 오는 법이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의 사연이다. 지난 22일 정 전 사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영상 하나(☞영상 바로 가기)를 게시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KBS 새노조)가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이 영상에는 정 전 사장이 10년 전 KBS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임됐던 과정과 양승동 신임 사장이 취임한 작금의 KBS를 바라보는 정 전 사장의 회한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 영상에는 노무현 정권 시절 '영향력 1위', '신뢰도 1위'를 달렸던 공영방송 KBS의 10년이 압축돼 있었다. 파업과 릴레이 발언에 나섰던 영상 속 KBS 구성원들은 "정연주 사장 시절엔…"이란 회고와 자성을 입에 달고 있었다.

그 가운데 백미는 지난 17일 이뤄졌던 정연주 전 사장과 양승동 신임 사장의 만남이었다. 특히 박근혜 정권의 퇴출 이후 파업과 정상화 과정에서 선출된 양승동 신임 사장은 10년 전  KBS PD 협회장과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사원행동 대표직을 맡아 이명박 정권에 의해 쫓겨났던 정 전 사장의 해임안 처리를 격렬하게 막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제는 다른 위치에서 만나 덕담을 나누는 두 사람의 얼굴은 뜻모를 감동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정연주 사장 말마따나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하필 이 영상이 서거 9주기 하루 전날 게재됐던 탓일까. "10년 동안 지치지 않고 싸워준 여러분(KBS 구성원) 덕분"이라는 정연주 전 사장의 소회에서 하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얼굴이 스쳐지나간 이유 말이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을 소환했던 영화들의 몇몇 장면 역시 함께 스쳐 지나갔다.

박근혜의 '악마의 미소'를 기억하라

 영화 <더킹>의 한 장면

영화 <더킹>의 한 장면 ⓒ (주)NEW


아마도 한재림 감독의 <더 킹>은 우회적인 방식으로 '노무현의 죽음'을 추모하는 영화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왕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이 작품은 지난 시절 단 한 번도 훼손되지 않고 독야청청했던 검찰 권력의 민낯을 풍자적으로 그린다.

정권 교체 시기 마다 쟁여둔 사건을 터트리고, 줄을 대고, 심지어 점을 보고 무속인을 찾으며 권력에 빌붙으려는 영화 속 '스타 검사' 한강식(정우성 분)의 생존법은 대한민국 '정치검찰'의 눈부신(?) 활약상을 묘파해내고 있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결단 끝에 자리를 마련한 '검사와의 대화'에서 노 대통령의 "이 정도면 막 가자는 거지요?"라는 명언(?)과 함께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 냈던 그 정치 검사들 말이다.

그에 그치지 않고 <더 킹>은 직접적으로 고 노무현 대통령을 소환한다. 촛불 정국 국면에서 '악마의 미소'로 더 유명해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국회 장면을 그대로 영화에 넣었뿐만 아니라 노 전 대통령 서거 장면까지 그대로 담았다. 이를 통해 <더 킹>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았던, 국가를 위기 상황으로 몰아갔던 공범들 중 하나가 바로 그 정치검찰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반발하는 한편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권들에 곡학아세하거나 사건을 통해 정권에 타격을 주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정치검찰들의 행태를 직설화법으로 풍자한 것이다. 한재림 감독 역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및 서거가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그 사건은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탄핵안 가결의 순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가 국회에 앉아 '악마의 미소'를 날리는 그 역사적인 장면을 스크린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보너스다. <더 킹>이 이렇게 정치검찰을 통해 전직 대통령 노무현을 소환한다면, 이후 소개할 두 편의 다큐는 두 번의 선거를 치르는 정치인(과 인간) 노무현을 스크린으로 불러내는 작품들이다.

'부산 갈매기' 부르던 그 노무현이 그립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의 한 장면

<무현, 두 도시 이야기>의 한 장면 ⓒ 인디스토리


16대 총선에 출마한 노무현의 여정은 험난했다. 당시 야당으로서는 험지인 부산에서 부득불 출마한 노무현의 고군분투는 그의 '역사'를 아는 이들이라면 더 눈물 겹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당시 선거캠프의 기록 영상에서 길어 올린 화면들 자체가 그러하다.

목이 쉬어 "부산 갈매기"를 부르고, 길거리에서 한 명 한 명 유권자들을 만나고, 여당의 네거티브와 흑색 선전에 맞서면서도 "부산에서 야당을 찍어줘야 한다"고 목 놓아 외치던 정치인 노무현의 유세전은 그 자체로 인간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개봉 이듬해인 2017년 감독판까지 개봉한 <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이와 더불어 노무현 정신을 이으려 20대 총선에서 전남 여수에 출마한 백무현 후보의 이야기와 노무현을 기리고 나름의 평가를 내놓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다. 감독판인 '파이널 컷' 개봉 당시 만난 전인환 감독은 단순한 "추모 영화"는 아니라면서 영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다른 결이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고, 좀 더 우리와 밀접한 이야기다. 인간 노무현을 놓고 봤을 때도, 전투적이고, 직설적이고, 파워풀한 노무현도 있겠지만, 상처받고, 아파하고, 울기도 하는 노무현, 또 다른 노무현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정치인이자 인간 노무현이 계속 소환되는 까닭도 이 발언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안타깝게 떠나보낸 전직 대통령을 아직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한 이들이 '인간 노무현'을, 여느 기존 정치인과 다른 인상과 감정을 줬던 그 '인간적인 노무현'의 이면들을 확인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무현, 두 도시 이야기>에서 가장 울컥하게 만드는 장면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과 노제 장면이리라. 어쩔 수 없이, 그가 외롭게 몸을 던지던 그때 '나'는 '우리들'은 무얼 하고 있었나 하는 물음으로 부지불식간에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에, 자문에 답하는 '노무현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긴 작품이 바로 <노무현입니다>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노무현에 대하여

 영화 <노무현입니다> 포스터. 드디어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 포스터. ⓒ 영화사 풀


"노무현 대통령은 사랑스러운 분이었고요. 뭔가 해주고 싶은 분이었어요." (유시민 작가)

취재원 리스트만 200여 명, 그 중 인터뷰가 확정된 인물은 최종 72명. '노빠'도, '노사모'도 아니라는 이창재 감독이 작품을 위해 인터뷰한 '노무현의 사람들'의 숫자다. <노무현입니다>는 2002년 대선 경선 당시의 기록 영상과 이들이 기억하는 정치인 노무현, 인간 노무현에 대한 증언을 병렬로 나열한다.

'친구' 문재인 대통령부터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감시했던 중앙정보부 12기 공채요원이었던 이화춘씨까지. 그렇게 2017년 185만이 관람한 <노무현입니다>는 이창재 감독이 노무현의 '화양연화'라고 말하는 2002년 대선 경선 과정과 역사에 길이 남을 정치인을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이들의 추억과 부채감을 적절하게 '콜라보'시킨다.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의 노무현은 치열하면서 담담했고, 그 노무현을 위해 자발적으로 뛰었던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뜨거웠다. 후보 노무현의 당선도, 그를 위해 뛴 팬클럽 '노사모'의 경험도 한국 정치사에서 '최초'라 불릴만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인간 노무현을 기억하는 이들의 눈물 역시 뜨거울 수밖에 없다.

지난 대선 과정과 맞물리며 다큐멘터리로는 드물게 185만 관객을 동원한 <노무현입니다>는 담담한 듯 뜨거운 보기 드문 다큐다. 그건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인생 여정이 그러했기에, 그런 뜨거움을 '노무현의 사람들'이 기억하기에 가능한 작품의 톤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이 작품이 '문재인 시대'에 출현한 것 역시 '드라마틱'한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밖에 말할 도리가 없을 것 같다.

할리우드는 닉슨을, 한국은 노무현을 소환하는 이유

다시 되돌아가 보자. 정연주의 10년과 노무현 서거 9주기.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고, 그 잃었던 것을 되돌리기 위해 싸웠다. 그렇게 촛불을 들었고, 두 명의 전직 대통령에게 수의를 입혔다. 하지만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이에게서는 어떤 말도 들을 수 없다. 그래서 더 KBS로 귀향한 정연주 사장의 미소가 묘한 슬픔을 자아내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인간 노무현을, 정치인 노무현을, 그의 과거와 이면을 부지런히 소환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지금도 영화계에서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과거를 소재로 한 극영화와 그를 기리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문재인 시대'에 찾아 올 그 영화들은 이제 관객들에게 영화 티켓을 사는 것 만으로도 어떤 싸움에 동참한다는 감정을 불러올 수 없다. 소위 '노무현 영화'에 어떤 '정치함'이 훨씬 더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대로, 할리우드 영화가 가장 많이 소환한 전직 대통령이 바로 닉슨이라고 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퇴출당한 전직 대통령을 통해 미국영화들은 지속적으로 자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환하는 '노무현'이 다시금 어떤 의미인지 되돌아 볼 일이다. 영화 <변호인> 속 송강호의 "국가란 국민입니다"라는 대사가 심금을 울렸던 이유와 함께 말이다.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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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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