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회 칸 영화제가 한국 시간으로 지난 20일 끝났다. 황금종려상의 영예는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돌아갔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 이후로 21년 만의 쾌거다.

이번에 상을 받은 영화 <만비키 가족>은 국내 개봉 일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고레에다에 관해서는 독자들이 더 잘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고로, 21년 전에 상을 받았던 <우나기>가 어떤 영화였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이마무라 쇼헤이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인류학입문>의 작품 포스터

영화 <인류학입문>의 작품 포스터 ⓒ 닛카쓰


재밌게도 두 감독은 와세다 대학 선후배 사이다. 물론 대학 동문이라고 해서 영화가 비슷한 건 아니다. 고레에다의 작품이 따스한 가족 영화라면, 이마무라의 작품 세계는 검은 욕망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하얗게 질린 채로 고통받는 외피를 뒤집으면 검은 욕망의 내피가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겉으로 보이는 것조차 고통의 일부이며, 가식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 진심이 숨겨 있다는 것이다.

이마무라 쇼헤이를 설명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솔직함이다. 이마무라는 인간의 가식에 깊은 회의감이 있었다. 아마도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보고 들은 것들이 영향을 끼쳤으리라.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에는 당대 일본 사회의 검은 속내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 것으로 올라와 있다. 초기작 <일본곤충기>는 창녀촌에 다다른 주인공의 분투를 그리며, <인류학 입문>은 무능한 포르노 감독의 메이킹 필름에 가깝다. 성과 폭력이 난무하는 일본의 밑바닥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다.

그는 인간이 가축에 더 가깝다고 보았고, 일본인의 속내가 가축만도 못하다고 말했다. 일례로, 전후 십 년을 다룬 <돼지와 군함>에서는 군함이 정박된 마을 안쪽에 돼지를 실은 트럭 수십 대가 풀려나며 벌어지는 풍경이 있다. 그때, 깡패와 거지로 이루어진 신묘한 집단이 나타나 한 남자와 대치한다. 그런데 그 거리는 평소에 미군으로 가득 찬 떠돌던 사창가다. 흡사 미군이나 하층민 남성을 연상케하는 돼지 무리를 두고 벌어지는 총격전은 돼지들의 승리로 끝난다. 돼지가 너무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딘가 모르게 허둥지둥대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실상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사라지고 만다.

이마무라가 가족 영화의 거장이었던 스승 '오스 야스지로' 슬하를 박차고 나온 건 무척 유명한 일화다. 그러니 가족 영화로 유명한 고레에다는 이마무라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영화 스타일이 판이해도 일본의 사회 문제를 지적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마무라의 중기 작품 <복수는 나의 것>이 대표적인 예다. <복수는 나의 것>은 실제 연쇄살인범의 범행을 현실에 가까운 광기로 그려냈다는 점이 돋보인다. 작중에서 살해당하는 사람을 통해 당대 일본 사회를 짤막하게 요약하는 건 덤이다. 우리나라 관객에게는 박찬욱이 이름을 따온 영화로도 유명하다.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의 작품 포스터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의 작품 포스터 ⓒ 도에이


또 다른 중기 작품 <나라야마 부시코>는 그에게 첫 번째 황금종려상을 안겨주었다. 동명의 소설의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흔히 고려장으로 알려진 부모살해 풍습을 그리고 있다. 메이지 유신 이전 어느 깊은 산골짜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삶의 터전은 그야말로 자연과의 싸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추운 겨울 배고픔에 시달리다 식량고를 훔친 이는 가족 전체가 생매장당한다. 나이 든 어머니는 자식의 겨울을 위해 일부러 앞니를 깨뜨려 때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마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성교는 이곳이 정말로 야생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마무라에게 사회란 곧 야생이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아무런 이득도 해도 끼치지 않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양기를 물씬 풍기는 곳이다. 동물보다 못한 게 아니라 인간도 동물의 일종이라는 것, 그리하여 야생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또한 자연스럽게 묘사되었다. 그 자연스러움은 성욕과 물욕, 이기심과 배덕감이라고 이마무라는 말한다.

2. <우나기>는 어떤 영화인가?

이마무라 쇼헤이의 작품 세계는 초기부터 후기를 거치며 점점 순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초기 작품이 한여름 땡볕 아래 끈적한 핏물에 날파리가 꼬이는 느낌이라면,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점진적으로 따스한 인류애를 내보인다. 하지만 기괴한 건 매한가지다. 여전히 죽음과 성이라는 두 가지 테마가 영화 근저에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의 후기 영화 두 가지를 살펴보자.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보물을 찾아 떠난 남자가 낯선 마을에서 욕구불만 여자를 만나 결혼한다는 간략한 이야기다. 그녀의 몸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고 그것이 물로 구체화된다. 주기적으로 욕망을 해소해주지 않으면 물을 내뿜곤 한다. 마치 고래처럼 말이다. 그녀는 평소 무언가를 훔치는 것으로 욕구를 해소하고 있었는데, 낯선 남자와의 성교를 통해 욕망을 분출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영화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작품 포스터

영화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작품 포스터 ⓒ 닛카쓰


삼류 개그 스토리처럼 보이는 영화지만 사실은 무척 뜻깊은 영화다. 제목에서 따뜻한 물이 일본의 '이타이이타이병' 사건이 벌어진 다리 아래를 지적하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면 말이다. 마을 전체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강물이 남녀의 심적물적 사랑을 보듬는 것으로 변화되는 일련의 과정에는 감독의 가치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육체적 사랑이 정신적 사랑으로 변하고, 신체 질병을 유발했던 과거의 강물은 현재에 이르러 그들의 마음을 잇는다. 그래서인지 욕망으로 들끓던 여인과 그녀를 구원하는 남자의 결합은 일본 사회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성수로 보이게 된다. '다리 아래 따스한 물'은 아주 은밀하고 직설적인 '농담'인 것이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전작인 <우나기>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남자가 바람 핀 아내를 살해한 후 경찰서로 자수하는 장면을 보여주고는, 출소 후에 어느 마을에 자리잡아 낯선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한다. 이전에는, 이마무라의 영화에서 남녀는 사랑에 빠져야만 했고 그 결과로 남성은 파멸에 이르곤 했다. 그러나 <우나기>에서는 이미 살인을 저질렀던 남자가 여성을 만나 구원받는다는 점이 다르다.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대변되는 두 인물을 통해 감독은 그토록 야만했던 일본의 속내가 어느정도 구원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우나기>와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어느 일방으로 진행되는 사랑이 아니라 두 사람 간의 하모니라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두 영화에서 두 남자가 사회에서 내쳐져 있다면, 두 여자는 내면을 이루는 어떤 사회에서 스스로 내쳐져 있다. <우나기>에서 전과자인 남자는 자살하려던 여인을 구하게 되고, <붉은 다리…>에서 실업자인 남자는 성욕에 고통받는 여인을 구하게 된다. 이 일련의 연애담이 남성의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여성이 먼저 다가왔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만약 그의 영화에서 남성성이 신체이고 여성성이 마음이라고 가정해본다면, 야생으로부터의 탈피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뜻이다.

 영화 <우나기>의 작품 포스터

영화 <우나기>의 작품 포스터 ⓒ 쇼치쿠


3. 사건보다 사람이 먼저, 성찰의 휴머니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필모그래피를 쭉 흩어보면 그의 작품관이 마냥 긍정적인 분위기만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일례로, <아무도 모른다>는 방치된 일본의 아이들을 통해 제도와 사람을 비판하는 영화였다. <공기 인형>은 저출산과 히키코모리 혹은 성에 관한 문제였다. 그렇게 사회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영화가 있는 한편, <바닷마을 다이어리>나 <태풍이 지나가고>는 사회보다 사람에 집중한 영화였다. 상처를 말하기에 앞서 사람을 먼저 보듬는 따스한 이야기들을 볼 때, 우리의 얼굴에는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그 두 가지 형태의 이야기가 고레에다의 필모그래피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후기 영화 관점에서 본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말하는 '구원담'과 일맥상통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정확하게는 '있을 수 있다'는 게 맞을 듯하다. 어떤 감독의 작품 세계를 '~는 이렇다'며 가정해 버리는 건 몹시 어리석은 일이니까.

앞서 말했듯이, 이마무라의 후기 영화에서 인물은 사회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본연의 자유를 찾으려 한다. 그 본연의 자유가 바로 따스한 인간애요, 따스한 인간의 육체다. 이마무라에게 육신(사회)이란, 더럽고 추잡한 대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고 지향해야 할 가치로 변화했었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작품 포스터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작품 포스터 ⓒ 티브로드폭스코리아


마찬가지로 고레에다의 영화 전반에서, 인물은 사회적 제도와 인간 본연의 가치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끝내 본능에 충실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다. 병원의 실수로 벌어진 이야기. 그 영화에서 아버지는 '낳은 자식'과 '기른 자식'을 사이에 두고 갈등하다가 끝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채로 막을 내린다. 사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기른 자식'에 대한 그의 마음이 돌아서지는 않았다. 단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바꾸어 보려다가 이게 아니라고 자각했을 뿐이다.

<우나기>에서 남자는 어느 누군가로부터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고발 편지를 받는다. 그게 영화의 시작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편지를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발신자보단 수신자가 중요하다는 것일 테다. 이미 보내진 편지인데 발신자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남자도 저질러진 살인에 얽매이지 않고 새 출발을 하게 된다.

이와 동일하게, 어떤 사건을 둘러싼 우리의 태도 또한 돌아보게 된다. 사회보단 사람, 사건보단 사람이다. 이번에 개봉하게 될 고레에다의 <만비키 가족>은 도둑질과 일용직으로 살아가는 가족이 버려진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룬다. 이 영화에서도 우리가 기대하게 되는 건 아마도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 만비키 가족 이마무라 쇼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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