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현대야구에서 '이닝이터'의 희소성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다승이나 자책점 같은 기록보다 높은 이닝소화력을 1급 투수의 기준으로 더 평가하는 분위기도 있을 정도다. 프로야구 경기수 증가와 투수 분업화의 영향으로 완투형 투수가 날로 줄어들고 있는 현대야구에서 경기당 6~7이닝 이상을 안정적으로 소화해줄수 있는 이닝이터형 투수들의 존재는 각 팀의 마운드 운영은 물론 전체 시즌의 판도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KBO 최고의 이닝이터는 LG의 헨리 소사다. LG의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는 소사는 올시즌 10경기에서 70이닝을 소화하며 경기당 평균 7이닝을 책임지고 있다. 현재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중 평균 7이닝 이상을 소화한 선수는 소사가 유일하다. 소사는 자책점도 유일하게 1점대(1.80)를 유지하며 선두에 올라있고, 등판한 전 경기에서 퀄리티스타트에 성공했을만큼 투구내용도 꾸준하다.

LG 선발 소사 8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LG와 롯데의 경기.

LG 선발 소사가 역투하고 있다.

▲ LG 선발 소사 지난 8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LG와 롯데의 경기. LG 선발 소사가 역투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국내 투수 중에는 역시 양현종(기아)이 최고의 이닝이터로 꼽힌다. 양현종은 10경기에 등판하여 69이닝을 책임지며 소사에 이어 최다 이닝부문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2014년 이후로 국내-외국인 투수들을 통틀어 KBO리그에서 양현종보다 더 많은 이닝을 소화한 투수는 전무하다. 양현종은 지난 4년간 749이닝을 소화했으며 매시즌 평균 170이닝 이상을 넘겼다. 2016년에는 생애 최초로 200이닝을 돌파하기도 했다. 실력 또한 꾸준히 매시즌 두 자릿수 이상의 승수를 넘겼다. 양현종이 왜 현존하는 KBO 최고의 토종 에이스로 불리우는지 이유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하지만 소사와 양현종을 빼면 올시즌 프로야구에서는 오히려 전통적인 이닝이터 강자로 꼽히는 투수들이 고전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삼성 윤성환, 두산 장원준-유희관, LG 차우찬, SK 메릴 켈리 등 그동안 꾸준함의 대명사로 불리우던 투수들의 활약은 올시즌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올시즌 경기당 5이닝을 채우기에도 벅찬 모습을 보이며 최다 이닝 부문에서 모두 2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이닝이터들의 부진, 공 많이 던진 후유증과 무관하지 않다

모범 FA의 상징이자 꾸준함의 아이콘이었던 장원준은 올시즌 9경기에서 고작 41.1이닝을 소화하는 데 그치며 3승 4패, 방어율 9.15라는 믿기어려운 부진에 빠져있다. 퀄리티스타트은 2번뿐이고 피안타율도 .325나 된다. 6이닝 이상 소화한 경기가 3번에 불과하다. 장원준과 선발 원투펀치를 형성하던 유희관도 올 시즌 1승 3패 평균자책점 8.17점에 그치며 최근에는 아예 불펜으로 강등당했다. 두 선수는 올시즌 나란히 2군을 들락거리는 수모를 당해야했다. 두산이 두 핵심 선발투수의 부진에도 선두를 달리는 게 놀라울 정도다.

5년 연속 10승과 170이닝 이상을 기록했던 삼성의 1선발 윤성환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2년간 외국인 투수들의 부진 속에서도 꿋꿋히 두 자릿수 승리를 따내며 자존심을 세웠지만 올시즌엔 9경기에서 고작 2승(4패)을 따내는 동안 48이닝을 소화하는 데 그치고 있다. 자책점은 무려 6.75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는 투구수 50~60개만 넘어가도 구위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게 두드러진다. 상대 타순이 한 바퀴 돌고난 4~5회만 되면 피안타율이 증가하며 난타를 당하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외국인 투수들도 예외는 아니다. 2016~2017 두 시즌 모두 200이닝을 넘겼던 기아는 헥터 노에시는 올시즌 4승 2패 평균자책점 4.63에 58.1이닝을 소화하며 예년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KT 피어밴드와 SK 켈리는 부상으로 시즌 중 한동안 2군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닝이터들의 부진은 아무래도 많이 던진 후유증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야구계에서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과 같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때는 일본식 야구의 낡은 잔재를 따라 '투수의 어깨가 쓸수록 강해진다'는 잘못된 선입견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현대야구와 스포츠과학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근거 없는 주장으로 판명난 지 오래다.

올시즌 부진에 빠진 투수들의 경우, 최근 3년을 기준으로 해도 모두 500이닝 이상을 소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무리 로테이션이 있고 휴식일이 보장되었다고 해도 오랜 시간 공을 많이 던지다 보면 피로가 누적될 수밖에 없는 것은 불가피하다. 실제로 몇몇 투수들의 경우 아직 노쇠화나 특별한 부상 등의 사유가 없음에도 알 수 없는 구위저하 현상이 뚜렷하다.

잘 하고 있는 투수일수록 컨디션 관리해야

일부 팬들은 지금 현재 잘하고 있는 투수들이라고 해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꾸준한 관리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양현종이다. 평소에도 양현종은 다승보다 이닝 소화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할만큼 많은 이닝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강한 선수로 유명하다. 올해도 양현종의 경기당 투수는 평균 100개(총 1023개)를 넘기고 있다. 총 투구수는 양현종보다 더 많은 이닝을 소화한 소사(994개)보다 많다.

양현종은 지난 20일 SK전에서는 올시즌 처음으로 불과 4일 휴식만에 등판하기도 했다. 평소보다 적은 5이닝만에 교체되며 승리투수가 되기는 했지만 이미 팀 내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고 있는 에이스에게 무리를 시킬 필요가 있었는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일부 팬들은 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양현종의 기용 방식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역투하는 양현종 2일 오후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기아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 기아 선발 양현종이 역투하고 있다.

▲ 역투하는 양현종 지난 2일 오후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기아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 기아 선발 양현종이 역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최근 몇 년간 SK 김광현, 기아 윤석민, LA 다저스 류현진 등 한국야구를 대표하던 수많은 투수들의 부상의 늪에 시달렸다. 양현종도 몇 년 전 어깨통증으로 2년 가까이 고생했던 전력이 있다. 선수층이 얇고 144경기 장기레이스를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양현종 같은 이닝이터의 존재는 팀에 큰 힘이 되지만 자칫 부상이라도 당하면 한국야구 차원에서 큰 손실이 아닐수 없다.

꾸준한 성적을 올리며 장수하는 투수들은 선수 개인의 노력과 자기관리도 중요하지만 결국 코칭스태프의 역할과 판단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각 팀의 감독들은 매경기 성적에 대한 부담이 큰 상황에서 일일이 선수의 컨디션을 관리해주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무리해서라도 우수한 투수들을 최대한 길게 활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현대야구에서 아직도 혹사 논란이 유독 투수들을 상대로 반복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요즘 한국야구에 왜 이닝이터형 투수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지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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