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은 흔히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의 무덤'으로 불린다. 역대 대표팀 사상 4년 주기로 열리는 월드컵을 완주해낸 감독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다. 지역예선 과정에서 성적부진으로 감독이 교체되기 일쑤였고, 월드컵 본선 이후 재계약에 성공한 감독 역시 전무하다.

한국축구 사상 최초의 원정 16강에 빛나는 허정무 감독, 대표팀 역대 최장수 사령탑 울리 슈틸리케 감독, 한국축구의 전설인 차범근-홍명보 감독 등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재계약은 하지 않았지만 대표팀에서 좋은 성적과 여론의 지지를 모두 잡고 명예롭게 물러난 인물은 국내-외국인 감독을 통틀어 2002년 한일월드컵의 4강 신화를 이끌어낸 거스 히딩크 감독 한명 정도다.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카타르와 원정경기에서 패한 한국 축구 대표팀의 슈틸리케 감독이 지난 14일 오후 인천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슈틸리케 전 감독이 지난 2017년 6월 14일 오후 인천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07년 아시안컵 대표팀을 이끌었던 네덜란드 출신 핌 베어벡 감독의 어록은 지금도 종종 회자된다. 베어벡 감독은 "한국에서 대표팀의 팬이라고 자칭하는 이들은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자국의 축구수준이나 리그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정작 대표팀에게는 항상 모든 경기, 모든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 요구가 정당한 것이라고 착각한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베어벡 감독은 2007년 아시안컵에서 3위라는 성적을 올리고 1년 만에 자진사임으로 한국 지휘봉을 내려놓은 바 있다. 베어벡의 주장은 역대 모든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들이 공통적으로 겪어야 하는 고충을 대변하는 발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2018 러시아월드컵 대표팀의 지휘봉을 거머쥐며 '독이 든 성배'를 물려받은 신태용 감독의 행보 역시 주목받고 있다. 신감독은 지난해 7월 성적부진으로 경질된 슈틸리케 감독의 뒤를 이어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이후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을 이뤄내는 성과를 올렸다. 지난해 12월에는 동아시아컵에서 라이벌 일본을 대파하며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태용호를 바라보는 국내 여론의 평가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한국축구는 러시아월드컵에서 독일, 스웨덴, 멕시코 등 세계적인 강팀들과 한 조에 배정되어 '죽음의 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설상가상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은 최상의 전력을 유지해도 모자랄 상황에 김민재, 염기훈, 권창훈 등 주축급 선수들이 줄줄이 부상으로 쓰러지며 비상이 걸렸다.

특히 신태용호가 출범 이후 지난 1년간의 시간동안 꾸준히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한 데다, 월드컵 본선 진출 이후 터져나온 히딩크 복귀 파동 등으로 신태용 감독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진 것도 부정적인 여론이 굳어진 이유로 꼽힌다.

축구대표팀 감독 향한 지나친 비난은 독이 될 수도 있다

신 감독은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대표팀 운영을 둘러싼 일부의 비난 여론과, 한국축구의 기형적인 '월드컵 문화'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신 감독은 19일 <월간중앙>과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국민이 평상시에도 축구를 좋아하고, 프로리그 관중들 꽉 차고, 그런 상태에서 대표팀 감독을 욕하고, 훈계하면 난 너무 좋겠다 생각한다"며 "그러나 축구장에 오지 않는 사람들이 월드컵 때면 3000만 명이 다 감독이 돼서 죽여라 살려라 하는 게 아이러니하다"고 지적했다. 신 감독의 발언은 11년 전 베어벡 감독의 비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신 감독은 일부의 비판 댓글에 대하여 "제대로 축구를 모르면서 인신공격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신태용 네가 감독이냐', '너 때문에 우리나라 축구가 안 된다' 같은 비난들이 대표적이다. 신 감독은 이를 두고 "정말 축구에 관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단지 화풀이"라고 지적했다.

신 감독의 격정 토로에 팬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어쩌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라고 할 수 있는 지적이다. 신태용 감독이 처한 상황은 역대 모든 대표팀 감독들이 겪어야 했던 고충이다. 차범근이나 홍명보 감독은 월드컵에서의 실패로 한때 국내에서 축구인생이 거의 매장당할뻔한 위기를 겪었다. 심지어 허정무 감독은 16강이라는 성과를 일궈낸 이후에도 '오로지 박지성 덕분'이라는 왜곡된 평가에 시달렸다. 히딩크 감독조차 월드컵 본선을 불과 3~4개월 앞두고 평가전 성적이 좋지 않던 시기에는 경질설과 인신공격성 비난에 시달린 게 현실이었다.

축구팬들의 기대는 높기도 하지만 다양하고 복잡하기도 하다. 특정 선수를 기용하거나 기용하지 말아야 한다든지, 어떤 전술을 사용하고 경기 중 어떤 판단을 내려야 했는지까지 일일이 감독을 평가하는 대상이 된다. 팬들이 요구하는 목소리는 저마다 다르지만 감독이 각기 다른 주장과 여론을 일일이 반영하며 팀을 운영해나가기는 어렵다. 그리고 감독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대부분은 '선입견'이나 '결과론'인 경우도 대단히 많다. 각자의 의견을 제시할 자유는 있지만 감독에 대한 존중이나 인내심이 결여된 맹목적인 비난이 여론이라는 포장을 등에 업으면, 오히려 대표팀을 압박하는 '내부의 독'이 될 수도 있다.

월드컵 앞둔 지금, 국민들의 성원 끌어내야 할 시점

 14일 오전 서울시청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 명단발표 기자회견에서 신태용 감독이 입장하고 있다. 신태용호는 28일 대구에서 온두라스, 다음달 1일 전주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평가전을 치른 뒤 3일 사전캠프지 오스트리아로 떠난다. 2018.5.14

지난 14일 오전 서울시청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 명단발표 기자회견에서 신태용 감독이 입장하고 있다. 신태용호는 28일 대구에서 온두라스, 다음달 1일 전주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평가전을 치른 뒤 3일 사전캠프지 오스트리아로 떠난다. ⓒ 연합뉴스


물론 대표팀이나 역대 감독들이 모두 억울한 비난에만 시달린 것은 아니다. '의리축구' 논란을 일으킨 홍명보 감독이나, 역대 최장수 사령탑이라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한국축구를 예선탈락 위기로 몰아넣었던 슈틸리케 감독처럼 많은 사람이 비판에 동의한 감독도 분명 존재했다.

마찬가지로 신태용 감독 역시 팬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는데는 감독 본인의 잘못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신 감독이 시작부터 비난의 중심에 선 이유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좋지 못한 경기력에도 상대팀의 경기결과로 운좋게 본선진출에 성공했지만 '헹가래 논란'과 '졸전'에 대한 발언 등으로 팬들의 인식과 동떨어진 언행을 남발한 측면이 컸다. 또한 부임 이후 1년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수비 불안' 문제나 특정 선수 발탁을 둘러싼 공정성 논란등은, 비록 비판의 수위가 과도하다는 지적은 나올수 있어도 충분히 합리적으로 가능한 문제제기였다.

무엇보다 감독이 월드컵이라는 중대사를 앞두고 국민들의 성원과 지지를 끌어내도 모자랄 시점에 오히려 팬들과 갈등을 유도하는 발언을 하는게 과연 적절했는지도 아쉬운 부분이다. "K리그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월드컵때만 모두 감독 노릇을 하려 든다"는 불만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축구와 대표팀에 대한 관심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자국리그를 즐기는 것은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며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대표팀에 관하여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 오히려 대표팀 경기라도 해도 축구만큼 국민적 관심을 모으지 못하는 종목도 수두룩하다. 신태용 감독은 그간 자신의 언행과 대표팀에서 보여준 성과가 과연 국민적 지지를 요구하기에 충분했는지 스스로부터 돌아봐야 할 필요도 있다.

신태용 감독은 러시아월드컵에서 '통쾌한 반란'을 이야기하고 있다. 죽음의 조에서 만일 16강 진출이라는 기적을 이뤄낸다면 신 감독은 한국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올리는 반전의 영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조별리그 탈락, 최악의 경우 3전 전패라는 결과로 마감한다면 신태용 감독도 월드컵이 배출한 희생양이 이름을 올리며 더 이상 대표팀 지휘봉을 잡기 어려워질 수 있다. 과연 지금부터 약 한달 후 신태용 감독은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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