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 기자 말

*주의!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성공한 배우들의 현재를 보면 "어차피 잘 될 배우였어"하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조각 같은 외모, 작품에 헌신하는 열정과 노력, 균형을 이루는 재능까지. 배우로서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온 크리스찬 베일이 바로 그런 배우일 것이다.

1974년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987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태양의 제국>을 위한 오디션에서 4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 짐 역에 캐스팅 된다. 그의 연기는 극찬을 받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태양의 제국>에 나온 그 애 정도로만 기억했다. 1994년 <작은 아씨들>에서 그의 등장은 그가 준수한 외모의 청년으로 자랐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출발점이었으나 브렛 이스턴 앨리스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2000년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사이코패스 여피족을 연기하기 전까지 그의 배역은 조연에 한정되어 있었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포스터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포스터 ⓒ 길벗영화


조연에서 주연으로, <아메리칸 사이코>

먼지 한 톨 나올 것 같지 않은 깔끔한 아파트에서 아파트만큼이나 잘 다듬어진 외모의 남자가 자신의 하루를 시작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남자는 자신을 자기 관리를 중요시하는 27살의 패트릭 베이트만(크리스찬 베일)이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의 아침 루틴을 세세하게 설명한다. 아이스팩을 쓰고 얼굴 붓기를 빼는 동안 스트레칭을 하고, 용도가 각각 다른 여러 제품들을 이용해 샤워를 하고, 얼굴을 건조하게 해서 늙어보이게 만드는 알콜이 포함된 로션은 바르지 않는 등 굉장히 구체적이고 진지해서 웃음이 나온다. 얼굴에 바른 마스크팩이 마르면서 패트릭의 얼굴은 그의 것이면서도 그의 것이 아닌 듯 뒤틀린다. 마스크팩을 떼어내는 그의 행위는 본질을 상실한 껍데기뿐인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스크팩을 떼어내는 그의 행위는 본질을 상실한 껍데기뿐인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스크팩을 떼어내는 그의 행위는 본질을 상실한 껍데기뿐인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길벗영화


패트릭 베이트만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명문학교를 졸업하고 월스트리트의 합병 전문회사에서 일하는 소위 금수저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갖춘 것 같지만 그가 속한 세상에서 그가 가진 조건이라는 것은 그렇게 특별한 게 아니다. 그의 동료들 또한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명문학교를 졸업하고, 군살 하나 없이 날렵한 몸 위에 명품 양복을 걸친 채, 570달러나 되는 점심을(80년대 후반물가를 생각하면 엄청난 가격이다) 별거 아니라는 듯 크레디트 카드로 나누어내는 여피들이다.

일은 하지도 않고 대낮부터 회원제 바에 앉아 술을 마시는 속물적인 여피들의 모습을 비꼬는 몇몇 장면들은 십 수 년이 지나 다시 보아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 중 압권은 서로의 명함을 교환하며 종이의 재질과 글씨체, 그리고 잉크 색깔을 평가하는 장면이다. 의기양양하게 새로 뽑은 명함을 자랑하는 패트릭이 자신의 명함보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폴 알렌(자레드 레토)의 명함을 보고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다. 패트릭에게는 모든 것이 비교대상이고 비교의 기준은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다.

1%의 가진 자들은 그들 세계 안의 피라미드를 또다시 세우고 보다 우위에 있는 상대에게 엄청난 열등감을 가진다. 영화에서 이들이 '내가 제일 잘나가'를 증명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커리어가 아니라 최고급 식당 '도르시아'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다. 돈이 있어도 식사 예약을 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식당에서의 식사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는 기준과도 같다. 약에 취해 몸도 못 가누는 내연녀를 데리고 '도르시아'가 아닌 식당에 가서 '도르시아'라고 속이는 패트릭에게는 그 공간 안에서의 시간이 아니라 그 공간의 상징이 중요할 뿐이다. 영화 후반부 그의 독백에서와 같이 속은 전혀 중요하지가 않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들이 '내가 제일 잘나가'를 증명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커리어가 아니라 최고급 식당 '도르시아'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다.

영화에서 이들이 '내가 제일 잘나가'를 증명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커리어가 아니라 최고급 식당 '도르시아'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다. ⓒ 길벗영화


패트릭과 그의 친구들은 젠틀한 말과 태도로 서로를 대하지만 사실 서로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 이들은 서로의 얼굴과 이름을 혼동하기 일쑤이고 약혼녀가 옆에서 뭐라고 떠들어대든 헤드폰을 쓴 채 음악을 듣고, 내연녀가 하루 종일 약에 취해 있어도 그녀의 건강이 어떤지에 대해선 신경도 쓰지 않는다. 여유롭게 클럽에 앉아 가난에 굶주리고 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은 스스로를 비꼬는 것이든 아니든 가증스럽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들에게 하나의 정보일 뿐,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일으키지 못한다. 패트릭은 자신의 직업을 사람들을 처형하는 일이라고 설명하는데 맨하튼의 고층 건물 차가운 사무실에 앉아 사람들의 생계를 쥐고 흔드는 인수합병 전문회사에서 그가 하는 일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들린다.

크리스찬 베일의 존재감

패트릭의 차가우리만큼 깔끔한 아파트에는 그의 벽에 걸린 그림마냥 배경으로 슬래시 무비와 포르노 영상이 틀어져 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한 그가 사냥감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후 휴이 루이스, 필 콜린스 혹은 휘트니 휴스턴 등 뮤지션들에 대한 자신의 감상과 분석을 늘어놓는 모습은 살인을 하기 전 일종의 주문을 외는 것 같기도 하다. 거리의 창녀를 불러와서 몸을 씻기고 샤르도네 와인을 따라줄 때마다 최고급의 엄청 비싼 와인이라는 말을 잊지 않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도취된 듯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는 그의 모습은 블랙코미디다. 도끼와 칼, 피의 등장에도 영화는 직접적인 폭행 장면을 피해가지만 그의 폭력은 충격적이다. 그럼에도 시체를 담은 가방을 질질 끌며 핏자국을 남기면서 지나가도 경비원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자가용이 아닌 택시 트렁크에 시체가방을 싣고 그 가방을 보고 멋지다며 어디에서 샀냐고 묻는 친구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튀어나온다 .

살인을 향한 그의 욕구와 광기는 통제를 벗어나 겉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패트릭은 두려움에 떤다. 하지만 그의 두려움은 죄책감이나 후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욕망에 대한 두려움이다. 영화 마지막,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자신의 범죄고백을 헛소리로 넘겨버리는 변호사를 만나고 나서 로널드 레이건의 TV연설을 보면서 자신의 범죄와 자신의 존재가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이 고백마저 아무 의미가 없다는 패트릭의 독백은 마스크팩을 벗겨내는 영화의 도입부와 대구를 이룬다.

웃기면서도 섬뜩한 <아메리칸 사이코>는 80년대 미국사회를 비꼬는 소설을 영화화 한, 어디까지나 허구일 뿐인 이야기지만 타인에 무관심한 경쟁사회는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으며(오히려 악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수많은 패트릭 베이트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수많은 패트릭 베이트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수많은 패트릭 베이트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 길벗영화


패트릭 베이트만을 완벽하게 연기해내며 크리스찬 베일은 성인 연기자로서 확실히 자리 잡는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그의 영화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다. 이후로 그의 커리어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걷게 되는데, 물론 흥행에 참패한 영화들도 있었지만 2005년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로 전 세계적인 스타로 자리매김하고 2010년에는 <파이터>라는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그는 작품에 강하게 몰입하고 감독의 힘든 요구를 수용하는 배우로 유명하다. 특히 작품에 따라 변하는 그의 체중은 여러 차례 화제가 되었는데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완벽한 몸을 선보였던 그는 2004년 작 <머시니스트>에서 불면증에 걸린 남자를 연기하기 위해 30kg을 감량했다. 곧이어 배트맨을 위해 다시 근육질의 몸을 만드는 등 작품을 위해 다시 살을 빼고 몸을 불리는 것을 여러 번 반복했다.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완벽한 몸을 선보였던 그는 2004년 작 <머시니스트>에서 불면증에 걸린 남자를 연기하기 위해 30kg을 감량했다.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완벽한 몸을 선보였던 그는 2004년 작 <머시니스트>에서 불면증에 걸린 남자를 연기하기 위해 30kg을 감량했다. ⓒ 길벗영화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점친다면 배우로서 그의 미래는 매우 밝을 것 같다. 그의 집요한 노력은 타고난 외모에 시너지를 더해 그를 성공으로 이끌었고 그의 열정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공백 없이 빼곡히 메웠다(2018년에만 그의 영화 세 편이 개봉한다).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그의 연기는 언제나 만족을 주기에 그의 다음 영화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추신
1. 영화에서 현재 미국의 대통령인 트럼프의 이름이 여러 번 언급되는데 80년대 후반 성공한 40대 사업가 트럼프가 미국 사회에서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케 한다.
2. 원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패트릭 베이트만을 연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대니 보일의 <비치> 촬영과 겹치는 바람에 크리스찬 베일이 패트릭을 연기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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