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 배우들.

영화 <버닝>으로 8년 만에 신작을 선보인 이창동 감독. ⓒ CGV아트하우스


영화 <버닝>의 다양한 상징은 곧 관객들을 위한 것들이다. 칸영화제에서는 물론이고 17일 개봉 후 국내에서도 영화 속 청춘들 이야기에 여러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작가지망생 종수(유아인)와 그에게 다가간 해미(전종서), 그리고 이들 사이에 등장해 수수께끼 같은 행동을 하는 벤(스티븐 연)은 저마다 이 사회 누군가를 대표하기도 한다.

공식 상영 후 18일 오전 팔레 드 페스티벌 인근에서 이창동 감독을 만났다. 이미 공식 기자회견에서 "젊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며 영화엔 많은 사회적 코드들이 숨겨져 있다"며 "그것을 굉장히 단순하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는 그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크게는 <버닝> 속 주요 설정과 청춘을 바라보는 감독의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을 재해석한 그는 왜 이런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일까.

분노의 정체와 파주

해미에게 연정을 느끼지만 동시에 분노조절장애 아버지를 두고 시골에서 홀로 사는 종수는 갑자기 나타난 벤에게 어떤 열패감을 느낀다. 강남에 사는 이 부유한 청년은 종수와 해미에게 선의를 보이다가도 한편으론 농락하는 듯 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이들 관계가 지속될수록 영화의 긴장감은 쌓인다. 그리고 종수는 어느 시점에서 심리적으로 폭주하기 시작한다. 다소 어눌하거나 우유부단해 보였던 그의 내면에 불이 붙어 분노로 타오른 것. 그 분노의 정체부터 물었다. 영화에선 아버지와 어머니의 특정한 내면을 대물림 받은 것처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각자 문제를 갖고 있는데 상당 부분은 물려받은 것들이다. 종수는 그렇게 아버지를 싫어했지만 아버지의 분노가 아들의 몫으로 받아들여진 셈이지. 한국의 젊은이들이 아무리 일상에서 멀쩡해 보여도 사실 북한 문제를 빼고 살아갈 수는 없잖나. 영화 속 종수야 실제로 대남 방송이 들리는 파주 지역에 살았는데 어렸을 때 얼마나 싫었을까. 다른 한국 사람들은 듣지 않고 살지만 실제로는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 속 배경이 파주인 이유는 특별한 건 없다. 파주가 아닌 다른 공간이라고 해도 비슷하게 했을 것이다. 종수가 사는 공간은 곧 없어질 공간이다. 이번 영화에서 힘들었던 것 농촌이 자꾸만 없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물웅덩이가 마르듯이 농촌은 전원주택으로 바뀌고 공동체가 없어지고 있다. 그게 종수가 사는 공간이고 파주는 그걸 대변할 뿐이다."

 영화 <버닝>

영화 <버닝>의 한 장면. ⓒ CGV아트하우스


이창동 감독에게 불안함을 물었다. 60대의 시각으로 청춘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혹시나 그들을 잘 이해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감독 입장에선 넘어야 할 산이 아니었을까. 이창동 감독은 "젊은이들 이야기를 한다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 아닐까"라며 "젊은 감독이면 젊은이들 이야기라고 굳이 주장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에 대해) 물론 취재했다. 의외로 종수 같은 친구들이 많다. 동시에 비정규직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호사스러운 직업을 가진 친구들도 있다. 어쨌든 그런 이들의 정서와 무력감 등이 영화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한다. 제가 젊었을 땐 젊음이 어떤 건지 이해를 못했다. 나이 들며 생각해 보게 된 것이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곧 이 땅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와 연결돼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두고 젊은이에 대한 영화라고 주장하고 싶진 않다.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의 삶은 아마 파주와 서래마을(벤이 사는 지역) 사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호사스러움 속 외로움

몇 가지 잔상이 남는 이미지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벤이 지인들과 갤러리 안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 갤러리 내엔 용산참사를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다. 임옥상 작가의 '삼계화택-불'로 추정된다. 이창동 감독은 "의도적이었다"며 말을 이었다.

"벤의 삶의 방식과 관계가 있는데 벤은 겉으로 보면 좋은 사람이잖나. 심지에 배려 넘치고, 쓸데없을 정도로 선의를 베푼다. 그러면서 누릴 것을 누린다. 이게 요즘 삶의 방식 같다. 용산참사가 현실을 고발하는 그림이지만 그것조차 문화적으로 소비하는 것이지. 그런 그림을 두고 한쪽에서 즐겁게 식사하고 있지 않나. 다른 한쪽엔 참사가 있고, 물대포가 있다."

또한 남산타워와 그 타워가 보이는 달동네 작은 방. 해미가 살다가 종수에게 잠시 맡기게 되는 그 방 또한 중요한 이미지 대비다.

"그 방에서 가난한 젊은이들이 가난한 섹스도 하지만 여자가 없는 그 방에서 종수는 혼자 섹스를 하기도 한다. 결국 그 방에서 한 편의 소설을 쓰는데 그게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관객 분들 상상에 맡기겠다. 외국엔 서울타워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에선 서울타워보다는 남산타워라고 부른다. 왜 서울타워라는 말을 안 쓸까. 세계 대도시 타워에선 대부분 도시이름을 쓰는데. 해미는 그 타워가 보이는 작은방에 살고 있고, 종수는 거기서 혼자 자위한다. 젊은이들의 일상이라고 본다."

 영화 <버닝> 배우들.

이창동 감독 ⓒ CGV아트하우스


그리고 불편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버닝>에서 일부 보이는 남성적 시각, 그러니까 종수의 욕망을 촉발시키기 위해 해미의 몸이 '사용'되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아시스> 등의 전작에서 여성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일부 느껴졌던 불편함이었다. 이창동 감독은 "<오아시스>에서는 여체를 드러내진 않는다"며 말을 이었다.

"<오아시스>는 근원적 질문을 하는 영화였다. 장애인을 이해해야 하고 평등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그럴 수 있는지 질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랑은? 장애인과의 그런 사랑이 과연 사랑인가, 소통이란 무엇인가, 그런 질문들을 담고 있다.

<버닝>에서는 제가 남성이니 (영화에) 남성적 시각 없다고 한다면 거짓이지.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시각이 완전히 순수할 수는 없다. 다만 여자가 웃통을 벗는다는 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 68혁명 등에서 경험했잖나. 깃발 아래서 웃통을 벗는 건 하나의 운동이었고, 맥락이었다. 깃발 이런 게 남성적 상징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걸 드러내서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내 생각은 두 남자 사이에 해미만 혼자 삶의 의미를 구하는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노을을 배경으로. 노을은 낮과 밤의 경계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이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기도 하다. 또한 그 장소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지만 남과 북의 경계기도 하다. 물론 (영화 속 일부 남성들이 해미에게) 왜 춤을 추냐고 묻는데 그걸 나의 생각이라고 보면 안 되지(웃음)."

상징적 이미지와 함께 <버닝>엔 넋 놓고 볼만한 미학적 이미지 또한 있다. 하늘의 경계, 우연히 카메라에 담긴 철새들의 움직임은 분명 이 영화를 풍부하게 하는 요소다. 이창동 감독이 덧붙였다.

"영화는 운이다. 운으로 찍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영화라는 매체의 습성이다."

버닝 이창동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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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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