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델과 어니스트>의 포스터.

영화 <에델과 어니스트>의 포스터. ⓒ 영화사 진진


레이먼드 브릭스는 대표작 <눈사람 아저씨>(The Snowman)를 비롯해 <산타 할아버지>(Father Christmas), <곰>(The Bear)처럼 다양한 그림책으로 사랑 받아온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상상의 존재에 인간의 숨결과 디테일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삶을 새로운 관점으로 돌아보게 하는 독특한 매력으로 가득합니다. 둥글둥글 귀여운 그림체와 만화의 컷 나눔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죠.

<에델과 어니스트>는 레이먼드 브릭스가 자기 부모님의 결혼 생활 이야기를 쓴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입니다. 1920년대 런던, 가정부로 일하는 에델은 매일 아침 집 앞을 지나가는 우유 배달부 어니스트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어느 날 꽃다발을 들고 집으로 찾아온 어니스트와 사랑에 빠진 에델은 곧 그와 결혼하여 4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살게 됩니다.

평범하지만 공감 가는 소시민의 삶

 영화 <에델과 어니스트>의 한 장면. 에델과 어니스트는 외아들 레이먼드 브릭스와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영화 <에델과 어니스트>의 한 장면. 에델과 어니스트는 외아들 레이먼드 브릭스와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 영화사 진진


영화 속 에델과 어니스트의 생활은 전혀 특별하지 않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 사는 서민의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두 사람이 보금자리를 꾸미고 아이를 낳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시민의 삶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평범함이 훈훈한 감동을 선사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결혼 생활의 각 단계에서 느끼는 감정을 충실히 담아낼 수 있도록 세심하게 고른 일화들은 시종일관 관객을 울리고 웃깁니다. 저 역시도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나 결혼을 약속하고 가정을 꾸린 지난 십수 년간의 삶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행복했던 순간,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 소소한 삶의 보람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군요. 아이들이 좀 더 자라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또 인생의 황혼이 가까웠을 때 이 영화를 다시 보면 느낌이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이좋은 부부임에도 에델과 어니스트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이들의 상반된 성격은 영화 내내 적당한 긴장과 웃음을 빚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죠. 에델은 자기 집이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유지하길 바랐던 보수당 지지자였습니다. 반면, 어니스트는 낙천적이고 집안에 노래와 웃음을 선사하던 노동당 지지자였죠. 어떤 일에 대해 두 사람의 미묘하게 엇갈리는 반응과 상대의 버릇과 취향을 슬쩍 비꼬는 농담은 보는 이를 즐겁게 합니다. 배우자의 생각과 행동이 자기 것과 100퍼센트 일치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줬습니다.

어느 집안에서나 그렇듯, 이 부부에게도 외아들 레이먼드 브릭스는 소중했습니다. 모습이 많이 등장하지는 않아도 커가는 자식에 관한 이야기는 부부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았습니다. 레이먼드 브릭스가 원작 이야기를 쓴 것은 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이보다 조금 어렸던 1998년입니다. 이제는 80세가 넘어 부모보다 오래 살게 된 그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자기 작품을 보고 어떤 감회에 젖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영화 초반 실사 장면에 잠깐 출연하기도 합니다.

창작자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

 영화 <에델과 어니스트>의 한 장면. 가정부 에델과 우유 배달부 어니스트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끝에 결혼한다.

영화 <에델과 어니스트>의 한 장면. 가정부 에델과 우유 배달부 어니스트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끝에 결혼한다. ⓒ 영화사 진진


무언가를 창조하는 직종에 있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만든 제품이나 서비스, 예술 작품이 널리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소위 말하는 '대박'을 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지요. 이 길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자기 분야에서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쌓아야 하는 것은 물론, 대중적인 감각까지 갖추고 있어야 하니까요.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갈수록 보편적인 감수성과 멀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 분야를 잘 아는 입장에서 좋고 나쁨을 따지고, 남이 하지 않는 특별한 것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보통 사람의 느낌을 감지하지 못할 수 있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대중적인 감각을 유지한답시고 일시적인 유행을 따라잡는 데에만 골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더 안 좋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대중의 취향 이면에 있는, 사람들의 진짜 감정과 생각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렇게 기획된 결과물은 세상에 나왔을 때 이미 철 지난 것이 되기에 십상입니다.

수십 년간 사랑받아 온 레이먼드 브릭스의 작품은 이와 같은 딜레마에 부닥친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독특한 발상의 전환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아이디어이자 설정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여백을 채우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일상적인 경험과 정서에 기반을 둔 것들입니다. 소재 자체도 최신 유행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눈사람, 산타 할아버지, 곰 인형 등 오히려 진부한 구닥다리에 가깝죠. 그러나 작가는 이런 소재에 얽혀 있는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추억과 정서를 건드림으로써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대중적인 감각은 결국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는 삶의 경험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작자로서 '사람들이 어떤 걸 좋아할까'라는 고민이 있다면, 먼저 자신의 경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신이 겪은 일과 그로 인한 감정의 변화를 찬찬히 되짚어 나가다 보면, 분명히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에델과 어니스트>가 주는 감동 역시 그런 과정의 산물입니다.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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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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