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가 지난 8일 공개한 종합발표 자료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가 지난 8일 공개한 종합발표 자료 ⓒ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지난해 7월 31일 출범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이하 블랙리스트 조사위)가 지난 4월 30일 9개월 동안의 활동을 마무리 지었다. 처음 예정했던 6개월의 활동에 3개월을 더 연장한 것이었지만 워낙 많은 사안을 조사하다 보니 9개월도 짧기만 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 간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친 블랙리스트 피해는 광범위 했다. 블랙리스트 조사위는 박근혜 정권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권 시절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서도 지난 8일 최종 조사 결과를 통해 밝혀내는 성과를 이뤘다. 의혹 제기된 사안이 많다보니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아직 밝혀내지 못한 사안들도 적지 않다. 

MB 정권 블랙리스트의 73% 영화인 

문화예술분야 중 영화 쪽은 이명박 정권 당시 좌파 척결이란 명분으로 탄압이 심했다. 영화인들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다. 2010년 조희문 영진위원장 시절 독립영화관과 영상미디어센터 운영 공모 과정에서 불거진 심사부정 의혹은 이번 조사를 통해 제대로 인증됐다.  

특이하게 드러난 부분은 MB정권 당시 블랙리스트의 절대 다수를 영화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MB정권 국가정보원 블랙리스트 82명 중 60명이 영화인이었다.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등 영화감독 52명과 문성근, 권해효, 문소리, 김민선, 유준상 등 영화배우 8명 등 73%에 달했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와 국정원의 사찰, 검열, 외압, 배제 등이 영화인에 집중된 것이었다. 

앞서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 블랙리스트 입안 문건인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에서 <괴물><공동경비구역 JSA> 등의 영화를 '선전선동'이라고 규정하며 강력한 대응을 시사했다. 이후에 만들어진 국정원 블랙리스트 문건에 영화인이 70% 이상 포함된 것으로 보아 초기 입안 문건의 연장선상에서 국정원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블랙리스트 조사위는 밝혔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상업영화 15편

블랙리스트에 오른 상업영화 15편 ⓒ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청와대, 국정원, 해외문화원 문서에 나타는 특정영화는 모두 15편이다.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2013년 <변호인>의 이르기까지 반미 및 정부 무능 부각, 종북 세력을 친근한 이미지로 오도, 정치 편향적 작품이라는 점이 블랙리스트에 올린 이유였다.  

문성근-명계남 출연 영화는 투자 배제 

모태펀드는 영화계 탄압의 주요 도구로 활용됐다. 모태펀드는 전체 출자금을 하나의 모(母)펀드로 결성하고, 모(母)펀드를 통해 펀드 운용사가 결성하는 자(子)펀드에 출자하는 방식이다. 2005년 6월 모태펀드 투자관리 전문기관으로 중소기업청 산하 '한국벤처투자(주)(이하 한벤투)'가 설립되었고, 운영사를 선정하기 위한 출자심의위원회가 구성됐다.  

영화투자는 문체부(문화예술진흥기금)와 영진위(영화발전기금)의 투자조합출자사업 예산을 모태펀드 문화계정·영화계정에 출자하면 한벤투가 이 기금을 민간투자금(창투사,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투자, 개인 투자자)과 함께 결성해 영화제작사나 작품에 투자하게 된다.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은 "대중이 쉽게 접하고 무의식중에 좌파 메시지에 동조하게 만드는 좋은 수단인 영화를 중심으로 국민의식 좌경화를 추진"하고 있다며 "건전 문화세력에 대한 전폭적 자금 지원 및 좌파 자금줄 차단"을 제시한다. 이 방향에 따라 민간전문기구로 설립된 한벤투 모태펀드 운영에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이 시작됐다. 신규투자사업 관련 정부에서 예산을 직접 배정함에 따라 한벤투의 조정 권한이 약화되었고, 영화배우 '문성근' 과 '명계남'이 출연하는 영화는 모태펀드 지원에서 배제됐다.  
 
 영화<남영동1985>시사회에서 윤사장 역의 배우 문성근이 취재 중인 기자들을 휴대폰에 달린 카메라로 찍고 있다. 옆자리 명계남 배우

영화<남영동1985>시사회에서 윤사장 역의 배우 문성근이 취재 중인 기자들을 휴대폰에 달린 카메라로 찍고 있다. 옆자리 명계남 배우 ⓒ 이정민


청와대는 2013년 12월 18일 CJ에서 배급한 영화 <변호인>이 흥행에 성공하자 모철민 교문수석에게 영화의 엔딩 자막에 문체부가 투자했다고 나온 것 등을 질책하면서 'CJ에 대한 제재방안을 찾아보라'고 지시한다. 이에 모철민 수석은 문체비서관(김소영)에게 전달하면서 문체부와 영진위가 협의해 관련 대책 마련할 것을 지시한다. 이후 모철민은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모태펀드 개선방안' 및 '건전영화 육성방안' 등에 관하여 보고한다. 

2014년 3월 경 문체부는 '건전영화 육성방안'으로 '전체・12세 이상 관람가 영화에 70% 이상 투자하는 펀드' 사업과 건전애국영화 제작지원 사업 추진한다. 2014년 8월 문체부는 영진위에 건전애국영화 제작지원 사업으로 50억 규모를 편성 지시한다, 이에 영진위는 전체관람가 영화(가족영화)로 20억 편성했고, 2015년 4월 가족영화 제작지원 사업으로 24억 7천만 원을 편성하여 최종 사업으로 공고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정무수석과 신동철 소통비서관 등에게 정무수석 주관으로 각 부처별 보조금 지원실태의 문제점을 점검하는 TF 만들라고 지시한다. 이 TF 활동 결과를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박준태 행정관이 2014년 5월 말 '문제단체 조치내역 및 관리방안'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 내용 중 '3. 모태펀드 관리대책 강구'에서는 문화ㆍ영화 계정에 투자되는 모태펀드가 좌파 문화운동의 자금창구가 되는 사례가 빈번하며, 친노(親盧) 계열과 대기업인 CJㆍ롯데가 문화펀드 운용을 독식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영화 <변호인><부러진 화살><화려한 휴가> 등 정치 편향적인 작품에 투자하고, 창투사인 ㈜유니온투자파트너스, ㈜MVP창업투자, ㈜캐피탈 원 등이 참여정부의 후원으로 급성장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판도라>는 배제, <사선에서>는 지원  
 
 화이트리스트에 올라 지원을 받은 <사선에서>

화이트리스트에 올라 지원을 받은 <사선에서> ⓒ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원전사고를 다룬 영화 <판도라>는 모태펀드 투자가 배제된 대표적인 경우였다. 2015년 상반기 국정원은 영화 <판도라>가 원전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으므로 원전의 안전성을 홍보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으로 청와대에 보고하고, 영화제작 현장을 방문하여 영화의 내용을 문제 삼는다. 국정원이 영화제작에까지 간섭한 것이다. 청와대는 산업자원부에 <판도라>의 내용을 지적하고, 산업자원부 원자력정책과에서는 문체부에 모태펀드 배제를 요청했다. 한벤투는 창투사에 투자에서 배제할 것을 지시한다.

영화 <사선에서>는 화이트리스트로 지원을 받은 경우다. 청와대가 모태펀드 운용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임원을 교체하는 추가 조처 결과 SH 필름 A대표가 2015년 1월 한벤투 상근전문위원으로 임명됐다. A대표가 SH필름에 재직 중 저작권을 갖고 영화 제작을 추진하던 <통영의 딸>이 이후 제작자와 제목을 바꿔 <사선에서>로 제작된다. 

블랙리스트 조사위는 "이 영화는 모태펀드를 포함한 정부지원금이 영화 순제작비 45억 원을 상회하여 51억 7천만 원에 이르는 바, 영화 제작 경위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면서 <사선에서>는 2016년 9월 크랭크인하고, 같은 해 12월 크랭크 업했으나 2018년 5월 현재 미개봉 상태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사선에서> 제작사는 2017년 <한겨레>가 관련 의혹을 제기하자 해명자료를 통해 "총 제작비 예산은 65억 원이며, 그 중 35억 원은 각 세 곳의 투자회사에서 운영하는 모태펀드 계정에서 투자를 받았고, 8억 원은 영진위 가족영화 지원금으로 충당되었으며, 나머지 22억원은 민간 투자금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혔다. 또한 <사선에서>가 기획되기 전에 이미 영진위 가족영화지원사업이 계획, 시작됐으나 영진위 내부 사정이나 가족영화지원사업의 시작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이외 특이사항으로는 국가기관의 지원 지시를 통해 2015년 모태펀드 2차 수시 출자사업에 선정된 유니온투자파트너스가 같은해 영화 <연평해전>, 2016년 <인천상륙작전>과 <사선에서>에 모두 투자한 사실도 확인됐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영화 제작투자에까지 블랙리스트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상대적으로 국뽕 영화들은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던 것이다. 

국정원에 조력했던 영진위 내부자

 영화진흥위원회 블랙리스트 실행 사건에서 주목되는 것은 '채널'의 존재다. 블랙리스트 조사위는 국정원의 지시를 받아 블랙리스트 실행을 전달하고 진행상황을 보고한 영진위 내부자를 채널로 언급하고 있다. 2013년부터 국정원과 영진위 사이에 '상시 채널'이 형성됐다고 밝혔는데, 영진위 직원이지만 사실상 국정원 대리인 역할을 한 셈이다. 

영진위의 한 관계자는 "영진위에 오래 근속 중인 내부 직원이 그간 정보기관과 접촉을 도맡아서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블랙리스트 조사위가 당사자들 불러 조사하기 보다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취합해 내부 채널을 확인한 것 같다고 말했다.

영진위는 블랙리스트 실행 과정에서 청와대 및 문체부의 지시에 따라 문제 사업을 아예 없애거나 변경하기도 했다. 예술영화전용관 지원 사업을 예술영화 유통배급사업으로 변경한 것이 대표적이다. 예술영화전용관이 '문제영화'를 상영한다는 이유로 사업을 개편하면서, 문체부가 '보도지침'까지 하달한 것이라고 블랙리스트 조사위는 지적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 성하훈


문제영화를 상영한 영화관의 지원도 중단했는데, 민간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의 지원이 끊어진 데는 <자가당착 :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상영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영상물등급위가 무리한 등급심의로 제한상영가 등급을 줘서 상영을 막았던 <자가당착>은 지난한 소송과정을 거쳐 승리했고, 대법원 판결 직후인 2015년 1월 인디스페이스 독립영화제인 '으랏차차 독립영화'에서 상영됐다.

청와대는 이를 막고 싶어 했고, 등급분류면제 추천을 취소하는 방안도 고려했으나 제도적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라 영진위 지원(당시 연 5천만 원)을 중단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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