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 어느덧 꽤 지나 2018년이 됐다. 전보다 구시대적인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늘고 있지만 아직 성별에 다른 편견은 여전하다. '남자라면 이래야 한다'거나 '여자라면 자고로 이래야지' 하는 말들이 아직 오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만약 성역할 중 극단적인 고정관념이 뒤집힌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육체미 대회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기준으로 삼는 남성의 큰 근육과 여성의 날씬한 몸매 등을 성별마다 바꿔 적용한 세상을 상상해 본다면. 그런 설정을 담아 남녀 성차별을 고스란히 바꿔 적용한 세계관의 영화가 있다. 바로 2018년 넷플릭스에 공개된 프랑스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원제 I Am Not an Easy Man)>다.

영화에서 주인공 다미앵(빈센트 엘바즈)은 스마트폰 앱 개발 회사에서 근무하는 남성으로, 나름 독특한 발상으로 능력을 인정받는다. '남성이 한 해 동안 섹스한 횟수를 기록한 앱'을 기획해 회사 내부에서 성공적인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유행에 맞고 재미있다"는 칭찬을 듣는다.

퇴근해서는 작가인 친구 크리스토프(피에르 베네지트)의 출간 기념회에 들러 친구의 비서 알렉산드라(마리-소피 페르다느)를 상대로 작업을 건다. 출간 기념회가 끝나고 크리스토프와 길을 나선 다미앵은 거리를 걸으며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자신감에 한껏 취해 여기저기 오가는 여성들을 보며 걷던 도중에...

'쾅!'

미처 앞을 살피지 못한 다미앵은 그만 표지판에 머리를 부딪친다. 쓰러졌다가 일어선 다미앵은 출동한 여성 구급대원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는데... 어딘가 이상하다. 깨어난 다미앵이 본 세상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거꾸로 가는 남자> 스틸 사진

넷플릭스 오리지널 <거꾸로 가는 남자> 스틸 사진. 주인공 다미앵(빈센트 엘바즈, 왼쪽)과 알렉산드라(마리-소피 페르다느, 오른쪽). ⓒ 넷플릭스


사고 후 달라진 세상, 성차별 사회에서 '역할만' 바뀐다면?

표지판 기둥에 머리를 부딪친 다미앵. 구급대원은 그에게 사고 경위를 물어본 후 "복용 중인 약이 있느냐"라고 질문한다. 옆에 있던 친구 크리스토프는 "피임약 먹지?"라고 다미앵에게 묻는다.

다미앵은 친구의 말을 그저 농담이라 생각하고 넘긴다. 쓰러진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보니 어찌 된 일인지 청바지도 평소보다 꽉 낀다. 다미앵이 "살이 쪘나"라며 가랑이가 불편한 바지에 관해 털어놓자 친구 크리스토프는 "거기에 뽕 넣었어? 이제 넣어야 할 나이야"라고 태연하게 대답한다. 남성에게 피임약 복용을 묻고, 바지 안에 체형 보정물을 넣으라고 권하다니. 다미앵은 참 이상한 하루였다는 듯이 심란한 표정으로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도 이상한 일은 이어진다. 다미앵은 사무실에 도착한 이후, 전날 칭찬받았던 앱 개발 아이디어에 관해 '별로'라고 지적을 받는다.

"고객들은 더 여성적인 광고를 원한다고. 네 제안은 너무 섬세해. 그러니까 여자들한테 밀리지."

아이디어를 지적한 사람은 '전날까지 없던 여자 상사'다. 상사를 자세히 살펴보자 이전까지 직급이 높지 않았던 동료다. 사무실에 커피를 내어주러 들어온 비서는 남성이다. 책상 위에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탐폰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여성이 주도권을 가진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용 제품을 눈에 띄는 곳에 진열한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듯이. 마치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성역할만 바뀐 것 같은 상황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받아들이기 힘든 회사 분위기에 다미앵은 그만 뛰쳐나오고 만다. 그런데 길거리에서도 평소와 다른 사건이 계속된다. 지나가던 여성들이 다미앵을 향해 그의 신체를 훑는 시선을 보내며 성희롱을 한다.

집에서 무심코 입고 나온 바지는 엉덩이 부위에 '섹시(HOT)'라고 적혀있다. 술집에서는 누군가 다미앵의 몸을 더듬는 일도 발생한다. 잠자리에서는 다미앵의 가슴 털을 보고서 상대 여성이 "미안한데, 못 하겠어"라며 성관계를 거절한다. 남자가 제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성적 흥분이 가라앉았다며 거부한 것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거꾸로 가는 남자> 스틸 사진

넷플릭스 오리지널 <거꾸로 가는 남자> 스틸 사진 ⓒ 넷플릭스


영화로 보는 '미러링', 마지막 장면이 압권

프랑스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는 영화로 보는 남녀 불평등 사회 '미러링'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주변의 여성들에게 작업을 걸고 성희롱을 일삼던 남성 다미앵이 여성이 주류인 사회로 가서 겪는 일들을 보면 그렇다. 현실에서 여성이 겪던 성희롱과 성범죄, 차별을 남성이 몸소 체험하는 장면들이 영화의 상영시간 1시간 38분 중 대부분을 차지한다.

극 중 남성들이 사회적 차별에 맞서고자 남성주의자 연대를 결성해 시위에 나서는 장면은 어떤가. 거리에 나선 남성들에게 여성들은 "나도 여러분을 사랑한다"거나 "나도 남편과 아들 넷이 있다", "나는 개도 수컷만 키운다"라면서 "우리(여성)는 여러분(남성)의 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현실에서 페미니즘에 관해 발언하는 사람들이 주로 듣곤 하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폭력적인 장면을 거울에 비추면, 거울 속에 비친 풍경도 폭력적인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늘 그래왔기 때문에' 당연한 것처럼 여기던 것이 폭력적이고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거울에 비친 당사자에게 제대로 보여주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도 있다.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에서 굳이 성차별을 두고 '미러링'을 시도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영화 속 장면들, 사회적인 분위기와 행동에서 주어만 바꾼 결과물이 '웃기면서도 슬픈' 이유도 같은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거꾸로 가는 남자> 스틸 사진

넷플릭스 오리지널 <거꾸로 가는 남자> 스틸 사진 ⓒ 넷플릭스


극 중 다미앵은 본인이 작업을 걸던 비서 알렉산드라가 '잘 나가는 작가'가 된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알렉산드라로부터 능글맞은 작업을 당하고, 썸과 연인 사이를 오가다가 '이 여자로부터 버려지면 어쩌지'하는 걱정에 빠지게 된다. 자신이 살아온 것과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여성 알렉산드라를 보면서 다미앵은 회의에 빠진다. 그런 와중에 다미앵은 자신의 처지에 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여성 상위 사회에 순응하자니 도무지 불편하고 화가 나서 참을 수 없고, 불평등에 항의하자니 자신이 살던 마초의 삶을 부정하는 것 같아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가는 남자>에서 가장 압권인 부분은 마지막 장면이다. 남성인 다미앵을 끝내 자신의 애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여성 알렉산드라가 사고로 머리를 부딪힌다. 알렉산드라가 깨어나 구급차 밖으로 나오는데, 그에게는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길가 상점에는 여성이 노출을 한 광고가 걸려 있고 거리에는 페미니스트의 집회에 참가한 여성들이 행진하고 있다. 영화에서 뒤집은 미러링을 다시 뒤집어놓자, 곧 영화 바깥의 현실이 된 것이다.

다소 엉뚱한 설정들로 관객에게 신선한 재미를 주는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는 묵직한 결말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공기처럼 당연하게 생각하던 성역할은 계속 이어져야 마땅한 것들인가? 극 중 포커 게임에서 '퀸(여왕)'이 '킹(왕)'보다 '높은 카드'라 승리를 차지하는 장면의 전율은 성역할의 위계가 미처 알지 못한 사이 우리 일상에 얼마나 스며들었는지 돌아보게 만든다(현실의 포커에선 킹이 퀸보다 '높은 카드'라 이기게 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투' 운동이 벌어지고 백래시가 고개를 드는 오늘날, 한국 사회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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