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방송된 'PD수첩 -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의 한 장면

지난 8일 방송된 'PD수첩 -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의 한 장면 ⓒ MBC


무고한 인명들을 대량 살상해놓고 그 유골들과 동거한 정권이 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학살한 민간인 시신들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않고 땅속에 그냥 밀어 넣어버렸다. 그리고 그 땅을 밟은 채 세상을 지배했다. 살인마가 피해자 유골과 같은 집에서 동거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할 만하다.

지난 8일 방영된 MBC < PD수첩> '민간인 학살, 끝나지 않은 전쟁' 편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 처단'이란 미명 하에 학살된 희생자들의 유골을 보여줬다. 첫 장면은 북한산 입구인 서울 우이동 학살 현장이다. 이곳에서는 지난해 11월 16일 하천 옹벽 공사 중에 6구 이상의 유골이 발견됐다.

한 달 뒤인 12월 12일 현장을 조사한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은 이곳을 민간인 집단 학살현장으로 추정했다. 국군 소총인 M1 칼빈의 탄피만 나왔다는 점, 피살자들이 쪼그린 채 손목이 뒤로 결박돼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이 다른 민간인 학살 현장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우이동 토박이 주민들도 이곳에서 학살이 자행됐다고 증언했다.

전쟁 발발 3일 뒤인 6월 28일 새벽, 이승만 정권의 지시를 받는 국군은 한강교(한강 인도교, 지금의 한강대교)와 광진교를 폭파하고 한강철교의 3분의 1을 파괴했다. 이때 인도교 북쪽에는 4천 명 정도의 피난민이 있었다. 예고 없는 폭파로 500~800명 정도의 사람과 50대 정도의 차량이 강물로 떨어졌다.

시민들을 마구 학살한 이승만 정권

국군이 포기한 서울은 그날부터 9월 28일까지 인민군 수중에 있었다. 그 치하에서 서울 시민들은 공산주의 지지 여부를 떠나 그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민간인들은 군대가 아닌 경찰력도 상대하기 힘들다. 경찰도 상대하기 힘드니, 전시에 군대의 지시를 거부하기는 더욱 더 어렵다. 당연한 말이다.

인민군 치하에서도 소신과 신념을 지킬 수 있는 것 아닌가? 적어도 한국 보수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그들은 국제관계의 현실을 앞세워 강대국에 대한 사대외교를 정당화한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인민군 치하의 현실을 받아들인 민간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 3개월 동안 서울시민들은 인민군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강 다리 폭파로 시민들의 피난길을 차단하고 가장 먼저 도주한 뒤 미군의 힘으로 서울을 되찾은 이승만 정권은 이런 사정을 감안하지 않았다. 적에게 부역했다는 혐의를 씌워 시민들을 마구 학살했다. 그런 식으로 분을 풀었다. 우이동 학살 현장도 그래서 생겨났다.

전쟁 중이니 부역자를 그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그렇게 반문할 수도 있지만, 유골의 상태를 확인해보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발굴된 유골들은 주로 나이든 사람과 어린 아이들의 것이다. 부역자를 처형한다고 하면서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까지 마구잡이로 학살했던 것이다.

설화산 폐금광에서 나온 유골 200여 구

 지난 8일 방송된 'PD수첩 -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의 한 장면

지난 8일 방송된 'PD수첩 -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의 한 장면 ⓒ MBC


< PD수첩>은 우이동에 이어 또 다른 곳을 보여줬다. 올해 2월 발굴된 충남 아산시 학살 현장이다. 이곳 설화산 폐금광에서 유골 200여 구가 나왔다. 여기서도 부역자 처벌이란 명목으로 집단 처형이 이뤄졌다. 하지만 발견된 유골의 95%는 여성과 어린이 것이다. 비녀가 90개 정도 나왔다. 구슬과 장난감도 있었다.

부역자를 처형하던 중에 어쩌다가 무고한 민간인까지 잘못 죽였다기보다는, 무고한 민간인들을 마구 학살하던 중에 어쩌다가 부역자를 죽였다고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여 놓고 빨갱이 혐의를 씌운 것이다. < PD수첩>이 제시한 미군 내부 보고서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한국전쟁 전년도인 1949년 12월 발생한 경북 문경시 석달마을 민간인 학살에 관한 것이다.

"제25연대 소속 부대가 (석달지역 순찰 중에)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을 한 곳에 집결시켜 주민들에게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조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서 일을 저질렀다."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한국민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친일파를 온존시키고 특권층만 우대하는 것도 모자라 남북분단마저 획책했기 때문이다. 민주적·합법적 절차로는 그 도전에 응전할 수 없었던 그들은 빨갱이 처벌이라는 미명 하에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이를 통해 대다수 국민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런 분위기가 한국전쟁 중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인민군뿐 아니라 한국민들과도 싸웠다. 배방읍과 우이동을 비롯한 전국의 학살 현장이 그것을 증명한다. 한국전쟁 전후로 미군과 국군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숫자는 약 100만으로 추정된다. < PD수첩>을 진행하는 한학수 PD는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울에서 최초로 민간인 학살지가 발견됐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한국전쟁 전후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추정 장소는 전국에 168곳, 그중 발굴이 이루어진 것은 단 13곳뿐입니다. 아직 햇빛을 보지 못한 유해들은 어디에 얼마나 더 있는 걸까요?"

가족 9명 잃고 진상 알리려다 2개월 동안 감옥살이까지

 지난 8일 방송된 'PD수첩 -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의 한 장면

지난 8일 방송된 'PD수첩 -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의 한 장면 ⓒ MBC


국민들을 무참히 학살해놓고도 이승만 정권은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다. 이 정권을 계승한 이후의 정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희생자를 빨갱이로 몰아붙이니 유족들이 나설 수도 없었다. 석달마을 학살로 가족 9명을 잃은 채홍락씨는 진상을 알리려다가 박정희 정권 때 반국가행위 혐의로 2개월간 감옥살이까지 했다.

노무현 정부 때 과거사 정리법이 제정되면서 진상규명과 피해배상의 길이 열렸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상황은 원래로 회귀했다. 지급했던 배상금을 도로 빼앗는 일까지 있었다.

채홍락씨도 그런 일을 당했다. 가족 9명의 희생과 채홍락씨의 피해를 감안해 2011년 9월 8일에 대법원은 18억 25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피해자 10명에 대해 18억이 배상된 것이니, 그것도 60년이 넘어서 배상된 것이니 적정 수준에 미달되는 액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달 9월 26일, 이명박 대통령과 코드가 비슷한 양승태 대법원장이 임명됐다. 이걸 계기로 상황이 반전됐다. 이명박 정부는 대법원에 상고했고, 2015년 9월 대법원은 배상액을 4억 6천만 원으로 깎았다. 피해자 10명에 대해 4억 6천만 원만 주면 된다고 판결한 것이다. 나머지 금액을 반환하는 것에 더해 지연이자까지 지급하라고 법원은 명령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그리고 이들을 계승한 정권들이 얼마나 파렴치한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종래에 민간인 학살 현장은 서울 외의 지역에서만 발견됐다. 우이동 현장은 서울에서 발견된 최초의 학살지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런데 우리가 좀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미 예전에 다른 곳이 최초 발견 장소가 됐을 수도 있다. < PD수첩>과의 인터뷰에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 지역은 (인민군이) 3개월간 통치했기 때문에, 인민군 통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오래 됐어요. 그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에 협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학살이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어요. 서울 수복 그 이후로요."

"불광동이나 응암동 지역은 (유해가) 많이 나와요"

민간인 학살은 전국적으로 일어났지만, 서울에서 특히 많이 발생했다. 고층 빌딩들이 쑥쑥 솟아 있는 서울 시내 곳곳의 땅 밑에 유골들이 묻혀 있는 것이다. 우이동 현장 근처에도 또 다른 집단 매장지가 있다는 주민의 증언이 있었다. 우이동에서 유해를 발견한 공사 관계자는 < PD수첩>과 인터뷰에서, 다른 공사장에서도 유사한 일을 겪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공사할 때) 불광동이나 응암동 지역은 (유해가) 많이 나와요. 계급장도 많이 나왔어요. 옛날엔 (유해 발견) 신고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안 했지. 사과 상자 주워다가 태워서 술 한 잔 붓고 제사 지내곤 했고요."

서울에서 학살이 특히 많았으므로, 서울 땅 밑에 유골이 많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서울에서 이승만 정권과 그 계승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한민국을 지배했다. 자기가 살해한 사람의 유골을 집안에 두는 것도 모자라 침대 밑에 방치한 채 먹고 자는 살인마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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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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