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뮤지컬 <닥터 지바고>가 지난 7일, 6년 만에 돌아와 약 3개월간의 대장정을 마무리 지었다.

<닥터 지바고>는 초연 때도 커다란 흥행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번 재연 역시 대단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시적인 가사를 통해 특유의 문학성과 작품성을 가미한 <닥터 지바고>는 마니아층을 탄탄하게 형성했다.

이번 프로덕션이 보여줬던 변화들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이번 시즌의 변화

혁명 속에 꽃 핀 사랑, 뮤지컬 <닥터 지바고> 지난 2월 27일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지난 7일에 폐막한 뮤지컬 <닥터 지바고>의 공연 사진. 3월 6일 프레스콜 현장에서 시연된 장면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입양된 가정에서 의사이자 시인으로 자란 지바고는, 안정된 가정을 새로 꾸리지만 자신의 결혼식장에서 코바롭스키에게 총구를 겨눈 낯선 여자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의 노래가 시작된다.

ⓒ 곽우신


<닥터 지바고>(아래 <지바고>)가 오마 샤리프 주연의 영화를 제외하고 큰 흥행을 거두지 못한 것은 작품을 아끼는 관객으로서 아쉬운 사실이지만, 실제 작품을 분석했을 때 이는 흥행하기에 실로 비-대중적인 코드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지바고>는 유리 지바고가 주인공이기는 하다만, 딱히 지바고의 심리를 중심으로 극을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연은 매 시즌마다 연출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진다. 초연 <지바고>에 비해 재연 <지바고>는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요소들을 넣었다. 우선 유리 지바고가 '주인공'인 데에 초점을 맞췄다. 초연 <지바고>는 극의 흐름을 이끄는 게 혁명이라는 시대적 흐름이라고 했을 때, 재연 <지바고>는 지바고의 심리 그리고 라라와의 사랑이 극을 진행하는 핵심 요소가 됐다. 시대 전체를 봐야하는 초연보다, 재연은 관객들로 하여금 몰입할 수 있는 사랑을, 그리고 강력한 갈등을 부여했다.

<지바고>의 인물들은 모두 상징성을 지닌다. 특히 라라를 사랑하는 세 남성 지바고-파샤-빅토르가 각각 현재-미래-과거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빅토르를 비롯한 극 중 '부르주아' 캐릭터는 지바고를 제외하고 죄다 과거, 역사(100년 전 나폴레옹 군대를 때려 부순 전쟁을 이야기하는 알렉스나 지바고 아버지의 무공 훈장을 이야기하는 빅토르), 혹은 과거 지향성을 보여준다. 이는 빅토르의 1막 후반 부분의 솔로곡에서 혹은 'Love finds you'에서 드러난다. 빅토르는 '불타버린 도시'의 과거를 노래하고, '떨치려 해도' '아직 지나간 그림자를 쫓'는 인물이다.

반면 파샤는 어떠한가. 마르크스의 철학, 미래, 혁명을 이야기한다. 그런 그의 태도는 가사에서도 강하게 드러난다. 'Love finds you'에서 그는 군인으로서 해야 '할' 것들을 선언한다. 또한 자신들의 힘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기록할지, 세상을 향해 지켜보라고 하는 파샤의 가치는 다가올 미래를 향해 있다.

<지바고>는 생명, 현재성, 사랑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각자 상징하는 바가 명확한 세 남성 인물들의 관계도를 보면 <지바고>는 현재를 강조하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들은 모두 이어져 있다. 다시 말해,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그들은 어느 누가 우월하거나 열등한 위치에 놓이지 않는다. 다만 <지바고>는 시간을 현재성의 총체 정도로 해석하는 듯하다. <지바고>는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현재' 극 중 넘버의 제목이기도 한 'Now'를 가장 강조했다. 'Love finds you'도 'found'가 아니라 현재 시제, 'finds'다. 현재는 생명과 이어진다. 생명은 매 순간 재생되고, 태어나며 죽어간다. 생명은 죽음을 반드시 동반하고, 죽음이 없는 삶은 그 의미를 잃는다.

변화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혁명 속에 꽃 핀 사랑, 뮤지컬 <닥터 지바고> 지난 2월 27일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지난 7일에 폐막한 뮤지컬 <닥터 지바고>의 공연 사진. 3월 6일 프레스콜 현장에서 시연된 장면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입양된 가정에서 의사이자 시인으로 자란 지바고는, 안정된 가정을 새로 꾸리지만 자신의 결혼식장에서 코바롭스키에게 총구를 겨눈 낯선 여자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의 노래가 시작된다.

ⓒ 곽우신


연출적인 변화를 크게 시도하는 극들은 그에 따라 초연과 비교 되며 아쉬운 점으로 토로되거나, 혹은 비판받는다. 때로는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관객들의 머릿속에 초연 버전이 굳어버려져서 이기도 하지만, 정말로 극의 강점이 사라져버린 경우도 있다. <지바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극의 초점이 지바고의 내면과 라라와의 사랑에 맞춰지면서, 시대에 대한 묘사는 줄었다. 미니멀리즘과 영상을 적극 사용한 재연 무대는 나름의 매력이 있었지만, 초연 무대에 비해서 아쉬웠다. 영상은 인물들의 심리를 보여주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그 당시 시대의 현실적인 묘사는 아무래도 실제 세트에 비해 부족했다.

또한 지바고와 라라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 특히 지바고의 아내인 토냐와 라라의 남편인 파샤의 비중이 지나치게 줄었다. 토냐와 지바고와 라라가 함께 부르던 삼중창 곡과 토냐가 지바고를 떠나며 부르던 'Watch the moon Reprise'는 통으로 사라졌다. 파샤는 1막에선 분량이 늘었지만 2막에서 설득력을 잃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뒤 '목숨이 아홉개 달린 고양이'답게 도망쳐 나와, 라라가 떠나고 지바고만 남은 집에 도착하여 지바고와 나누던 대화 장면이 사라졌다. 라라와 결혼식을 올리던 웨딩 보우와 '신의 선물'의 2절(무려 라라를 사랑하여 가사 노동은 물론이고 대신 아이까지 낳겠다고 노래하는 대목)도 사라졌다.

파샤의 삭제된 분량은 대부분 파샤가 라라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대목들이었다. 그리하여 파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파샤는 더욱 강력한 '악역'이 됐다. 사랑이 삶이고 긍정이며, 혁명은 죽음이고 부정으로 해석된 이번 시즌에서 사랑이 생략된 파샤는 명확한 악역으로 비춰진다. 파샤는 라라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근거가 불충분하다. 그의 대사는 사랑을 말해도, 행동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가 3시간 동안 사랑한 것은 혁명이다. 결혼식 내내 혁명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한다. 받은 선물 중 제일 소중한 건 라라라고 하지만, 결혼식 다음날 정치적 이유를 들어 전쟁터로 떠난다.

그 후 'When the music played'에서는 라라의 고백에 '부르주아 개새끼들'이라며 계급적인 분노만을 보여준 채 뛰어 나간다. 전쟁터에 나가서도 조직 생각뿐이다. 초연의 파샤는 결혼식 이후 유리아틴으로 이사하여 라라와 신혼 생활을 할 예정이었다. 결혼 생활 도중 전쟁에 입대한 것이다. '목숨이 아홉 개 달린 고양이' 대사도 훨씬 설득력 있었다. 최전방에서 혁명을 조직하는 데 매진했던 재연 파샤와는 다르게, 초연 파샤는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독일군 공격 때 실종됐다가도 탈출한다. 그리고 우연히 기차에 올라탔는데 거기서 얀코의 시체를 보고 'Blood on the snow' 때 그 피로 적신 완장을 맸다. 초연의 파샤가 스트렐니코프로 변화하는 과정은 캐릭터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파샤와 얀코의 연결 고리도 초연 때가 더 강했다. 얀코는 지바고와 라라의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인데, 사실 어느 측면에서 보면 파샤도 그렇다. 파샤가 전쟁에 나가지만 않았어도 혹은 편지만 잘 보냈어도 라라는 전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바고와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파샤가 지바고와 라라를 이어준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채 못하고 집을 떠난 파샤, 얀코의 피로 제 천을 적시며 완장을 차는 파샤…. 완장을 차는 장면은 이번 시즌에도 존재하지만, 그 이전에 사령관을 사살하는 파샤의 이미지가 너무 강력하여 임팩트가 줄었다. 얀코의 피로 제 천을 적시는 과정은 파샤가 파샤로서의 죽음 그리고 스트렐니코프로 다시 태어남을 보여줬다.

전형적인 혁명가로서의 모습만이 강조된 파샤의 라라에 대한 사랑은 뜬금없다. 'Love finds you'의 가사 "넌 악몽처럼 잔인하게 조롱하지 저주로"가 그렇다. 사랑을 악몽, 잔인, 조롱으로 묘사하는 것은 지바고와 라라와는 대조되고, 그의 사랑을 넘어선 애증을 보여주는 가사다. 그래도 자신이 사랑한 이가 당한 구조적 폭력 때문에 '올바른 세상'을 주기 위해 평생을 혁명을 했다고 했는데(이 점도 다소 의아하다. 파샤는 이미 그 전부터 혁명가였다) 라라의 고백을 듣고 애증으로 바뀌었을까. 이는 파샤가 라라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는 전제가 붙어야만 '그 세월동안 서로 힘든 결혼 생활을 하며 사이가 악화 됐으리라'고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최소한 전쟁터에 바로 나온 파샤보다는.

또한 파샤와 지바고와 관계도 그랬다. 초연 <지바고>의 갈등 양상은 명확하지 않았다. 지바고는 그 시대 혁명기를 살았던, 다만 그것을 기록했던 캐릭터다. 물론 지바고와 파샤의 관계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극의 중추가 되는 갈등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었다. 허나 재연 <지바고>에서는 지바고라는 개인과 혁명이라는 시대가 갈등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파샤가 떠맡는 갈등적 양상이 더욱 추가됐다. 파샤는 극 중에서 혁명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래 존재했던 지바고-파샤의 대화 장면이 삭제됐다. 이 장면은 파샤의 라라에 대한 사랑과 애증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또한 우유부단했지만 자신 속의 모순을 발견한 지바고가 "죗값도 수치도 달게 받으리라"라고 성장하며 제 안의 '죽음' '악'을 끌어안은 후 파샤를 대면하기에 인상 깊었다. 또한 '목숨이 아홉 개 달린 고양이'로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것을 회피해왔던 파샤가 지바고의 시 '벼랑 끝의 시간에'서 라라를 보고 머리에 총을 겨누며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은 생명력이 폭발하는 장면이었다. 마치 불타는 두 눈으로 빅토르를 쏘던 라라처럼.

재연 <지바고>에서 개인과 시대의 갈등을 키울 의도였다면, 지바고-파샤 대화 장면을 유지하고 그 갈등에 강조점을 찍었어야 했다. 하다못해 나이브한 해석이라도 했어야 했다. 그래야 파샤의 죽음도 덜 허무하고, 지바고의 변화 모습도 명확히 보여줄 수 있으니까.

재연 <지바고>가 놓친 것들

혁명 속에 꽃 핀 사랑, 뮤지컬 <닥터 지바고> 지난 2월 27일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지난 7일에 폐막한 뮤지컬 <닥터 지바고>의 공연 사진. 3월 6일 프레스콜 현장에서 시연된 장면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입양된 가정에서 의사이자 시인으로 자란 지바고는, 안정된 가정을 새로 꾸리지만 자신의 결혼식장에서 코바롭스키에게 총구를 겨눈 낯선 여자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의 노래가 시작된다.

ⓒ 곽우신


혁명을 다루는 태도도 아쉽다. 우선 재연 <지바고>는 시대상이 드러나는 곡들을 대거 삭제했다. 극의 첫 시작도 바뀌었다. 원래 <지바고>의 시작은 역설적이게도 장례식 장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죽음 속에서 시작이 이뤄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On the Edge of Time'의 배경 또한 장례식이라는 점으로 이어졌다. <지바고>는 그 두 개의 갈라진 세상을 강조하는 극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재연 <지바고>는 'Two Worlds'의 시작에 앞서 'On the Edge of Time'을 두 사람이 짧게 부르는 것으로 막을 열었다. 강조점이 달라졌다. '혁명 속의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슬로건은 '(혁명) 속의 운명적인 <사랑>'정도로 탈바꿈 한다.

<지바고>는 삶을 보여주는 극이다. <지바고>는 정말 많은 앙상블이 단역일지라도 이름을 가지고, 캐릭터로 부각된다.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바고와 라라가 운명적인 사랑을 했기에 위대하고,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의 사랑을 전개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다른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죽음과 삶이 오가는 혁명 속에서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이 탄생했다, 두 개의 다른 세상, 각기 다른 편에 속했지만 그 세계 둘을 이을 수 있는 하나의 사랑. 그러나 재연 <지바고>에서는 'Two Worlds'가 희석되고 시대와 혁명이라는 역경이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보인다. 다른 인물들은 지바고와 라라의 '주변 인물'로 전락하는 셈이다.

그 속에서 '라일락 피던 그 곳'으로 전환된 넘버 'Something in the air'의 유실도 안타깝다. '라일락 피던 그 곳'은 '집'을 노래하는, 다시 말해 돌아갈 수 있는 어떤 근원, 극에서 그것을 찾는다면 아마 사랑이나 생명일 것이다. 허나 'Something in the air'는 태어나는 생명, 사랑, 그리고 혁명을 모두 노래하는 곡이었다. 초연 <지바고>에서 그 세 가지 가치는 모두 조응했다. 그러나 재연 <지바고>에서 '집'이나 '사랑'의 가치는, 어지러운 전쟁이나 혁명을 모두 부정적인 것으로, 폭력적인 것으로 판단한 채 그것들을 '회피'하고 돌아갈 수 있는 것으로 읽힌다.

<지바고>가 얘기하는 것은 회피가 아니다. 지바고가 문학으로 '회피'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는 늘 곁에서 시대를 관찰하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우리 삶의 조건을, 우리의 악을, 위선과 모순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은 빅토르나 리베리우스와 다른 선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악인으로, 자신을 포로나 약자로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과 하는 일이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바고는 'Ashes and Tears'에서 변한다. 죗값을 달게 받으리라고 노래한다. 그것이 <지바고>에서 이야기하는 삶의 가치이다. 그리고 이 '긍정'이 존재하기에, 그 이전에 지바고가 저지른 죄도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시대와 혁명이라는 역경. 이것은 지바고와 라라의 갈등 대상이다. 개인적 감정의 갈등에서 거대한 사회와의 갈등이 됐을 때, 혁명은 부정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다. '자비는 없다'를 부르는 파샤와 맞물려, 혁명은 주인공인 지바고의 삶마저 빼앗아 갈 수 있는 '죽음'과 '악'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실제 그로메코 가문의 사람들의 대화를 보자. 그들은 혁명 이후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졌다 불평하며 이것이 '공평'인가에 대해 말한다. 지바고에게 시를 쓰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삶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때, 혁명은 그 자체로 거대한 악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야 지바고의 선과 같은 '순결함'이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죽음' '혁명' 파샤'가 악이고, 지바고를 비롯한 지바고와 친밀한 관계의 인물들이 선인가 질문한다면 그 답은 쉽지 않다. 안나가 추억하는 일곱 코스의 만찬, 그 시대에 파샤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 노동자들은 굶주리고 전쟁터에 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누리던 안락함이 누군가의 착취로 이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거리의 누군가는 죽어갈 때에 그들은 열 세 가구나 거주할 수 있는 저택에 살았다.

지바고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인물인가. 사실 '닥터 지바고'는 작가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의 페르소나다. 그는 부르주아 지식인이었다. 어쨌든 그는 'Two Worlds'에서 '선택 받은 자'이고 '구원의 손길'을 받은 자다. 그는 노벨상을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혁명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소련 정부에 의해 수상 포기를 종용받았다. 그러나 부르주아가 기록하는 노동자 혁명을 오롯이 신뢰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혁명 속에 꽃 핀 사랑, 뮤지컬 <닥터 지바고> 지난 2월 27일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지난 7일에 폐막한 뮤지컬 <닥터 지바고>의 공연 사진. 3월 6일 프레스콜 현장에서 시연된 장면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입양된 가정에서 의사이자 시인으로 자란 지바고는, 안정된 가정을 새로 꾸리지만 자신의 결혼식장에서 코바롭스키에게 총구를 겨눈 낯선 여자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의 노래가 시작된다.

ⓒ 곽우신


지바고는 우유부단하고 변명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산다. 빅토르를 비난하지만, 그는 살아남기 위해 작가 위원회에서 빅토르의 조언을 받아들인다. 지바고는 스트렐니코프 앞에서 혁명을 비판하다가도 목숨이 위협 받을 때에는 입을 다문다. 그는 '정치적이지 않은' 시를 씀으로서 '탈정치'라는 '정치'를 해냈고, 이는 결국 시대에 대한 회피 혹은 방관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그가 온전한 선인가. 아니, 그보다 앞서 왜 이렇게 선과 악에 집착하는가. 지바고의 삶의 가치는 지바고가 선인이라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러다보니 재연 <지바고>는 훌륭한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자가당착에 부딪혔다. 인간은 절대 선도 절대 악도 될 수 없다. 저마다 나름의 동기가 있고 그것은 각자의 선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악이 될지라도 말이다. 이 극은 등장인물들을 선인과 악인으로 이분화해서는 안됐다. 선과 악의 분류법이 등장하는 순간 이는 이분법, 즉 'Two Worlds'의 재생산이다. 이는 각각 (죽음을 배제한) 삶과 죽음으로 대응됐다. 인류 역사의 아주 오래된 'Two Worlds'였다. 죽음을 뛰어 넘는, 시간의 끝을 함께 하는, 영원한 사랑을 하려면 일단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지바고의 시가 결국 극 중에서 울려 퍼진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무덤이었다.

문학적 윤리, 그리고 삶

혁명 속에 꽃 핀 사랑, 뮤지컬 <닥터 지바고> 지난 2월 27일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지난 7일에 폐막한 뮤지컬 <닥터 지바고>의 공연 사진. 3월 6일 프레스콜 현장에서 시연된 장면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입양된 가정에서 의사이자 시인으로 자란 지바고는, 안정된 가정을 새로 꾸리지만 자신의 결혼식장에서 코바롭스키에게 총구를 겨눈 낯선 여자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의 노래가 시작된다.

ⓒ 곽우신


문학 비평가 김현은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후략)"라며 문학적 윤리를 강조했다.

앞서 언급했듯 지바고는 회피 혹은 방관의 인물이다. 문학은 종종, 현실을 회피한다.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를 생각해보자. 부끄러움의 정서라고는 하지만, 그는 궁극적으로 회피하고 방관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자기 연민으로 시를 지었다. 문학이 배고픈 거지를 구할 수는 없다. 의사로서 지바고는 구할 수 있었어도 시인으로서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그저 사랑과 삶을 문학으로 옮겨냈다.

허나 극에서 강조되는 것은 의사 지바고가 아닌 시인 지바고였다. 그의 사랑과 삶이 문학으로 타인의 삶으로 옮겨질 수 있던 것이다. 이는 현재성으로 이어진다. 그 속에서 러시아 사람들은 공감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인간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지 않았을까. 마찬가지로 공연을 보는 관객들도 그러하다. <지바고>는 소설 작품이 원작인 만큼, 공연 예술임에도 문학적 성격을 많이 지닌다. <지바고>는 이번 연출에서 아쉬운 점을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인간에 대한 깊고 총체적인 무언가를 많이 담아낸 텍스트다.

이 뮤지컬이 다시 공연되리라곤 확신할 수 없겠다. 하지만 그래도, 이 작품이 6년 만에 귀환했듯 언젠간 다시 삼연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작품 본연의 아름다움은 유지하되, 재연의 아쉬움은 보완하여, 더욱 좋은 작품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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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 해외 관극도 함께하며, 잘 만든 서사를 기다리는 중.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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