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서툴지만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성공조차도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했다. 계속해서 비범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장들의 첫 영화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을까? 그래서 현재 생존해있는 70세가 넘은 거장들의 첫 영화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들은 과연 떡잎부터 달랐을까? - 기자 말

 <그 남자 흉폭하다>(1989) 영화 포스터

<그 남자 흉폭하다>(1989) 영화 포스터 ⓒ 쇼치쿠후지


1947년 도쿄에서 태어난 기타노 다케시는 개그맨, 영화배우, 영화감독, 화가, 조각가, 작가까지 종합예술인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만큼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고만고만하게 이것저것 적당히가 아니라 개그맨으로서도 영화감독으로서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개그맨으로 연예계 일을 시작한 그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천재 만담꾼이 나타났다고 했다. 하지만 대중들의 환호 뒤에는 비난의 그림자도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때로 과격하고 듣기에 불편했던 것이다. 그는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고 명예는 바닥을 쳤다.

영화 <배틀 로얄>로 유명한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제안으로 영화 연출을 한다고 했을 때 일본 대중은 '개그맨이 영화감독을 한다고?'라고 얕잡아 보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의 첫 연출작이자 주연작인 <그 남자 흉폭하다>는 영화감독으로서 화려한 데뷔작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인간의 폭력성에 대비를 이루는 싱거운 유머'의 데뷔를 볼 수 있다는 데에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유능하지도 부패하지도 않은 경찰

과묵한 성격의 형사 아즈마가 신입 형사 가쿠찌와 함께 마약 밀매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을 담은 <그 남자 흉폭하다>는 이야기가 촘촘하게 잘 짜인 영화는 아니다. 1989년이라는 제작 시기를 고려해 보아도 미장센은 단조롭고 폭력의 정도에 비해 액션은 심심하다.

 <그 남자 흉폭하다>의 한 장면

<그 남자 흉폭하다>의 한 장면 ⓒ 쇼치쿠후지


십대 소년들이 재미 삼아 노숙자를 폭행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소년들은 폭력 조직단의 문제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중산층의 아이들이다.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괴롭히는 것에서 이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이들에게 폭력은 목적도 이유도 없는 단지 유희일 뿐이다.

유치원생들이 다리 아래를 지나가는 배 위로 깡통을 던지며 "바보!"라고 외친다. 이 아이들을 붙잡고 "왜 그랬어?"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그냥 재밌어서요"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깡패가 될 수도 있고 경찰이 될 수도 있고 총기 밀수업자가 될 수도 있다. 영화의 큰 줄기를 이루는 마약 밀매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이 이들의 미래라고 하는 것은 억지겠지만 폭력성이 그 심각성을 자각하기도 전에 이미 인간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감독은 아이들을 통해 전달한다. 아이들이 깡통을 던지고 뛰어가는 길에서부터 아즈마가 터벅터벅 걸어온다.

아즈마는 용의자들을 대할 때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형사다. 무표정한 얼굴, 살짝 기울어진 어깨,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게의 중심이 온전히 내딛는 발에 실려 무언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걸음걸이는 아즈마의 캐릭터이자 비트 다케시(기타노 다케시가 연기자로 활동할 때 쓰는 이름)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하다.

자신의 폭력적인 성향 때문에 아즈마는 상사의 꾸지람을 듣고 시말서를 쓰기도 하지만 그는 거기에 대해 그 어떤 변명이 없다. 전혀 개의치 않으며 고칠 생각도 없어 보인다. 가끔 미소 지어 보일 뿐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간혹 쓸데없는 농담이나 하는 과묵한 그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객은 알아채기가 어렵다.

유능한 혹은 승진으로 부패한 경찰은 돈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지만 아즈마는 유능한 경찰도 부패한 경찰도 아니다. (부패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청렴결백, 정직한 경찰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여동생이라는 약점이 있다. 정신병원에서 갓 퇴원한 백치에 가까운 여동생은 누가 봐도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왜 아픈지 어떻게 아픈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케시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으면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가 가족"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식으로도 책임이 요구되고 그 책임을 거부했을 때 죄책감을 갖게 되는 게 가족이지만 영화에서 아즈마는 나름의 방식으로 여동생을 성의껏 돌본다.

 <그 남자 흉폭하다>의 한 장면

<그 남자 흉폭하다>의 한 장면 ⓒ 쇼치쿠후지


수사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영화는 살인을 즐기는 사이코패스로 묘사된 키요히로와 아즈마 형사 간의 대결로 좁혀지는데 결국 두 사람은 파국을 맞게 되고 범죄의 빈자리는 새로운 인물들로 채워지게 된다. 폭력과 비리의 세계는 주인공을 달리해서 계속해서 지켜지는 것이다. 범죄자의 폭력과 형사의 폭력에 차이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들은 많다.

과연 경찰은 '정의'를 대변하는가? <그 남자 흉폭하다>는 그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아니지만 뫼비우스의 띠 혹은 동전의 양면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범죄자와 형사의 관계에 영화는 냉소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아즈마는 냉혈한이 아니다. 동료의 죽음에 분노하고 여동생을 향한 조롱에 발끈하지만 그의 변화 없는 표정은 그의 감정을 숨긴다. 텅 빈 얼굴로 하염없이 바다를 보는 여동생을 볼 때도, 여동생과 잠자리를 가지고 나가는 남자를 대할 때도, 동료 형사 이와키의 비리 사실을 알게 됐을 때도, 폭력 수사로 해고를 당할 때도, 키요히로의 보스를 찾아갔을 때도, 키요히로에게 마지막 총을 겨눌 때도,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이것은 배우로서 다케시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의 이런 특징은 오토바이 사고 후에 한쪽 얼굴이 마비되고 더 강화된다.) '악'에 동요되지 않는 아즈마를 통해 세상에 대해 냉소적인 그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남자 흉폭하다>의 한 장면

<그 남자 흉폭하다>의 한 장면 ⓒ 쇼치쿠후지


다케시는 인물의 클로즈업을 '정지화면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난히 길게 잡는다. 인물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관객의 순간적 몰입을 유도하는 클로즈업이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극의 흐름에 쉼표를 찍고, 화면 밖의 상황을 지워버리는 역할을 한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아즈마의 얼굴이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화가 난건지 평온한 건지, 극의 흐름을 떠나 그의 표정에 대한 해석은 온전히 관객의 것이 된다.

경찰에서 해고되고 아즈마가 향한 곳은 엉뚱하게도 미술 전시회다. 샤갈의 그림을 보면서 일 없는 하루를 보낸다. 그의 평화로운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여동생은 치욕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녀의 육체가 영혼이 빠져나간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폭풍이 오기 전 고요한 시간이 지나고 아즈마와 키요히로가 마주했을 때, 관객은 누구에게도 감정적인 이입을 하지 않고 거리를 둔 채 이들의 마지막을 지켜보게 된다.

다케시처럼 본인이 주연과 연출을 함께 맡는 감독들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가 맡는 인물들은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 모두 한 사람이 아닌가 싶을 만큼 닮아있는데 그런 면에서 미국의 우디 앨런과 비교되기도 한다. 미숙하기는 하지만 그는 첫 연출작에서부터 자신의 색을 분명히 한다. <그 남자 흉폭하다>는 최고의 개그맨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워줄만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후에 나온 영화들은(주로 90년대) 다케시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본 영화를 이야기 할 때 늘 언급하는 영화들이 됐고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이자 거장이 됐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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