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계속 변하는데요. 처음에는 '로키'의 시원함이 너무 좋았어요. 그 다음에는 '루시퍼' 되게 좋아했고…. 메인 에피소드이기도 하고, 제가 제일 잘 끌어갈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해서 좋아했고요. 또, 어느 순간부터 '빈디치'를 굉장히 사랑하게 됐어요. '빈디치'에 나오는 그 프랭크 두스 개새끼(웃음) 그 짧은 세 번의 등장에 시간 경과를 훅훅훅 보여줘야 하는 게, 장르물스럽기도 했어요. 관객들이 느끼기에 머리 색깔 제외하고 분장 없이 연륜을 느끼기를 바랐어요. 고 재미가 아주 쏠쏠해요, 배우로서는.

인물 멀티가 되게 재밌어요. 아예 다른 인물이 들어와서 속이는 '로키'도 신선하고 재미있지만, 한 인물이 변해가는 과정을 눈앞에 보여주면서, 마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변해가는 모습처럼 표현하는 게 되게 좋았어요. 눈에 띄는 움직임이라든지, 얼굴에 주름이라든지…. 그 중간에 있는 단계에서도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는 늙게, 움직임은 좀 둔해지고, 관절이 어딘가 안 좋아지기 시작할 테니까 그때부터는 바깥으로 꺾이기 시작하고, 이 이후로는 허리가 안 구부러질 테니까 무언가를 해줘야 하고…. 이런 계획하는 재미가 '빈디치'는 굉장히 많았어요. 그게 되게 재밌었는데,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또 다시 '로키'가 보이더라고요. 저한테는 회전문이에요. 좋아하는 회전문."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아래 <카포네>)는 '로키', '루시퍼', '빈디치' 세 에피소드로 구성된 삼부작 연극이다. 제스로 컴튼의 원작을 지이선 작가과 김태형 연출이 호흡을 맞춰서 새롭게 각색하고 재구성했다. 2015년 초연부터 입소문을 탄 이 작품은 어느덧 세 번째 시즌을 맞이했다. 어떤 작품이 계속해서 대학로에 올라온다는 건, 그만큼 호출하는 관객들이 많다는 뜻이다.

미국 시카고의 밤을 알 카포네가 지배하던 시절의 이야기에 왜 관객은 그토록 환호하는 걸까. 다양한 대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이 대본을 훌륭하게 무대 위에 실체화시켜준 배우들의 힘이다. 특히 초연부터 이번 삼연까지 개근하고 있는 배우 이석준의 연륜을 무시할 수 없다. 베테랑 연기자인 그는 초연 때부터 윤나무-김지현 배우와 호흡을 맞추며 '이윤지'라는 이름의 페어를 정착시켰다. '지탱극'이라는 말의 창시자이자 '이윤지'의 최고 선배인 이석준에게, <카포네>는 지이선-김태형과의 인연 그리고 윤나무-김지현이라는 좋은 팀을 만나게 해준 작품이다. 그의 말을 지난 4월 7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들어보았다.

[로키] "평생 거짓말 할 운명이네요"

<카포네 트릴로지>의 이석준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에 출연 중인 배우 이석준의 공연 및 콘셉트 이미지 사진. <카포네 트릴로지>는 2015년 초연 이후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으로 이번이 세 번째 공연이다. 초연부터 함께해 온 배우 이석준은 관록의 연기를 선보이며 극의 중심을 잡는다.

▲ 광대들의 정체 “롤라의 자아죠. 자기 생각 속에서, 되고 싶은 자아일 수도 있고, 예를 들면, 악마와 천사일 수도 있고, 자기가 해보지 못했던 생각을 대변해주는 이들일 수도 있고….” ⓒ 아이엠컬처


'올드맨', '영맨', '레이디' 중 레이디가 주인공인 '로키'는 쇼걸 '롤라 킨'의 이야기이다. 1923년, 시카고 렉싱턴 호텔 661호에서 롤라 킨은 약과 술에 취해 잠들어 있다. 그러던 롤라에게 갑자기 낯선 두 사람이 찾아온다. 빨간 코의 분장을 하고 멜빵바지를 입은 광대들. 두 광대의 정체를 묻는 롤라에게, 그들은 명확한 답을 하지 않는다. 다만 "추상적인 콘셉트", "그로테스크한 상징", "당신의 인생을 의인화한 오브제"라고 설명한다.

"맨 마지막 대사를 올드맨만 하거든요. '어디로 나갈 거죠?' '그거 입고 나갈 거예요?' '평생 거짓말할 운명이네요'라고 얘기하잖아요. 빨간 코의 올드맨만 첫 대사로 이 여자한테 계속 자극을 줘요. 그런 걸 보면, 이 여자가 뱉기 싫어하는 말을 뱉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아요. 신기하게도 이 여자에게 중요한 자극을 주는 멘트들이 빨간 코를 한 올드맨에게 묶여있다는 건, 이 여자가 내적으로만 생각했지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속마음이라고 생각했어요. 영맨은 이 여자의 긍정적인 면처럼 느껴졌고요. 이 상황을 꼬이지만 즐겁게 풀어가려고 하는 자극제로 받아들였어요."

'로키'는 세 에피소드 중 가장 유쾌한 극이다. 기본적으로 코미디라는 장르에 충실하다. 롤라를 제외한 나머지 두 배우는 계속해서 퀵체인지를 하며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다. 이탈리아 출신 잘생긴 남자이기도 했다가, 숫자를 섬기는 회계사였다가, 성실하고 띄엄띄엄한 벨보이이기도 하다. 롤라가 겪었던 일들을 재현해가는 과정에서, 롤라는 기억해낸다. 자기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누구를 죽였는지. 그리고 깨닫는다. 이 방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카포네 트릴로지>의 이석준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에 출연 중인 배우 이석준의 공연 및 콘셉트 이미지 사진. <카포네 트릴로지>는 2015년 초연 이후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으로 이번이 세 번째 공연이다. 초연부터 함께해 온 배우 이석준은 관록의 연기를 선보이며 극의 중심을 잡는다.

▲ 로키에서 힘든 점 “없어요. 로키는 그냥 몸이 힘듭니다. (웃음) 맨 마지막에 박수를 치고, 마지막 춤을 딱 추러 들어가는 순간에 그 전체 갈증이 다 해소되는 게 있어요. 로키를 끝내면서 커튼콜하고, 문을 열고 롤라가 딱 들어왔을 때 관객들에게 환호 받는 걸 느끼면, 진짜로 피로한 걸 잘 모르겠어요.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 아이엠컬처


"사실 굉장히 '웃픈' 얘기들이잖아요. 원래 그랬어요. 코미디는 남의 비극을 볼 때 생긴다고. 한계치까지 몰아가는 극한의 고통을 캐리커처처럼 형상화시킨 게 이 작품의 매력이죠. 저희들이 다른 팀에게 가장 조언을 많이 하는 게 로키에요. 새로운 팀이 들어오면 가장 헷갈려하는 것도 로키이고요. 제일 진도가 안 나가는 것도 로키에요. 제일 연습을 많이 하는데도, 어떤 위치에 딱 못 올라오는 순간이 생기거든요. 자기가 무엇을 웃겨야 하는지 아니까 개인기는 강해져요. 그런데 이걸 합으로 몰아붙이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요. 보면 재밌긴 해요. 그런데 깔깔거리면서도 남지 않는 이유는, 이게 한 여자의 의식에서 의식의 흐름에서 나오는 얘기여야 하거든요. 그게 코미디고요.

예를 들면, 실제로 이 안에 있는, 방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벌어졌는가? 아니면 여자는 '당신 아까도 사람을 죽였어', '내가?' 이미 약에 취한 여자가 자기가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도 모르니까. 이 여자가 잠에 깨어 있는 걸까? 아니면 누워있는 채로 계속 자는 걸까. 정말로 이 여자는 방을 나간 걸까.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지만, 수녀 시체를 옮겨달라고 했지만, 두스가 진짜 롤라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될 정도이잖아요. 이 여자는 약물과다로 죽은 건 아닐까? 그런 걸 모를 정도로 이 여자의 의식의 흐름 안에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이 안에서 펼쳐지는 그 합이 어마무시하게 중요해요. 토씨는 틀릴지언정, 누가 로우(Low) 치면, 하이(High) 치고, 누가 하이 치면, 로우 치면서 '뚝딱딱딱딱 뚝딱딱딱딱 딴!'하고 결과물로 딱 내놨을 때 되게 잘 나와야 하거든요. 자다가도 입으로 나올 정도로 빠르게요. 그게 한 사람처럼 나오게 하기 위해서 연습해야 하고! 제일 빨리 해야 하는 클레이-바비나 처음 세 명이 나오는 신은 밥 먹으러 내려갈 때, 밥 먹고 올라갈 때 누가 멀리서 대사를 툭 던지면 자동재생처럼 '도로로록' 돌아요. 그 정도로 빨리 가요. 또 그게 바빠야 하지 않고, 버거워 보이지 않아야 해요. 그 합 안 놓치려고 아직도 연습하고 있어요!"

쉴 틈 없이 빠른 속도로 흘러가던 이 작품은, 중요한 순간 롤라가 겪는 일들이 마냥 웃을 수 없는 비극임을 느끼게 한다. 극도로 희화화된 사건들 중에서 롤라는 끊임없이 대상화되고, 비하 받으며, 누구에게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 그러나 평생 거짓말할 운명인 롤라는 혼자서는 나갈 수 없다는 벨보이의 말을 부정한다. 그리고 마지막 쇼를 끝낸 후 홀로 당당하게 이 방의 문을 연다. 한 손에는 그토록 잡고 싶었던 빨간 풍선을 든 채.

[루시퍼] "날 그렇게 보지 마"

<카포네 트릴로지>의 이석준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에 출연 중인 배우 이석준의 공연 및 콘셉트 이미지 사진. <카포네 트릴로지>는 2015년 초연 이후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으로 이번이 세 번째 공연이다. 초연부터 함께해 온 배우 이석준은 관록의 연기를 선보이며 극의 중심을 잡는다.

▲ 닉 니티가 몰랐던 것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걸 키워야 해요.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살아가는 방식은 이거밖에 없어요.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밖에 몰랐던 거죠, 이 사람이 만약에 이 세계를 놓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면, 놓고 말린을 만났겠죠. 사랑하는 감정이 들어와서 한 사람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려고 했는데, 사랑하는 방식 자체를 몰랐던 것 같아요. 사랑에 서툰, 어떤 늙은 남자?" ⓒ 아이엠컬처


<카포네>에서 '빨간 풍선'은 아주 중요한 오브제이다. 세 에피소드에 모두 공통으로 등장하는 오브제 중 하나이자, 가장 상징적인 오브제이다. 그 풍선이 에피소드마다 각각 상징하는 것은 다르지만, 에피소드 속 주인공들은 모두 빨간 풍선을 향한 열망을 드러낸다. '로키'의 롤라가 빨간 풍선을 무사히 들고 나가는 데 비해, '루시퍼'의 올드맨 '닉 니티'는 이 풍선을 터뜨려버리고 만다.

때는 1934년, 장소는 역시나 시카고 렉싱턴 호텔 661호이다. 알 카포네가 감옥에 갇혀 있는 사이, 카포네의 조직은 닉 니티라는 한 남자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닉은 카포네와 피를 섞은 사람은 아니지만, 유능하고, 조직을 잘 알고 있으며, 무엇보다 직접 명확한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대신 '속삭임'을 이용한다. 모두가 그에게 카포네가 되라고, 렉싱턴 호텔의 꼭대기 펜트하우스에 올라가라고 하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다. 닉에게 중요한 건 그가 사랑하는, 그의 부인 '말린 니티'일 뿐이다.

"'루시퍼'에서 빨간 풍선은 사실은 말린이기도 해요. 말린의 마음이기도 하고요. 말린이 말하는 그 '평범한 생활'이라는 것이기도 하죠. 말린이 부러워했던 건,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생활인데 항상 잡으려고 했지만 못 잡았죠. '내가 평범해질 수는 없어', '평범해지기는 힘들었어', '난 평범해지고 싶었는데, 평범해지지 못했어', '네가 바라는 그걸 내가 해주지 못했어' 같은…. 그런데 말린이 갖고 싶었던 건 그 풍선 자체가 아니었잖아요, 행복이었는데, 나(닉)는 잘못된 방법으로 그 풍선을 주려고 했고, 말린이 바라는 행복은 그 행복이 아니었어요. 이미 시선이 잘못 맞았죠. 닉에게 말린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풍선이었어요.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선이 실제 풍선일까, 아니면 닉이나 말린의 환상일까 하는 부분은 정확하지 않아요. 실제로 매번 그 창문에만 풍선이 지나갔다는 건 웃기지만…. 밑에 풍선가게 큰 데가 있나? (웃음) 그 당시에는 아이들 장난감이 별로 없으니까, 풍선이 꽤 많았을 것 같기도 하고요. 하늘에 둥 떠다니는 상징이 실제로 창문 밖으로 올라갔을 것 같고…. 풍선을 보고 실제로 닉이나 말린에게 든 생각도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풍선이 지나갈 때마다 둘은 무언가를 놓치고 있어요. 하나씩."

닉과 말린의 생활은 언뜻 행복한 것처럼 보인다. 분명 행복한 순간은 있었다. 하지만 말린의 삶이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새장 속의 새처럼, 이 좁은 렉싱턴호텔 661호에서 말린은 감금되어 있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한다. 비록 레슨 선생님도 만나고, 쇼핑도 하고, 레스토랑을 예약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호텔 룸이 그녀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인지는 미지수이다. 그리고 닉은 조직의 상황에 대해서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으며, 갈등을 회피할 뿐이다.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지고, 결국 닉의 속삭임 하나가 파국을 일으키고 만다.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자동차 폭발 사고로 위장한 암살을 꾸몄으나, 피해자는 말린의 어린 조카들이었다. 가족을 만나러 가겠다는 말린의 앞을 닉이 가로막는다. 닉에게서 다시 광기 어린 폭력이 엿보이고, 그는 그가 그토록 되고 싶어하지 않았던 카포네가 되어 있었다. 말린이 울부짖으며 애원해도 닉은 말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카포네 트릴로지>의 이석준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에 출연 중인 배우 이석준의 공연 및 콘셉트 이미지 사진. <카포네 트릴로지>는 2015년 초연 이후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으로 이번이 세 번째 공연이다. 초연부터 함께해 온 배우 이석준은 관록의 연기를 선보이며 극의 중심을 잡는다.

▲ 카포네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애초부터 그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었죠.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했으나, 이 사람은 아는 게 이거밖에 없었죠. 결정적으로 한계치에 몰리면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는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죠. 예를 들면, 매를 맞으며 아빠의 폭력을 보고 살았던 아들이 ‘나는 절대 아빠처럼 안 될 거야. 난 너 같은 인간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했는데, 어느 날 내가 아빠처럼 누군가를 때리고 있다는 걸 발견하는 거죠. ‘너, 네 아빠 같아. 똑같아’, ‘난 아빠가 아니야!’라는 것처럼,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아는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요. 본능 같은 것 같아요. 자신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죠." ⓒ 아이엠컬처


"말린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아니까요. 닉 니티가 '나한테 그런 눈빛 보이지 마'라는 그 눈빛은, 말린이 닉 니티에게 보여준 눈빛은 아마, 공포가 아닐까 싶어요. 닉 니티는 밖에 있을 때 말고 집 안에 들어와서 말린한테 다정다감을 보여줬잖아요. 그런데 서로 행복했던 순간의 눈빛이 아니라, 일을 할 때 조직원들이 나(닉)를 봤을 때의 눈빛, 그 공포감을 말린의 눈에서 보는 것에 대한 고통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닉 니티도 공포를 느꼈겠죠. 내가 이렇게 변해가는데, 말린을 너무 사랑하는데, 말린의 눈에서 내 모습이 투영되니까 그걸 거부했던 것 같아요. '나한테 그런 표정 짓지 마. 날 그렇게 이상하게 보지 마. 점점 이상해져.'

누군가를 내(닉)가 죽이러 갔을 때, 죽는 순간에 그 사람이 내(닉) 눈을 바라봤을 때 '죽는구나'하는 공포심을 주잖아요. 닉은 누군가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인데, 그 방법을 말린한테 쓰고 싶지는 않았던 거죠. 나는 이 여자를 그런 데에서 최대한 멀리하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결과적으로 공포심을 주게 된 거죠. 닉 니티한테는 굉장한 혼란을 줬을 거고, 그게 두려웠을 거고, 그리고 이 여자가 닉 니티한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감각이 있었을 것 같아요."

결국 터져버린 빨간 풍선. 말린만이 아니라 닉도 봤던 빨간 풍선. 닉도 그 풍선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창문밖 풍선은 너무 멀리 있었다. 뷰익 사건이 없었다면, 이 위태로운 조직 관리가 카포네가 돌아올 때까지 잘 이루어졌다면, 그렇다면 닉과 말린은 행복할 수 있었을까. 순간순간의 행복을 계속 이어서 그들의 삶으로 엮어낼 수 있었을까.

"말린이 마지막에 '나는 내 가족한테 갈 거야', '협박하는 거야?', '난 당신 사랑하지 않아'라고 얘기하는 것들은 말린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에요. 말린은 닉보다 더 큰, 어떤 다른 종류의 보스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닉 니티가 견디지 못했겠죠. 말린은 계속 자신의 품 안에 있어야 하거든요.

뷰익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문제가 없었더라도 이 상태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파멸의 길을 갔을 것 같아요. 뷰익 사건이 아니더라도, 이 사람이 가는 길은 뻔해져 있고, 말린은 성장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그늘에 들어와 있는 철없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빈디치] "사람들은 '아니요'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해"

<카포네 트릴로지>의 이석준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에 출연 중인 배우 이석준의 공연 및 콘셉트 이미지 사진. <카포네 트릴로지>는 2015년 초연 이후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으로 이번이 세 번째 공연이다. 초연부터 함께해 온 배우 이석준은 관록의 연기를 선보이며 극의 중심을 잡는다.

▲ 이 남자의 욕망 “지배욕. 굴복시키는 과정을 좋아한다고 하잖아요. 이 사람에게는 성욕을 푸는 게 필요한 게 아니라 사람을 굴복시키고, 지배해서, ‘아니요’라는 사람을 ‘네’라고 만드는 과정을 좋아하죠. 이 사람은 그걸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 권력욕과 지배욕이 같이 맞물려 있는….” ⓒ 아이엠컬처


1943년, 렉싱턴 호텔 661호. 한때 경찰이었으나 지금은 복수를 꿈꾸고 있는 남자가 혼자 몸을 다지고 있다. 그의 이름은 빈디치. 복수의 대상은 시카고의 경찰청장 '프랭크 두스'이다. 루시 두스의 아버지이자, 시카고 정의의 상징, 카포네의 조직을 몰아내고 도시를 탈환한 영웅. 하지만 프랭크를 옆에서 보아온 빈디치는 잘 알고 있다. 프랭크가 얼마나 위선적인 쓰레기인지, 그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의의 빙하기에 살아남은 마지막 공룡, 멸종위기에 놓인 빈디치는 단 하루라도 시카고에 정의가 승리하기를 꿈꾼다. 빈디치의 곁에는 역시나 프랭크에게 복수하고 싶어하는, 프랭크의 딸 루시가 있다. 그들은 카포네의 자리를 대신한 또다른 카포네, 프랭크를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프랭크는 카포네에요. 이 사람은 애초부터 조직에 더 가까운, 그런 생활이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경찰이 된 것도 정의에 대한 본분 때문이 아니라 애초부터 성공에 대한 욕망이 더 컸을 거예요. 베테랑이 되었을 때도, 그 욕망이 이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자라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지는 않았겠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본인 능력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을 테고, 이걸 놓치면 자기가 잃을 거에 대한 두려움이 컸을 거예요. 자기가 저지른 불법이, 자기한테는 합법적인 느낌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남의 것을 갈취하는 데 있어서 죄책감 같은 건 갖지 않을 테고, 그러니까 와이프도 자동차 사고로 위장해서 죽일 만큼…. 중요한 건 본인밖에 없었겠죠.

프랭크는 카포네랑 똑같은데…. 만약 이 사람이 조직에 들어간다면 카포네를 능가할 수 있는 자신은 없었을 것 같아요. 카포네와 비등한 힘을 가지려면 반대쪽으로 가서 그 힘을 키울 사람이죠. 경찰 쪽에서의 카포네라고 불릴 정도였잖아요. 그러면서도 정의의 상징이고.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유명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하는 일은 카포네와 연대해서 범죄를 소탕하는 거예요. 그 많은 일들이 이 이야기에 의하면, 카포네가 도와준 일이에요. 반대파를 숙청하거나 본인이 숙청해야 할 일들을 대거 도와주고, 그 일을 도움 받으면서 이 자리까지 왔어요. 카포네와 협력하며 대등한 입장이 된 것 같을 것이고, 말 그대로 부패경찰의 선봉이죠."

<카포네 트릴로지>의 이석준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에 출연 중인 배우 이석준의 공연 및 콘셉트 이미지 사진. <카포네 트릴로지>는 2015년 초연 이후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으로 이번이 세 번째 공연이다. 초연부터 함께해 온 배우 이석준은 관록의 연기를 선보이며 극의 중심을 잡는다.

▲ 왜 하필 그레이스였을까 “두스는 빈디치를 위협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을까요? 이런 사람들은 어떤 선 이상으로 누군가를 키우지 않아요. 얘(빈디치)는 진짜 정의의 상징이 될 가능성이 있거든. 아무리 가르치려고 해도 튕겨져 나가는 순간이 있으니까요. 이게 세컨드가 될 재목일지 퍼스트가 될 재목인지는 단번에 알 것 같아요. ‘우리 일만 하면 돼. 너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못해’라고 던져놓고 하는 말이 ‘그레이스, 잘 있어?’잖아요. 그레이스를 무너트리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두스는 치고 올라오면서 점점 똑똑해져 가는 빈디치를 무너트릴 방법으로도 그걸 택했을 것 같아요.” ⓒ 아이엠컬처


프랭크 두스는 빈디치의 아내인 그레이스를 성적으로 착취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그레이스는 자살하고 만다. 아내가 고통받고 있는 것도 모르고, 빈디치는 자신의 승진에만 들 떠 있었다. 자신이 한때 믿고 따랐던 선배에게 배신당한 그는, <햄릿>처럼 고뇌하며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낭만적 엔딩을 꿈꾼다. 그런데 프랭크는, 왜 하필 그레이스였을까. 누군가가 '아니오'라고 하는 걸 '네'라고 하도록 만드는 데 희열을 느끼던 그는, 왜 모자를 내려놓고 그레이스를 타깃으로 삼았을까.

"두스는 빈디치를 위협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을까요? 이런 사람들은 어떤 선 이상으로 누군가를 키우지 않아요. 얘(빈디치)는 진짜 정의의 상징이 될 가능성이 있거든. 아무리 가르치려고 해도 튕겨져 나가는 순간이 있으니까요. 이게 세컨드가 될 재목일지, 퍼스트가 될 재목인지는 단번에 알 것 같아요. '우리 일만 하면 돼. 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못해'라고 카포네의 일에 개입하지 않도록 던져놓고 하는 말이 '그레이스, 잘 있어?'잖아요. 그레이스를 무너트리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두스는 치고 올라오면서 점점 똑똑해져 가는 빈디치를 무너트릴 방법으로도 그걸 택했을 것 같아요."

<카포네>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빈디치'는 프랭크 두스가 늙어가는 과정을 장면마다 짧지만 임팩트 있게 보여준다. 렉싱턴 호텔 661호에 처음 방문했을 때, 웨딩 드레스를 입은 롤라(로 분장시킨 수녀)의 시체를 보고 프랭크는 이게 진짜일까 의심한다. 조금 더 나이가 들은 프랭크는, 조직과 경찰 간의 검은 연결고리에 대해 이미 눈치를 챘으면서도 애써 빈디치에게 진실을 가린다. 그리고 그 다음, 그는 또 다른 카포네가 되어 있었다. 프랭크는 원래부터 그런 끔찍한 인간이었을까. 아니면 서서히 타락해간 것일까.

"김태형 연출은 (처음부터 나쁜 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빈디치가 본받고 싶을 정도로 굉장히 유능한 형사. 몇 가지만 딱딱 보고도 의문이 생기고, 형사 콜롬보 같고…. 그렇지만, 그때도 선함을 대표하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능력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 사람의 어떤 것들이, 어떤 인자들이 이 사람을 타락하게 만들었겠죠. 빈틈의 구멍은 혹은 악의 구멍은 되게 작은 거거든요.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거죠. 프랭크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고, 이런 전체적인 상황을 게임처럼 생각하잖아요.

처음 빈디치의 눈에 두스는 시체 앞에서 태연히 땅콩을 먹을 수 있고, 죽음에 대해 별로 공포심을 갖고 있지 않은, 그냥 어떤 프로페셔널의 모습인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빈디치가 이를 부러워하지만, 시카고라는 환경은 이 사람(프랭크)에게 보이지 않는 작은 구멍으로 악의 물이 흘러 들어가게 만들었을 것 같아요. 그게 사리사욕으로 점점 벌어졌을 것 같고요."

☞ 이어지는 기사 : "대학로에 동상 세우고 싶었다"던 배우, 그가 꿈꾸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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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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