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월 1일은 세계 노동절입니다. 이날은 1886년 미국 시카고에서 있었던 총파업 투쟁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 8만 명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하루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경찰과 군대가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 사태까지 벌어졌지요.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은 창립기념대회에서 이날을 노동 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날로 정했고, 1890년 5월 1일 국제적인 시위를 벌이기로 한 것이 노동절의 시초입니다.

탄생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날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확인하는 날입니다. 서비스직이든 생산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누구나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존중받아야 하며 연대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기본 명제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지요. 128주년 노동절을 맞아 그 정신을 기리고, 노동자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돌아볼 만한 영화 4편을 골라보았습니다.

<모던 타임즈>(1936)

 영화 <모던타임즈>의 포스터

영화 <모던타임즈>의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1929년, 뉴욕 증권거래소 폭락으로 시작된 미국의 대공황은 수많은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매주 수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으며, 은행들은 파산하여 예금은 휴짓조각이 됐죠. 물건을 만들어도 살 사람이 없어 공장은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당시 세계의 가장 큰 소비 시장이었던 미국의 몰락은 세계 경제에 충격파를 던졌고 유럽 각국 역시 경제 위기 속에 허덕이게 됩니다.

찰리 채플린의 걸작 <모던 타임즈>는 바로 이 대공황의 기억을 바탕으로 합니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찰리는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포드식 공장 노동에 찌들어 있습니다. 효율만을 추구하는 공장은 찰리를 포함한 다른 노동자들을 톱니바퀴의 일부처럼 대할 뿐입니다. 결국, 찰리는 나사처럼 보이는 건 뭐든 조이려는 신경증에 걸리게 됩니다. 이때부터 찰리는 병원, 공장 파업, 교도소 등 사회 구석구석을 거치며 소동극을 벌이게 되지요.

대공황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가 지적되고 있지만, 제일 큰 원인은 역시 당시 극심한 양극화를 들 수 있습니다. 상위 1% 부자들과 중산층 이하 국민들의 심각한 빈부 격차는 결국 사회 전반의 소비 부진을 초래했습니다. 기업은 벌어들인 돈을 설비를 확장하는 데 투자했지만, 소득이 줄어든 국민들은 확장된 설비에서 생산된 상품을 살 여력이 전혀 없었던 거죠.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찰리가 겪는 일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자본은 끊임없이 노동자를 고립시킵니다. 공장에서는 하나의 부품으로 대합니다. 정상에서 벗어나면 병원에 보내고, 단결과 연대의 움직임을 보이면 감옥에 가둡니다. 아니면, 자본이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꿈을 꾸게 만들죠. 수많은 삶의 경험을 거쳐 찰리가 선택한 것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가난한 소녀와 길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혼자가 되어 말라죽느니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을 택한 것이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4)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포스터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포스터 ⓒ 박광수 감독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통은 수십 년 후 후발 개발도상국 노동자들의 것이 됩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지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탐욕스러운 자본은 수많은 노동자의 건강과 삶을 무자비하게 갈아 마시며 점점 몸집을 불려 갔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같이 세계에 유례없는 국가 주도의 압축 성장을 겪은 나라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합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자기 몸을 불살라 그런 노동자들의 외침을 생생히 전했던 전태일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수배 중인 법대생이 전태일의 삶을 취재하고 복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 영화에서 흑백으로 재현된 전태일의 삶은 시간이 많이 지난 오늘날의 관점으로 봐도 탁월한 지점이 있습니다. 봉제 공장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가는 어린 노동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위해 뭐든 해보려다 좌절을 겪는 전태일의 모습은 가슴 한구석을 저리게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에 박정희가 큰 공헌을 한 것처럼 얘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과정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노동자의 피눈물과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근로기준법이 뭔지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일하다 건강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던 숱한 생산직 노동자들이야말로 우리나라의 기적 같은 성장의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태일이 살던 시대로부터 50년 가까이 지나서 산업 구조가 서비스업 중심으로 바뀐 오늘날은 그때와 많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합니다. 생활 수준이 전반적으로 좋아졌고, 비교도 할 수 없이 편리한 문명을 맛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율은 여전히 높습니다. 그들을 위해 전태일이 갔던 뜨거운 연대의 길을 따라 사는 사람도 있죠. 전태일은 반세기 전의 위인이 아니라, 21세기 오늘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환하게 살아있는 정신입니다.

<우아한 거짓말>(2014)

 영화 <우아한 거짓말>의 포스터.

영화 <우아한 거짓말>의 포스터. ⓒ (주)유비유필름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는 사람이 정규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경력이 쌓이지 않는 일자리, 불규칙한 근무 패턴,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한 무리한 노동 등 비정규직이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은 삶의 질을 악화시킵니다. 이는 노동자 본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아한 거짓말>(2015)은 이런 비정규직 가정의 아픔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만지(고아성)는 아버지를 여의고 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어머니(김희애), 중학생인 동생 천지(김향기)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천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지는 천지의 과거를 하나씩 되짚어갑니다.

이 영화에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혼자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집안을 이끌어온 여성의 삶이 그대로 잘 녹아 있습니다. 처음엔 왠지 평소 연기 톤과 달라 부자연스럽게만 느껴지는 김희애의 연기는 보면 볼수록 공감이 갑니다. 두 딸 앞에서 왠지 좀 더 오버하고, 힘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가슴이 아플 때가 많았습니다.

비정규직 가정의 2세들인 만지와 천지, 만지의 친구 미란(천우희)과 미라(유연미) 자매의 삶 또한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힘들게 하루를 살아가는 부모의 어려운 상황을 지켜보며 자기 삶의 태도를 조금씩 수정해 나갑니다.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되기도 하고, 한없이 상대에게 맞추기도 합니다. 그러다 자기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꿈을 포기하기도 하죠.

하지만, 이들은 결국 '우아한 거짓말'로 얼룩진 삶 대신 그 안에 온전히 자리 잡고 있는 삶의 진정한 기쁨을 발견합니다. 서로 기대고 안아주면서 느끼는 인간의 온기를요. 그들은 이제 자기 처지와 문제만 생각하고 주위의 고통에 눈감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아왔던 타인을 바라보며 연대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희망은 이렇게 싹틉니다.

<내일을 위한 시간>(2014)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의 포스터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의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주)


비정규직의 증가가 미치는 또 하나의 악영향은 노동자들 사이에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증폭시킨다는 겁니다. 제일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누군가가 일을 그만두면 그만큼 내가 일을 더 할 수 있게 되거나 평균 임금이 오를 수 있는 거니까요.

<내일을 위한 시간>의 주인공 산드라(마리옹 코티아르)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렇습니다. 복직을 앞둔 산드라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회사 동료들이 그녀의 복직 대신 보너스를 받기로 했다는 거죠. 다행히 절차상 문제로 월요일 아침 다시 투표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산드라는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 16명의 동료를 찾아가 자신의 복직을 지지해 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비정규직의 증가와 과학 기술의 발달은 업무 공간을 공유하는 데서 나오는 기본적인 동료애를 점차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 각자가 서로 마주 보고 상대의 삶을 이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산드라가 주말 이틀 동안 겪은 일이 그것입니다. 처음에 복직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자신의 복직을 반대한 동료들이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결국 변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드라의 극적인 변화는 감동적이지만,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영화의 결말이 오히려 막막하게 느껴진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변화는 한번 시작하면 쉽게 되돌릴 수 없는 법입니다. 산드라의 결정은 본질적인 마음의 변화를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대하게 되는 것은 영화가 끝난 후 달라질 산드라의 삶입니다. 그녀가 곧바로 공감과 연대를 표명하며 노동 운동같은 데 뛰어들진 않더라도, 최소한 자기 처지와 문제만 생각하며 질척거리진 않을 테니까요.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노동절 모던 타임즈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우아한 거짓말 내일을 위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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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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