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첫 방송한 EBS1 시사 프로그램 <빡치미>

24일 첫 방송한 EBS1 시사 프로그램 <빡치미>ⓒ EBS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새로 생겼다. 대신 화를 내 준단다. 한국인을 '빡치게' 하는 13대 악행. 그 악행을 근절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수식어가 붙었다. 대국민 청원프로젝트 <빡치미>가 EBS에서 24일 밤 첫 방송을 탔다. 진행은 프로불편러라 불리는 김구라씨와 개그맨 황제성씨가 맡았다. 첫 방송에는 대한항공 땅콩회항 피해자 박창진씨가 출연했고 게스트로 표창원 의원과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함께 했다.

 24일 첫 방송한 EBS 시사 프로그램 <빡치미>의 한 장면.

24일 첫 방송한 EBS 시사 프로그램 <빡치미>의 한 장면.ⓒ EBS1


첫 회는 '대한민국은 갑질공화국'이라는 부제를 달고 대한항공 조현민 전무의 물컵 갑질로부터 촉발된 우리 사회의 만연한 갑질에 대해 다뤘다.

시작은 가벼웠다. 갑질을 한 적 없다는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 그러나 수행비서와 보좌관들은 "365일 3개의 메뉴만 시킨다" "답정너 스타일이다" 등등을 고발(?)했다. 제작진은 수행비서가 운전하는 표창원 의원의 차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나는 국밥"을 외치는 의원 앞에서 메뉴 선택의 기회를 번번이 잃어버린 비서진들의 항변은 표 의원에게는 당황을, 진행자들에게는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그러나 이런 애교 수준의 갑질보다 나의 눈에 들어 왔던 것 수행비서가 지나치듯 한 한마디였다. 의원님과 하루 12시간 이상을 같이 생활한다고. 하루 12시간의 노동(?). 의원도, 수행비서도, 프로그램 진행자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이 없었지만 '과잉노동' 아닌가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24일 첫 방송한 EBS 시사 프로그램 <빡치미>의 한 장면.

24일 첫 방송한 EBS 시사 프로그램 <빡치미>의 한 장면.ⓒ EBS1


박창진 "우리사회는 서비스맨을 서번트(하인) 취급" 

박창진 대한항공 전 사무장은 땅콩 회항 사건 이후 일반 승무원으로 강등되고 스트레스로 수술까지 받아야 했던 아픔을 토로했다. 다른 프로에서 "야수 괴물이 나에게 덤벼드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던 그는 서비스(services)업 종사자들을 서번트(servant, 하인)로 취급하는 우리 사회의 그릇된 인식의 단면을 담담히 진술했다.

갑질의 피해자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을'들의 또 다른 가해는, 갑질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땅콩 회항 사건 이후 조현아 부회장이 집행유예를 받고 화려하게 복귀하기 까지 법의 잣대는 느슨했고 국민들의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내의 '을'들조차 갑질의 오너보다 피해자에게 차가운 시선을 주기도 했다. 박창진 전 사무장의 고독한 싸움은 안타깝고도 애잔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은밀하게 '파이팅'을 외치는 동료들도 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24일 첫 방송한 EBS 시사 프로그램 <빡치미>의 한 장면.

24일 첫 방송한 EBS 시사 프로그램 <빡치미>의 한 장면.ⓒ EBS1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에 앞서 진행된 조양호 한진그룹 일가의 성화 봉송 장면은 재벌 오너 일가의 범죄적 갑질에 우리사회가 얼마나 둔감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국제적 웃음거리였다. 조양호 회장이 평창올림픽 유치 공동위원장으로서 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들딸이 환한 웃음을 하고 아버지 뒤를 따르는 모습은 블랙코미디에 가까웠다. 더구나 뺑소니·폭행으로 물의를 일으킨 조현태씨나, 집행유예중인 조현아씨를 내세운 건 어떤 이유로도 납득할 수 없다. 이 화려한 쇼를 통해 조현아는 계열사 사장으로 복귀했고 박창진 사무장은 차디찬 수술대에 누워야 했다.

황제성씨가 갑질 오너로 분장한 PD의 승용차에 동승해 상상초월 회장님들의 갑질 운전지시를 재현한 장면도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새삼 놀라왔다. 대림산업 이해욱 부사장이 자가용에서 했던 갑질은 운전기사의 생명은 물론 스스로의 안전까지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뒤쪽에 앉은 부사장을 룸미러를 통해 흘끗 쳐다본다는 이유로 룸미러를 가리고 백미러마저 접게 한 갑질의 재현에 "미쳤구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박창진 전 사무장의 말대로 운전기사를 '서번트'로 여기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행동이었다.

 24일 첫 방송한 EBS 시사 프로그램 <빡치미>의 한 장면.

24일 첫 방송한 EBS 시사 프로그램 <빡치미>의 한 장면.ⓒ EBS1


대리점주에게 "망해버리라"던 남양유업

남양유업 사태 후 4년이 지났다. 오너의 갑질과는 또 다른 형태. '을'인 대리점에 본사인 '갑'의 밀어내기가 발단이었다. 녹취록에서 '갑'인 본사 직원은 밀어내는 물량을 줄어달라는 요구에 제품을 버리라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욕설은 물론, 망해버리라는 저주도 퍼부었다. 사실이 폭로되자 국민들은 분노했고 우유와 제품을 길거리에 쌓아놓고 불매운동을 결의했다. 남양유업은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고 피해 대리점에 구제를 약속했다.

 24일 첫 방송한 EBS 시사 프로그램 <빡치미>의 한 장면.

24일 첫 방송한 EBS 시사 프로그램 <빡치미>의 한 장면.ⓒ EBS1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현실은 참담했다. 적극적으로 본사에 문제제기를 했던 대리점들은 일정 보상을 받은 반면 상생협약서에 서명을 했던 대리점들의 피해구제는 거의 없었다. 인터뷰에 응한 대리점주는 물품대금 3억 등 수억 원의 빚을 지고, 아들의 병원비도 친구의 카드를 빌려 대납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대리점주는 "제가 그 돈을 벌어서 갚을 수 있을까요? 저는 더이상 갈 데가 없어요. 그럼 저는 무슨 선택을 해야 하나요"라고 눈물짓는다.

본사에 더 이상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문구가 담긴 상생협약서. 그게 상생이 아니라 또 다른 노예 계약서에 불과하다는 것을 본사는 숨겼고 대리점은 속았다. 상황이 이런 데도 남양유업에 공정위가 부과한 과장금 124억 원을 법원이 5억으로 줄여줬다는 게 참여연대 안질걸 참여연대 사무처장의 전언이다.

조현민의 물컵 참아낸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는다 

갑을 관계는 어디에나 있다. 고용자와 노동자. 본사와 대리점. 대기업과 자영업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갑을 관계는 필연이다. 문제는 갑을 관계가 아니다. 도덕과 법의 잣대를 무시한 갑질이 문제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잃어버린 오너 일가. 주변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기 보다는 피한다. 국민들의 분노도 오너와 재벌들의 권력욕 만큼 오래가지는 않는다. 불매운동은 매번 공허한 구호로 그쳤다. 남양유업 사태 4년이 지난 지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남양유업은 매출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법의 잣대도 느슨하기는 마찬가지다. 공정위 과징금은 대폭 줄여주고 집행유예로 오너 일가에 면죄부를 주는 법원. 그래서 정치권력, 경제권력의 갑질은 오늘도 안녕하다.

우리는 자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헷갈려한다. 그러나 따져보면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특히 정치와 경제, 사회의 권력구조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비견될 만큼 공고하고 '갑질'이 특권층의 권력유지 수단처럼 굳어져 버린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천박한 자본주의는 있어도 사람이 주인으로 대접받는 민주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갑질공화국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아직 멀었다.

 24일 첫 방송한 EBS 시사 프로그램 <빡치미>의 한 장면.

24일 첫 방송한 EBS 시사 프로그램 <빡치미>의 한 장면.ⓒ EBS1


EBS <빡치미> 첫 방송은 갑질이라는 어렵고 답답한 문제를 유쾌하게 풀어냈다. 그러나 놓쳐서 안 될 목소리도 있다.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연이은 갑질과 남양유업의 피해자의 계속되는 고통은 '을'들의 반란이 아니고서는 해결이 힘들다는 점을 시사한다. 상생협약서에 서명하고, 던지는 물컵을 감내해도 갑질은 점점 더 심해질 뿐이다. 경제권력의 갑질을 옹호하는 정치권력의 갑질. 면죄부를 남발하는 법원권력의 갑질. 이 또한 '을'들의 저항이 아니고서는 바로잡기 어렵다.

불매운동으로 망한 회사.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했다. 권력층의 갑질이 법원에 의해 단죄되었다는 사실도 기억할만한 것이 없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갑질공화국. EBS <빡치미>의 소개글처럼 세상에 무시해도 되는 불편함은 없다. 갑질에 대한 을들의 반란. 더 단단해지고 더 끈질겨야만 세상이 바뀐다.

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