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소시민들이 일상에서 재벌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대다수 시민들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재벌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일상과 태도를 상상하곤 한다.

드라마 속 재벌들이 성에 차지 않는 아들의 여자친구에게 '헤어지라'며 돈 봉투를 던지거나 물을 뿌리는 일 정도는 클리셰 중 클리셰. 선민의식과 위선으로 똘똘 뭉친 드라마 속 재벌들은 겉으로는 우아함을 뽐내지만,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추악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돈과 권력을 가진 그들은 못 할 것도, 참아야 하는 일도 없다. 때문에 드라마 속 재벌들의 갑질은 흙수저 주인공의 비극을 극대화하거나, 주인공의 전투 의지를 북돋는 장치로 사용되곤 한다.

그래서 너무 극단적이고 전형적인 그들의 '갑질'은 작위적이라 몰입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재벌들의 실제 갑질에서 모티브 얻은 장면이 많다.

2010년 SK 본사 앞에서 1인 시위하던 유아무개씨를 폭행하고 '맷값'으로 2천만 원을 줬다는 최철원 SK그룹 전 M&M 대표(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의 '맷값 폭행'은 영화 <베테랑>을 비롯 여러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소재가 됐다.

일반인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번뜩이는 '갑질'로 작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재벌들의 이야기를 모아봤다.

'라면 갑질'로 패러디된 '땅콩 회항'

 지난 3일, SBS 주말드라마 <착한 마녀전>에는 '땅콩 회항'과 '라면 상무' 사건이 연상되는 에피소드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지난 3일, SBS 주말드라마 <착한 마녀전>에는 '땅콩 회항'과 '라면 상무' 사건이 연상되는 에피소드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 SBS


지난 3일, SBS 주말드라마 <착한 마녀전>에는 극 중 항공사 전무인 오태리(윤세아 분)가 뜨거운 라면을 내온 승무원에게 "그릇이 너무 뜨겁다"며 화를 내는 장면이 방송됐다. '규정대로 했다'는 승무원의 설명에도, 오태리는 승무원의 머리에 라면을 쏟아 부으며 난동을 부리다 경찰에 끌려간다.

이는 2014년, 미국 뉴욕 JFK 국제공항에서 출발하는 대한항공 여객기에서 땅콩 서비스를 문제 삼아 비행기를 되돌린 한진그룹 장녀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과, 2013년 로스앤젤레스행 대한항공 여객기에서 "밥이 설익었다", "라면이 덜 익었다"며 수차례 승무원에게 항의하고, 그 과정에서 책자로 승무원의 얼굴을 가격한 포스코 상무의 이야기를 합쳐놓은 에피소드다.

이 일로 조현아 부사장은 항공보안법상 항공기항로변경죄, 항공기안전운항저해폭행죄, 형법상 강요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 등의 혐의 등으로 구속됐고, 포스코 상무는 FBI에 인계돼 조사를 받은 뒤 추방됐다.

이재용도 깜짝 놀란 <황금빛> 속 해성 그룹

 <돈꽃>의 우 사장(전진기 분)은 청아그룹의 대표이사이자, 청아그룹 컨트롤타워인 전략기획실 실장이다. 하지만 오너 일가에게 그는 그저 '하수인'일 뿐이다.

<돈꽃>의 우 사장(전진기 분)은 청아그룹의 대표이사이자, 청아그룹 컨트롤타워인 전략기획실 실장이다. 하지만 오너 일가에게 그는 그저 '하수인'일 뿐이다. ⓒ MBC


지난 2월 종영한 MBC <돈꽃>에는 청아그룹이 등장한다. 극 중 우 사장(전진기 분)은 청아그룹의 대표이사이자, 청아그룹 컨트롤타워인 전략기획실 실장이지만, 오너 일가에게는 그저 자신들의 '하수인'일 뿐이다. 회장인 장성만(선우재덕 분)은 우 사장의 일 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재떨이를 던지는가 하면 모욕적인 언사도 내뱉는다. 모멸감을 느낀 우 사장은 결국 장성만 회장과 적대 관계인 강필주(장혁 분)와 손을 잡고, 장성만 회장을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탠다.

<황금빛 내 인생> 속 해성그룹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극 중 민 부장(서경화 분)은 해성그룹의 직원이었지만, 오너 일가의 필요에 따라 그들의 '집사'가 된다. 하지만 그들에게 민 부장은 하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창업주의 맏딸인 노명희(나영희 분)는 화나는 일이 있을 때면 민 부장에게 화풀이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다 맡기면서도 제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민 부장의 무능을 탓한다. 민 부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에도 위로 한 마디 없이 수표 몇 장 건네주는 것으로 '은혜 베풀듯' 구는 노명희에게 질려 해성가를 떠난다.

 <황금빛 내 인생> 속 해성 그룹 창업주의 맏딸인 노명희(나영희 분)는 화나는 일이 있을 때면 민 부장(서경화 분)에게 화풀이한다.

<황금빛 내 인생> 속 해성 그룹 창업주의 맏딸인 노명희(나영희 분)는 화나는 일이 있을 때면 민 부장(서경화 분)에게 화풀이한다. ⓒ KBS


우 사장과 민 부장의 공통점은, 오너 일가의 최측근으로 그들의 치부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말 한마디에 그룹이 흔들릴 수도 있지만, 청아그룹이나 해성그룹 사람들은 그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하기 일쑤. 결국 이들은 복수의 방법으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오너 일가의 치부를 사용한다. 

<착한 마녀전>의 패러디만큼 직접적이진 않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운전기사 에피소드가 연상된다. 이 전 대통령이 초선 국회의원 시절 인연을 맺고, 7년 동안 운전기사를 해온 김아무개씨는,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이명박 후보의 선거법 위반 사실과 위증 지시 등을 폭로하고, 2013년 책 <이명박 리포트>를 펴낸 바 있다.

김씨는 SBS <블랙하우스> 인터뷰에서 "이 전 대통령은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분"이라면서 "갑자기 오른 전세 보증금 때문에 이명박 전 대통령(당시 국회의원)에게 200만 원을 빌려달라고 이야기했다가 다음날 해고됐다"고 말했다. 돈을 빌려주지 않은 것이야 그럴 수 있지만, 그 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7년 동안 일하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내쫓은 것은 이 전 대통령이 평소 자신의 운전기사를 어떻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갑질은 증거를 남긴다

지난 2월, 서울 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이, KBS 2TV <황금빛 내 인생> 속 재벌가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드라마 속 해성그룹 일가의 갑질과 고압적인 행동을 보며, 오너 일가의 모습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간접적으로 접했다는 것이다.

체면에 집착하고, 인간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해성그룹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움의 극치였다. 현실에서 재벌들의 갑질도 마찬가지다. 당사자에게는 물론 잊을 수 없는 치욕과 상처를 주었겠지만, 한 걸음 물러서 보면 우스운 사람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다.

조현아씨의 동생인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는 자사 광고대행사 팀장이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소리를 지르고 물병을 던진 사건으로 다시 한 번 '갑질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후 조 전무의 폭언 음성 파일, 이들 자매의 어머니이자 조양호 회장의 아내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의 폭행 동영상이 공개됐다. 여기에 대한항공 직원들이 조 회장 일가의 갑질과 탈세, 밀수 등 범법 사례를 잇달아 폭로하고 있다. 제보자들은 "조 회장 일가의 갑질이 너무 일상적이라 누가 제보자인지 알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논란이 일파만파 커졌고, 경찰의 수사도 시작되자, 결국 조양호 회장은 22일 조현아, 조현민 자매를 모든 직위에서 사퇴시키겠다는 내용의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과 준법위원회 설립 계획 등의 후속 조치 계획도 내놨지만 사태 수습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많다. 2014년 '땅콩 회항' 논란 당시에도, 조현아 부사장을 직위에서 사퇴시킨 뒤, 3년 만에 경영 일선에 복귀시킨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국민들이 바라는 건 사과가 아니라 조 회장 일가가 저지른 범법 행위에 대한 분명한 조사와 확실한 처벌이다. 과거에는 그들이 가진 재산과 권력으로 어찌어찌 무마되는 일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국민 모두가 핸드폰을 통해 재벌의 '갑질'을 기록할 수 있고, 누구든 인터넷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비리를 폭로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갑질은 증거를 남기고, 증거가 있는 범죄는 반드시 처벌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이제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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