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작가생활을 시작한 것은 2005년. 지역 신문사 기자 출신이었던 나는 같은 지역의 지상파 방송국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작가 자리를 제안 받았다. 소위 말해 특채 같은 방식이었다. 그러나 신문사와 방송사는 시스템이 달랐고, 기사와 방송 원고는 글쓰기 방식이 전혀 달랐다.

당시 큰 아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저녁 라디오 방송을 하는 엄마를 둔 탓에 아이는 기다림에 익숙해져갔다. 매일 매일 방송되는 라디오 시사정보 프로그램에서 작가로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요즘에는 좀 다르지만, 2005년 당시엔 주 7일 방송을 했었다.

주 5일은 레귤러 시사 정보 프로그램을 하고 토요일에는 음악방송, 그리고 일요일에는 대담 프로그램(한 사람을 초대해서 48분간 이야기를 나누는)을 만들어야 했다. 물론 나는 주 5일을 일했지만, 주 5일 동안 7일 방송분을 소화해야 했다. 살인적이었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나는 특채로 방송국에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소위 말하는 '특별채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확연히 달랐다. 특채라고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민망만 수준이다. 아니라고 하자.

 지역 방송국 라디오 부스 사진.

지역 방송국 라디오 부스 사진.ⓒ 방송작가유니온


방송국 A피디는 '신문사 기자 출신이니 여자지만 시사정보프로그램을 잘할 것'이란 기대로 나를 채용했다. 지금은 퇴직했지만, 그 분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작가료가 얼마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극비리에 진행됐다. 더 황당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A피디는 라디오 주조정실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더니 "원래 작가료가 적은데 내가 좀 많이 줄게~"라고 말했다(이 발언에 피디가 자신의 월급 일부를 떼어주는 건가, 착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절대 아니다).

어머나 이렇게 황송할 데가? 도대체 얼마를 줄 것이기에 사람 많은 데서 "많이 준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까? 도대체 나는 얼마나 많이 받는 거지? 역시 신문사 박봉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겠구나, 룰루랄라~~ 하지만 사람 많은 데서 돈 많이 준다는 이야기는 서른넷의 여자가 듣기엔 민망하고도 민망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그 분과 2년 가까이 작가와 피디의 수직상하 관계, 위계적 권력관계를 공고하게 유지하면서 일을 했다. 원고 쓰고 섭외하고 각종 잡무를 전부 다 커버하면서 장렬히 전사할 때 즈음, 내 원고료가 작가료 등급 A, B, C 가운데 가장 낮은 C등급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접하고 졸도할 뻔했다.

이 무슨 사기 행각이란 말인가? 많이 준다는 말을 하지 말 것이지... 작가가 무슨 한우 등급도 아니고 A, B, C는 또 뭔가? 나는 왜 가장 낮은 등급에 베이스를 깔아주어야만 했었단 말인가... 당시 처음 내가 받았던 월급은 100만 원이었고 그 방송국을 나올 때 받았던 임금은 약 130만 원이었다. 지금도 지역방송국에서는 작가들에게 140~160만 원의(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원고료를 지급하고 있다.

방송작가에게 임신·출산·육아는 남의 나라 이야기

그런데 여기,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방송작가 일은 힘들면서도 참 재미 있었고 재미가 있으니 열심히 하게 되었다. 오후 7시에 저녁 방송이 끝나도 바로 집으로 가긴 힘들었다. 아이의 기다림은 계속되었고, 딸 아이는 수화기 너머로 "엄마 언제와"를 되풀이했다.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하지만 난 다음 날 방송을 준비해야 했고 이틀 후에 내보낼 아이템도 찾아야 했다. 또 인터뷰이에게 보낼 질문지도 만들어야 했다.
몸과 마음 모두 힘들었으나 열심히 했고 마음속에 가득했던 불평불만은 삼켰다.

그러다 둘째를 임신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주변에 결혼하면서 퇴사한 작가는 있어도 결혼한 작가는 없었다. 임신을 한 작가는 내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출산을 하고 일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스러웠지만, 일을 계속 하기로 결심했고 출산 기간 중에 후배에게 방송을 부탁하는 등 모든 세팅을 셀프로 완료했다. 그러나 임신으로 심신이 지친 작가에게 배려는 없었다. 작가들은 모든 일에 이렇게나 주체적이다.

출산으로 얼마 동안 쉴지를 두고 이야기를 하던 중 PD는 "옛날에는 아이 낳고도 바로 밭에 가서 일했다"라는 반인권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방송국 을로 사는 작가는 "피디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요?"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말하지 못한 작가에게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인가?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가하는 상상은 아예 하지 마시길 바란다. 구조의 문제를 먼저 보실 것을 권해드리고 싶다. 난 아이를 낳고 밭에 나갈 수는 없었다. 나갈 밭도 없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한 달 반을 쉬고 바로 출근했다. 그 전에 또 한 가지 이야기를 꼭 좀 하고 싶다.

아이를 출산하자 병문안 행렬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중에 "밭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피디는 축하인사도, 병문안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노동자로 일하면서 이 정도 대우밖에 받지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에 비참했다. 출산 후에는 고통도 잊은 채 밭에 가야하고, 축하인사도 전하지 않았던 사람과 일하면서 태교가 제대로 되었겠는가? 나날이 분노는 쌓여만 갔고, 덕분에 둘째 아이는 어미의 분노 태교로 매우 까칠하다.

출산휴가는 남의 나라 이야기, 프리랜서 방송작가들에겐 달나라 이야기, 외부요원으로 배제되는 작가들은 원래 계급적 차이 때문에 꿈도 못 꿀 이야기다.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크게 없다.

출산 후 몸의 변화... '선글라스 투혼'을 아시나요? 

한 달 반 만에 복귀한 것이 무리였을까. 나의 손가락 관절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매일 20장이 넘는 원고를 써야했고, 모든 일은 생방송 시간을 기준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진행해야만 했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자판을 두드리는 게 힘들었고, 손가락 관절은 유체이탈된 것처럼 각자 따로 움직이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 뿐인가?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자니 눈이 부셔 죽을 지경이었다. 출산 이후 여성들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신체 변화를 알 것이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그래서 산후조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는데, 한 달 반 만에 복귀한 작가에게 컴퓨터 모니터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에어컨 바람이 눈으로 바로 들어온다고 상상해보라. 상상만으로도 눈이 시려 죽을 지경 아닌가? 눈물 난다.

그래도 나는 살아야 했기에 다른 방법을 찾았다. 50여명의 방송국 사람들이 일하는 사무실에서, 말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서로에게 굉장히 신경을 쓰는 기류가 강한 그곳에서, 선글라스를 낀 것이다. 손가락 관절은 유체이탈한 상황에서 선글라스를 끼었다는 이유로 "지금 뭐해요? 선글라스는 왜 끼고 있어요?"라는 질문까지 접수하면서도 난 묵묵히 일했다.

이후 피디가 교체되고 젊은 피디가 왔는데, 그는 "작가님 제가 산재 처리 되는 지 알아볼게요"라고 보무도 당당하게 총무부로 내려갔지만, 30분 후 축 쳐진 어깨로 나에게로 와 "작가님 안 된대요. 흑흑흑"라고 알려줬다. 지금 생각해도 그 피디가 참 고맙다. 장래가 유망했던 그 피디는 안타깝게도 명퇴를 하고 말았다. 이 글은 착취하는 피디와 착취당하는 작가의 이야기가 메인 줄거리다. 하지만 이 세상엔 나쁜 피디만 있는 건 아니다. 작가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내는 피디들도 많이 있으니 모든 피디 집단을 이 글의 등장인물화 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이명박근혜 시절, 작가 자존심 뭉개는 말

 방송은 오후 7시에 끝났지만, 난 퇴근할 수 없었다.

방송은 오후 7시에 끝났지만, 난 퇴근할 수 없었다.ⓒ 픽사베이


시간이 지나 지역의 다른 방송국으로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명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탄압도 많이 받았다.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모 정당에서 내가 하는 방송에서 전교조와 민주노총을 다룬다는 이유로 민원을 넣었고, 그것을 접수한 방송국장은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그 일도 "그냥 그 작가 잘라버려"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당시 방송부장의 방어로 무산되었다고 했다. 그 방송부장도 당시 이상한 국장 때문에 열 받아 방송국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이 바닥을 떠났다.

방송을 잘 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내일 방송을 그만두더라도 오늘 방송은 최선을 다해 해야 한다'고 스스로 채찍질을 했었는데, 언론탄압이 정점을 향해 달리던 그때 정치권의 민원을 받고 나선 "방송 잘하려고 하지 마라, 사고만 내지 마라"는 이야기를 주구장창 들어야만 했다. 이는 예민한 아이템 다루지 말고, 무난한 걸 하라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한 것이다. 심지어 훈훈한 방송을 하라는 요구도 받았다. 훈훈한 방송은 어떻게 하는 걸까? 보일러 방송? 땔감 방송? 뭐지 이게?

작가를 '외부요원' 취급하는 방송국

다 때려치우려고 했다. 희망이 없었다. 절망적이고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리 내 방송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도 작가들은 '외부요원'이라는 한 마디로 평가절하된다. 이 단어는 방송국 노동 환경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준다.

일에 대한 열정이 식어 더 이상 방송작가를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때쯤 '방송작가 노동조합(전국언론노조방송작가지부-방송작가유니온)'이라는 새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노조에 가입하고 방송작가 노조 출범식도 열었다. 지금은 작가 일을 그만두고 싶어도 노조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다. 행복한 변명이다.

최소한 이 판을 한 번 쯤을 흔들고 싶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방송작가의 처우가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최소한 나의 후배, 우리 후세대를 위해서 방송국의 부당한 노동환경을 개선하는데 힘을 보태고 싶다. 노조를 하겠다고 온 26살의 젊은 작가도, 50살이 넘은 작가들 모두 같은 마음이다. 우린 이렇게 서로에게 힘이 되고 감동을 주고 있다.

물론 방송작가 노조의 길이 꽃길만은 아니다. "도대체 노조가 뭐하는가? 도대체 노조가 뭐 할 건데?"라는 도전적 질문을 받을 때마다 "노조가 뭐 좀 해보자. 노조가 뭐 합니다"라며 우리의 전투력을 재정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남의 일을 내 일처럼 하는 노조 집행위원들은 언제나 감동이고 힘이고 희망이다.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당신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내고 싶다. "청춘이 쪼나? 갈 길은 간다." 방송작가유니온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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