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보다 캐릭터로 기억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신인 배우와의 인터뷰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이름이 아닌 캐릭터로 불린다는 것은 그만큼 연기를 찰떡같이 해냈다는 칭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우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이런 칭찬은 점점 듣기 어려워진다. 이름을 알리면 알릴수록, 필모그래피가 쌓이면 쌓일수록, 그 존재감을 지우기 쉽지 않다.

<내조의 여왕> 천지애, <넝쿨째 굴러온 당신> 차윤희, 그리고 <미스티>의 고혜란. 김남주는 그 어려운 일을 매번 해낸다. 2012년 <넝쿨째 굴러온 당신> 이후 6년 만에 출연한 드라마를 통해 김남주는 긴 공백기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미스티> 고혜란으로 6년 공백기 한 방에

 JTBC 금토드라마 <미스티>에서 고혜란 역을 연기한 배우 김남주.

김남주는 오랫동안 또래 여성들의 '워너비'를 연기해왔다. 성공한 여자, 아름다운 여자, 모든 걸 가진 여자, 그래서 닮고 싶은 여자. 실력과 야망으로 똘똘 뭉친 <미스티> 고혜란 역시 그런 인물이었다. ⓒ 더퀸AMC


"기대 이상이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너무 뜨거운 반응에) 개인적으로는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고혜란'이라는 캐릭터가 워낙 강력하고 매력적이기도 했지만, 2030대 여성 분들이 유리천장에 갇혀 발버둥 치는 고혜란의 모습에 많이 공감하신 것 같아요." 

김남주는 오랫동안 또래 여성들의 '워너비'를 연기해왔다. 데뷔 초기에는 <모델> <내 마음을 뺏어봐>와 같은 드라마를 통해 도시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주로 맡았고, 결혼한 뒤에는 <내조의 여왕> <넝쿨째 굴러온 당신> 등을 통해 일도 살림도 척척 해내는 미시족을 연기했다.

<미스티>에서 김남주가 연기한 고혜란은 현재 2030 여성들이 가장 바라고 꿈꾸는 캐릭터다. 성공한 여자, 아름다운 여자, 모든 걸 가진 여자, 그래서 닮고 싶은 여자. 실력과 야망으로 똘똘 뭉친 고혜란은 그런 인물이었다.

남다른 야망과 남다른 능력으로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에 앉았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매일을 산다. 자타공인 '최고의 언론인'으로 불리지만, 회사는 뛰어난 실력과 열정보다, 혜란이 '나이든 여자'라는데 집중한다. 또, 시어머니에게는 그저 '애도 낳지 못하는 며느리'일 뿐. 여자라서 더 참아야 하고, 더 많은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혜란의 처지는, 또래의 많은 여성들이기도 했다. 

"젊음이 네 실력 같지?". "선배들은 <뉴스9> 앵커 맡고 1년 차에 국장 달았는데, 전 지금 7년 차에도 여전히 부장이에요"라는 혜란의 대사에 여성 시청자들이 열광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고혜란이 견고한 유리천장을 부수고 훨훨 날아가길 바랐다. '고혜란 정도' 되는 여자도 유리천장에 갇힐 수밖에 없는 스토리도 답답하지만, '고혜란조차' 그 유리천장을 깨지 못하면 현실의 여성들은 그 천장을 부술 판타지조차 품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을 위해 달리던 고혜란은 결국 자신을 향한 남자들의 맹목적인 사랑에 발목 잡히고 말았다. 고혜란을 사랑한 시청자들에게 <미스티> 결말의 가장 큰 반전은, 케빈리(고준 분) 살인사건의 범인이 강태욱(지진희 분)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과 욕망을 후회하는 듯한 고혜란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성공보다 가족'... 고혜란과 다른 김남주 

 <미스티>의 한 장면

<미스티>의 한 장면 ⓒ JTBC


"시청자분들이 고혜란을 이만큼이나 응원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엄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면서까지 성공을 위해 달리는 혜란의 모습에 저렇게까지 지독하고 처참하게 인생을 살아야 하나 싶었거든요. 고혜란과 김남주는 다른 사람이에요. 저는 가족의 행복이 우선인 사람이고, 현재에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이거든요. 혜란처럼 산 인생이 좋은 결말을 맞을 수 없다는 작가의 의견에 공감했어요."

시청자들은 김남주와 고혜란의 싱크로율에 열광했지만, 정작 김남주는 자신과 고혜란은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많은 분들이 제가 굉장히 강하고 당당한 성격일 거라 생각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사실 전 매사 자신도 없고, 욕심도 없어요. 자존감도 낮고... <미스티>도 김승우씨가 할 수 있다고 권해주지 않았다면 도전하지 않았을 거예요." 

도시적인 외모 때문인지 데뷔 때부터 "오피스텔에 살 것 같고, 아메리카노만 먹을 것 같다, 음식도 고급만 먹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지만 김남주는 짜장면과 떡볶이를 좋아하고, 커피는 믹스커피만 마신다며 웃었다.

"어릴 때 너무 힘들고 가난해서 밤하늘의 별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건 고혜란과 비슷하지만, 고혜란은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계속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잖아요. 하지만 전 작은 일에 행복해하는 사람이에요. 그냥 돈을 많이 벌고 싶었고, 모델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서 기뻤어요." 

 JTBC 금토드라마 <미스티>에서 고혜란 역을 연기한 배우 김남주.

작품 초반 연기력 논란에 휩싸였던 진기주를 달래고 위로하는 것도 선배 김남주의 역할이었다. 신인 김남주에게도 그런 선배가 있었는지 물으니 "내가 신인 시절 바라던 선배의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 더퀸AMC


고혜란은 후배 한지원(진기주 분)에게 <뉴스9> 앵커석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발버둥 쳤다. 고혜란만큼은 아니지만, <뉴스9> 앵커석은 김남주에게도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자리였다. 뉴스 브리핑 연기할 때 가장 즐거웠다는 그는 후반부 한일철강 관련 리포트를 한지원에게 양보할 때도 '저걸 내가 해야 했는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며 웃었다. 

"어두침침한 혜란의 집과 달리 밝고 화려한 뉴스룸 세트가 좋더라고요. 앵커석에 앉으면 제가 세상의 여왕 같은 느낌도 들고. 하하하. 그런데 고혜란이 한지원에게 '어떤 이유로든 기회가 왔고, 넌 그걸 잡았어. 그럼 이제 <뉴스9>은 한지원의 <뉴스9>이야. 너는 한일철강에 대해 최초로 보도하는 앵커가 될 거다'라고 하잖아요. 전 이 대사가 그렇게 멋있더라고요. 떠날 때를 알고 멋지게 떠나주는 선배. 저도 그렇게 멋진 모습으로 떠나는 선배가 되고 싶어요."  

작품 초반 연기력 논란에 휩싸였던 진기주에게 '이겨내라. 배우는 굳은살이 박여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촬영 안 하고 욕 안 먹는 것보다, 일하면서 욕먹을 수 있는 게 행복한 거다'라며 조언해 주는가 하면, '시청자들이 고혜란 편이라 그런 거다, (한지원이) 혜란이 편으로 돌아서면 덜 욕 먹을 거다'라는 말로 후배를 위로하기도 했다.

"진기주씨와 1회 뉴스 분량 찍을 때 바짝 얼어있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신인 때 긴장하고 떨고 얼고... 저도 다 경험해본 일이잖아요. 그럴 땐 몰아붙이면 더 안 돼요. 그 느낌이 뭔지 아는데, 실수만 더 하거든요. 그래서 (웃으며) '떨리지?' 했더니 '선배님 앞이 안 보여요. 한숨도 못 잤어요' 하고 귀엽게 우는 소리를 하라고요. 그리곤 연습을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NG도 안 내고 해냈어요. 똘똘한 친구예요." 

현장에서 얼어있는 후배를 위해 장난을 치는 일도, 선배 김남주의 역할. 신인 김남주에게도 그런 선배가 있었는지 물으니 "없었다. 그래서 내가 신인 시절 바라던 선배의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마흔여덟, 내 나이가 자랑스럽다" 

 JTBC 금토드라마 <미스티>에서 고혜란 역을 연기한 배우 김남주.

마흔여덟이 된 김남주는 자신의 나이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 더퀸AMC


어느덧 나이 마흔여덟이 된 김남주. 그는 "나이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인생의 탑이 자랑스럽고, 드라마를 끝내니 아이들의 키가 훌쩍 자라있는 것도 기쁘다고. 그래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20대 배우들이 부럽지도 않다고 했다.

"결혼하고 4년 만에 <내조의 여왕>을 했고, 이후 <역전의 여왕>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 출연했어요. 이때 작품들이 다 잘 되긴 했지만, 늘 비슷한 캐릭터만 연기한다는 욕도 많이 먹었어요. 이후로도 비슷한 캐릭터가 들어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6년 공백기가 생겼죠. 

<미스티>는 너무 재미있는 작품이었고, 캐릭터도 너무 매력적이었지만 자신이 없었어요. 제 안에 전혀 없는 모습이거든요. 어렵게 도전했고, 그 역할로 성공을 거뒀다는 건 제게도 큰 의미예요. 무엇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 행운이죠. 전에는 48살에 주인공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못 했거든요." 

김남주는 "아이들의 기억에 남는 첫 작품이 성공을 거둔 것도 의미가 있다"며 웃었다. 이제 초등학생, 중학생인 아이들은 김남주의 연기하는 모습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고. 짓궂은 또래 아이들이 둘째 아이에게 '너네 엄마 늙어서 TV 안 나오지?' 하며 놀리는 통에 아이가 '엄마 왜 TV 안 나오느냐'고 묻기도 했단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너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이유였다.

후배들에게 희망 주는 선배 되고 싶다 

 미스티

"후배들이 저를 보면서 나이 먹고 결혼하는 거, 아이 낳는 거 겁 먹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윤여정 선생님이나 나문희 선생님 같은 분들이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갖는 것처럼요." ⓒ JTBC


김남주의 행복과 기쁨의 원천은 가족. '엄마'이자 '아내'의 삶에 충실했던 6년을 보내고, 다시 배우 김남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혹독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연기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마다 "노력을 보상받는 느낌이라 울컥했다"고 했다.

"시작할 땐 분명 대단한 성공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잃는 것만 없어도 만족하자'는 마음이었어요. 결과적으로는 40대의 열정을 모두 쏟아부은 기분이었죠. 현장에서도 '나 <미스티> 끝내고 은퇴할 거야'라고 말하곤 했어요. 앞으로 고혜란만큼 멋지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다시 내게 올까 싶었거든요. 

이번 작품을 통해 10대 20대 여성 팬들도 많이 생기고, 좋은 말도 많이 들었잖아요. 후배 여배우들에게 희망이 된 것 같아 기쁘기도 해요. 저를 보면서 나이 먹고 결혼하는 거, 아이 낳는 거 겁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윤여정 선생님이나 나문희 선생님 같은 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갖는 것처럼요. 그래서, 이제 오래 쉬고 싶지 않아요. (웃음)" 


미스티 김남주 고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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