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오브 마스크

맨 오브 마스크 ⓒ 라이크 콘텐츠


이전에도 썼지만 프랑스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바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 우리 사회 화법과 전혀 다른 '이방인의 언어'는 매혹적이지만, 종종 난독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론 모호하고 때론 기괴한 언어들이 도달하는 곳이 결국 인류 보편의 감성과 주제의식이라는 걸 영화 <맨 오브 마스크>(2018.4)는 일깨워준다.

<맨 오브 마스크>는 형사 베르호벤 시리즈로 인기를 얻었던 추리 소설가 피에르 르메트르에게 영광의 콩쿠르 상을 안긴 <오르부아르>를 원작으로 한다. '오르부아르au revoir'는 영어의 굿 바이(good bye)와 같은 '또 보자'란 프랑스식 인사말이다.

하지만 소설의 제목 <오르부아르>에는 보다 처절한 역사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오르부아르'로 번역된 소설에는 là-haut가 생략되어 있다. au revoir  là-haut는 '천국에서 만나요'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1차 대전 당시 국가 반역죄로 총살을 당한 장 블랑사르라는 군인이 죽기 전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문구에서 인용한 말이다.

전쟁의 볼모가 된 병사들

프랑스는 1차 대전 당시 명령 불복종, 자해, 탈주, 비겁 행위, 반란 등의 명목으로 2400여 명의 병사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 중 600여 명이 실제로 총살되고, 나머지는 강제 노역형을 받았다. 과연 사형을 선고받은 2400여 명의 병사들에겐 죄가 있었을까? 피에르 르메트르는 아내에게 '천국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남기고 총살 당한 장 블랑사르의 그 유언과 같은 문구를 100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책 제목으로 삼으며, 전쟁터에서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병사들을 희생시킨 국가와 전쟁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며 반문한다.

그리고 그 '반문'을 위해 영화는 1차 대전의 종전을 앞둔 113고지의 전선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 당긴다. 그곳에선 장훈 감독이 2011년 내놓은 영화 <고지전>과 같은, 아군의 시체에 난 총상을 두고 의문스런 상황이 벌어진다.

이제는 전쟁이 더 지속되지 않을 것이란 점을 감지한 병사들은 총을 들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전쟁의 종식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전쟁'을 통해 획득한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잃고 싶지 않은 중위 프라델(로랑 라피트 분)은 가장 나이 많은 병사와 제일 어린 병사 두 사람을 척후병으로 내보내고,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사라진 두 사람의 생명은 종식된 전쟁을 아수라장의 전장으로 복귀시킨다.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총검을 들고 참호 밖으로 나와 전진해야 했다. 하늘을 뒤덮는 포탄 세례 속에서 알베르(알베르 뒤퐁텔 분)는 말과 함께 매몰되는 처지에 빠진다. 말 때문에 겨우 숨을 쉴 수 있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던 그를 동료 병사였던 에두와르(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분)가 끌어당겨 구한다.

하지만 동료의 생명을 구명하는 에두와르의 행위는 곧 자신을 포탄의 저격 대상으로 만들고, 한 발의 포탄과 함께 그는 날라가 버린다. 입을 잃은 에두와르가 이후 정신을 차린 곳은 병원 침상이었다. 그 옆에는 죽어가는, 아닌 죽고 싶어하는 그를 열심히 간호하는 알베르가 있었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파리로 돌아오지만, 이후에도 그들은 전쟁 전의 자신들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알베르는 과거 은행 출납원이었지만, 다시 은행의 안정적인 일자리는 보장받지 못했다. 알베르는 결국 엘리베이터맨에서 광고 샌드위치 맨으로, 하락에 하락을 경험한다. 그나마 행운인 사실을 찾는다면, 그에겐 멀쩡한 신체가 있다는 것 정도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조잡한 가면과 잘 될지 알 수 없는 재건 수술마저 거부한 '천재화가' 에두와르는 알베르가 훔쳐오다시피한 모르핀에 의존해 절망의 나날들을 버텨간다.

끝나지 않는 전쟁


 맨 오브 마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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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전쟁터에서 돌아왔지만 각자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 세 남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전쟁과 전쟁의 상흔을 소비하는 프랑스 사회에 대한 통찰이 있다. 전쟁을 도발하면서까지 자신의 명예와 지위에 집착했던 프라델은 '전쟁'의 상흔에 감성팔이하는 사회를 이용하고 병사들을 활용해 부를 축적하고자 한다.

알베르와 에두와르는 국가를, 그리고 '전쟁'을 감성적으로 소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를 벌인다. 그들의 의도야 어떻든 그들은 '사기'의 주범이 되지만 프랑스 사회와 사람들은 '눈 가리고 아웅'인 이 사기극에 기꺼이 마음과 돈을 내어준다. 그 중에는 자신의 사업을 이어받을 재목이 아니라며 어릴 적부터 외면해오다, 뒤늦게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들에 대한 회한으로 거금의 기념비 사업 자금을 낸 에두와르의 아버지 페리쿠르도 있다.

사기로 원하던 돈을 받아들고 기뻐하던 알베르, 그런 알베르에게 에두와르는 자기가 돈을 조금 써도 되겠냐고 묻는다. '당연히 네가 번 돈이니 얼마든지 쓰라'는 알베르의 답. 잠시 후 에두와르는 돈다발 갈기털이 휘날리는 멋진 사자 가면을 만든다. 에두와르에게 돈의 효용은 거기까지였다. 파리의 가장 화려한 호텔에서 벌인 파티도, '돈을 가지고 도피하자'는 알베르의 권유도 그에겐 위로가 되지 않았다.

한 판의 사기극 이후에 화려한 새의 가면을 쓴 채 공허한 눈빛으로 앉아있는 에두와르. 그의 모습은 '사회적 트라우마'는 물직절 대가로 회복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최근 4주기를 맞은 세월호 참사를 둘러싸고 다시 한 번 재연되고 있는 '지겹다'는 돌림 노래에 대한 삼풍 백화점 참사 피해자의 호소문 속 심정도 이와 같을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런 종류의 불행과 맞바꿀만한 보상금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나 역시 당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그 돈이 그 후의 인생에 도움이 됐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일을 피하고 그 돈을 안 받을 수 있다면, 아니 내가 받은 보상금의 열배를 주고라도 그 일을 피할 수만 있다면 나는 열 번이고 천 번이고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당신들은 모른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잘 모른다. 이런 사건 사고가, 개인의 서사를 어떻게 틀어놓는지. 사고 이후로 나는 세 번이나 자살 기도를 했다. 한순간 모든 것이 눈앞에서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을 본 후로 나는 세상에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고 언제나 죽음은 생의 불안을 잠재울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그깟 돈이 삶의 이유가 되어 줄 수 있을까." - 산만언니, 딴지 일보 자유게시판

어린 소녀의 공감어린 위로도, 알베르의 우정도, 사기를 통해 획득한 일확천금도, 그리고 그 사기의 목적이었던 사회와 국가, 그리고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조소와 복수도 에두와르의 삶을 회복시켜주지 못한다.

뒤늦은 아버지의 참회를 불러온 에두와르의 재능은 아름답고, 절묘하고, 때론 기괴하기 까지 한 그의 가면으로 빛난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재능과 삶을 빼앗아 간 프랑스 사회에 대한 대국민 사기극의 수단이 된다. 아름답고 처연한 가면극과 미술적 재능을 군불 삼아 피어난 사기극의 여정이 향하는 건, 결국 '전쟁'에 대한 질문이다.

1920년 전쟁을 잊어버리고자 요동쳤던 프랑스 사회에서 벌어진 사기극과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지막에 말하고자 하는 건, 1차 대전으로 상징된 사회적 참사에 대한 도덕적 질문이다. 과연 전쟁은 누굴 위해서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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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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