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따로 공부하거나 알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페미니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소개하고 생각을 더해 읽어주려고 합니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지만 어려운 사람들, 페미니즘에 대한 몰이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 드라마, 책, 방송 등을 보고 읽으며 전달하겠습니다. 아직 페미니즘이 어색한 당신, 페미니즘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저와 함께하지 않으실래요? - 기자 말

 금발머리에 화려한 원피스, 친절한 미소를 한 여성들이 비슷한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다.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깔깔 웃어댄다. 2004년 개봉한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의 한 장면이다.

금발머리에 화려한 원피스, 친절한 미소를 한 여성들이 비슷한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다.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깔깔 웃어댄다. 2004년 개봉한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의 한 장면이다. ⓒ CJ 엔터테인먼트


금발머리에 화려한 원피스, 친절한 미소를 한 여성들이 비슷한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다.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깔깔 웃어댄다. 2004년 개봉한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의 한 장면이다. 프랭크 오즈 감독의 이 작품은 여성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고 싶어 하는 고정관념에 대해 통렬하게 비웃는 블랙코미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 애니메이션 '심슨가족' 속 한 에피소드에 대해 말해보자. 오랫동안 소녀들의 인기를 독차지해온 인형 '말리부 스테이시'에 대한 에피소드다. 심슨의 딸인 리사 심슨은 고대하던 말리부 스테이시 인형을 구매하게 된다. 녹음된 내용이 흘러나오는 이 인형에서는 이런 말들이 나온다.

"남자들을 위해 쿠키를 굽자."
"남자들이 우리를 좋아하게 화장품을 사자."

이 소리를 듣고 리사 심슨은 크게 실망하게 된다. 소녀들을 외모에 집착하고 돈 많은 남편을 잡는 것에만 몰두하는 골빈 여자들로 만들려는 인형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사는 말리부 스테이시 같은 인형은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고 대책을 세우자고 가족들에게 말하지만 리사의 엄마는 인형은 문제가 없다며 이렇게 말한다. "딸기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면서 골치 아픈 것은 잊자." 말리부 스테이시가 계속 외치던 말과 똑같이.

<스텝포드 와이프>을 관통하는 흐름도 심슨의 이 에피소드와 비슷하다. 금발머리, 큰 가슴에 마른 몸매, 집안일과 요리를 잘하고 멍청하고 순종적인 여자. 남성협회를 중심으로 한 남편들의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조작하여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말함)이 만들어낸 고정관념과 그것을 몸으로 통째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부인들의 모습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상들

 <스텝포드 와이프>에서는 조안나, 보비, 로저 세 사람이 이에 맞선다. 강인하고 주체적인 능력있는 여성, 그동안 강요되던 전형적인 여성적인 역할과는 거리가 먼 여성, 성소수자로서 남성적이지 못하고 여성적인 남성. 서로 많이도 다른 이들의 연대는 조용하던 스텝포드 마을에 큰 돌멩이를 던져 파장을 일으킨다.

<스텝포드 와이프>에서는 조안나, 보비, 로저 세 사람이 이에 맞선다. 강인하고 주체적인 능력있는 여성, 그동안 강요되던 전형적인 여성적인 역할과는 거리가 먼 여성, 성소수자로서 남성적이지 못하고 여성적인 남성. 서로 많이도 다른 이들의 연대는 조용하던 스텝포드 마을에 큰 돌멩이를 던져 파장을 일으킨다. ⓒ CJ 엔터테인먼트


주인공 조안나 에버트(니콜 키드먼)는 잘 나가는 방송국 CEO로 등장한다. 기획하는 프로그램마다 성공을 거두는 그녀는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프로그램의 내용은 주로 남성과 여성이 대립하는 구도. 여성들이 통쾌하게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그러다보니 프로그램에서 상처를 받은 한 남성으로부터 총격 테러를 당한다. 이 파장으로 인해 그녀는 결국 회사로부터 해고당하고 충격으로 신경쇠약까지 겪는다.

남편인 월터는 조안나에게 새로운 시작을 권유하며 스텝포드로 이사할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부부는 스텝포드로 이사를 가게 되고 그 곳에서의 삶이 시작된다. 비록, 회사로부터 해고를 당했지만 조안나는 여전히 주체적이고 똑똑하다. 같은 여성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녀는 능력 있고 강인한 주체적 여성의 상을 대변한다. 도움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적극적으로 발언을 할 줄 안다. 남자 앞이라고, 강자 앞이라고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해고를 당했을지언정 떳떳한 모습을 잃지 않고 오히려 행운을 빌어주며 걸어 나오던 그녀다. 비록 이후에 신경쇠약까지 걸렸다고 해도. 똑똑하고 능력 있으며 운동에 사교 능력까지. 그녀는 우월한 여성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조안나와 친하게 지내는 작가인 보비 마코위즈(베트 미들러)는 또 다른 여성의 상을 보인다. 여러 관계로부터 얽매이기보다는 자유롭기를 소망하며 집안일은 관심 밖이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그녀는 자신을 꾸미는 데에도 관심이 없다. 그녀에게 자신의 모습은 외모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자신의 책이니까.

성소수자인 로저  바니스터(로저 바트)도 있다. 게이인 그는 화려한 셔츠를 즐겨 입고 높은 톤으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개인이다.(사회에 퍼져 있는 고정적인 성 관념에 따른다면) 한마디로 그는 남자답지 않은 남자다.

조안나, 보비, 로저 세 사람은 스텝포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이상함을 느낀다. 그들은 각자 다른 인간상들을 보이고 있으나 마을 안의 다른 이들에게서는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을 안 대다수 여성들은 남편의 말에 순종적이고,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며 금발에 날씬한 몸매로 비슷하게 예쁘다. 세 사람은 똑같은 조화들 사이에 놓인 다른 종의 생화을 보는 것처럼 눈에 띈다.

성 고정관념에 맞서는 개인들의 연대

잠시 심슨의 에피소드를 다시 이야기 해보자. 리사 심슨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녀는 이상함을 느끼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고정관념의 화신 같은 인형이 소녀들을 멍청하게 세뇌하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직접 말리부 스테이시의 창작자를 찾았고 새로운 인형을 만들었다. 바로 리사 라이온하트. 밝은 미래를 이야기하고 자신의 주체성을 밝히는 이 인형은 화제가 되지만 결국 새로운 모자를 쓴 말리부 스테이시에게 밀려난다. 그래도 단 한 명의 아이가 리사 라이온하트를 구매한다. 그리고 리사는 말한다.

"저 아이 한명이라도 깨닫는다면 이 모든 것이 가치 있는 일이 될 거예요."

수십 년 이상을 자리 잡아 온 성 고정관념을 깨는 일은 쉽지 않다. 남성들에게는 지배하고 싸우기에 적합한 모습을, 여성에게는 순종적이고 아름답기를 강요해 온 시간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작은 반동에도 변화는 제 자리로 돌아가 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은 사람들을 조금씩 변화시켜 왔다.

여성 참정권에 관한 내용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는 세탁 노동자인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가 참정권 운동에 조금씩 참여하는 내용을 그린다. 당초 그녀는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는 등 과격한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 서프러제트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후 계속되는 여성 인권 유린의 현장을 목도하고 경험하게 되면서 함께하게 된다. 페미니즘은 이렇게 한 명, 한 명의 동지를 만들어가며 불사의 성 고정관념과 지독하게도 싸워왔다.

<스텝포드 와이프>에서는 조안나, 보비, 로저 세 사람이 이에 맞선다. 강인하고 주체적인 능력있는 여성부터 그동안 강요되던 전형적인 여성의 역할과는 거리가 먼 여성, 그리고 성소수자로서 남성적이지 못한 남성까지. 서로 많이 다른 이들의 연대는 조용하고 잔잔하던 스텝포드란 마을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이후 이들은 강력한 남성들의 조합을 조금씩 파헤쳐간다. 그리고 깨닫는다. 남성 개개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그들은 능력 있는 부인들에게 남성성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여성들은 능력 있었고 강했고 언제나 남편들을 앞섰다. 대단한 부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빼앗을 것이라 여긴 남편들은 모였고 부인들을 세뇌했다. 자신들을 남자로 만들어 줄 부인이 되기를 원하며.

그렇게 남편을 믿었던 부인들은 조금씩 공장에서 찍어낸 로봇처럼 똑같아졌고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스텝포드 마을이 완성됐다. 끊임없는 가스라이팅 세례는 결국 3인의 연대도 무너트리기 시작한다. 로저에게는 강인한 남성의 모습을, 보비에게는 아이들을 챙기고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 주부의 모습을... 다시금 이들에게 성 고정관념이 자리 잡을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핵심은 그것이었다. 바로 남편의 연대. 남성조합을 깨기 위해서는 남편의 연대가 필요했다. 조안나의 남편 월터, 남성 조합과 어울리면서 금발의 순종적인 아내에게 점점 더 호기심을 갖는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가 중요했다.

성 대결이 아닌 성 연대가 만들어낼 변화

 영화의 의도적 장치였다. 남편 월터에게 키를 쥐어준 것은. 이것은 페미니즘의 나아가는 방향이 결코 남성과 여성의 성 대결이 아님을 시사한다.

영화의 의도적 장치였다. 남편 월터에게 키를 쥐어준 것은. 이것은 페미니즘의 나아가는 방향이 결코 남성과 여성의 성 대결이 아님을 시사한다. ⓒ CJ 엔터테인먼트


남편 월터에게 키를 쥐어준 것은 영화의 의도적 장치였다. 이것은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결코 남성과 여성의 성 대결이 아님을 시사한다. 영화 초반 조안나에게 인기를 가져다줬던 프로그램들을 보자.

'더 잘할 수 있어요'에서는 부부를 한 섬에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각각 성매매여성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남편은 유혹을 참아내고 부인만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부인은 그렇지 않다. 그동안 한 명의 남편만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절제해왔을 그녀는 몸 좋은 여러 명의 남성에게 마음을 뺏긴다. 그리고 외친다. "나는 더 잘할 수 있어요."

다른 프로그램은 대놓고 성 대결이다. "누가 돈을 더 많이 법니까", "누가 철인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등의 질문에 여성이 승리한다. 여성 > 남성의 논리다. 이렇듯 조안나는 여성과 남성의 대결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주로 제작하며 인기를 얻었다. 조안나는 여성들에게 억지로 성 역할을 강요하는 사회에 맞서 남성과의 대결을 해왔던 것이다.

여기에 영화는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조안나에게 연대가 깨지는 경험 등 '막다른 골목'을 제공한 뒤 이를 해결할 열쇠를 남편인 월터에게 쥐여주는 것이다. 결국 남자와 연대할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여성이 남성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성 대결이 아닌 성 연대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의 남성성을 잘난 여성들에게 뺏겼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완벽한 남성, 여성이라는 것은 없고 그저 잘못된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각 개인은 특별한 역할을 강요받을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을. 그렇기에 월터가 열쇠를 제시 받은 후 어떻게 행동할지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볼 수 있다. 월터가 깨달음을 얻고 고정관념의 문을 열 것인지, 아니면 로봇 같은 아내를 끼고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할 것인지...

2004년에 개봉한 영화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제시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페미니즘을 '여성들의 인권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비하하는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한 몰이해로 변화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다.

성역할 고정관념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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