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상에서 시청자들을 상대로 '먹방'을 보여주는 BJ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이 이토록 무궁무진하게 발전해 나갈 거라 상상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블을 비롯한 지상파에도 먹방 방송이 넘쳐났다. 대다수 방송들이 오로지 '먹는 것'에 집중하던 때 tvN <수요미식회>(2015)의 등장은 신선하고 획기적이었다. 눈 앞에 질펀하게 한 상 차려 놓지 않고 진행하는 '먹방'이라니.

물론 <수요미식회>에도 '먹는 장면'은 등장한다. 프로그램 출연자들이 이야기를 나눌 대상 음식점에 미리 가 돈을 내고 사먹는 모습이 그것이다. 하지만 <수요미식회>에는 으레 다른 먹방들이 추구하는 시각적 자극이 철저하게 배제된다. 다만 출연자들이 이야기 주제인 음식을 상상하며 자신들만의 언어로 디테일하게 표현한다.

출연자 중 한 명인 요리연구가 홍신애는 고기 부위를 상상하며 기꺼이 자신의 몸을 예로 들고 가수 이현우의 은유 가득한 맛의 평가는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았다. 여기에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의 풍성한 평론이 곁들여지면, 시청자들은 말로 풍성해진 한 상을 잘 차려받은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형식은 꾸준한 인기의 비결이 되었다.

지난 3월 7일 첫 방송을 한 HISTORY(히스토리) <말술클럽>과 3월 31일부터 방송되고 있는 <상상식탁>(4부작)은 바로 이런 <수요미식회>의 맥락을 계승하여 특화, 발전시킨 프로그램들이다.

최근 3년차를 맞은 <수요미식회> 속 말의 깊이가 예전과 좀 다르다. 게스트들의 맛집 순례는 여전히 맛깔스럽지만, 회를 거듭할 수록 출연진들의 멘트에선 그들의 내공보단 작가들의 고군분투가 더 느껴진다. 그런 가운데 등장한 tvN <알쓸신잡>은 인문학과 먹방의 콜라보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전통주를 소개했을 뿐인데...

 말술 클럽

말술 클럽 ⓒ 히스토리


<말술클럽>은 말 그대로 '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다. '술' 하면 빠질 수 없는 애주가들을 비롯해 '술칼럼니스트'까지 모여 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에 '히스토리' 채널의 특색이 가미돼 눈길을 끄는 지점이 생긴다. 이 방송에 등장하는 술은 그저 술이 아니라, '전통주'다. <말술클럽>은 한 번 맛을 보면 '세상에 이런 맛이'라며 대다수가 놀라는, 2000여 개에 달하는 우리나라 전통주와 그 전통주를 빚는 '전통주 명가'를 소개한다.

술을 매개로 시작된 프로그램이지만 여기에 '전통'이라는 색채가 더해지며 한국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로 발전해간다. 우리 민족이 억압 받던 시절, 술 문화라고 다르지 않았다. 일제시대엔 일본식 주조 방법 이외에는 사용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청주'도 본래 갈래를 상실한 채 '약주' 혹은 '맑은 술'이란 애매모호한 장르로 둔갑됐다. 방송은 청주의 연원에서부터 막걸리, 주막이야기까지. 돈이 무거웠던 시절엔 '주막 네트워크'가 형성되기도 했다. 서울 근교 주막에 돈을 맡기고 받은 영수증 하나로 다른 주막에서 술을 먹을 수 있고 마지막 주막에선 남은 돈을 받을 수도 있었다.

방송은 '전통주'라는 주제에서 시작해 수능 국어영역의 <국선생전>(고려시대 문인 이규보가 지은 가전작품) 등 '한국사 탐험'으로까지 이어진다. 물론 거기에 뜯고 맛보는 전통주의 미식 연찬회는 기본이다.

'주당' 장진 감독과 박건형, '주류계의 알파고'라는 호칭에 딱 맞는 전통주 전문가 명욱의 해박함과 <메이드 인 공장> 등을 통해 사물에 대한 재기발랄한 혹은 애정어린 천착을 선보인 바 있는 김중혁 작가의 박학이 어우러져 눈길 끄는 '전통주 탐험기'가 완성된다.

횡적인 비교사 프로그램 <상상식탁>

<말술클럽>이 '전통주'를 매개로 한 한국사의 탐험이라면, EBS에서 선보인 <상상식탁>은 횡적인 비교사의 프로그램이다. 이제 2회를 방영한 이 프로그램이 선택한 주제는 사랑, 정치, 전쟁 등이다.

정치의 편에서 최근 한미 정상회담 만찬에 등장하여 화제가 된 '독도 새우'부터 2차 대전을 앞두고 방문한 영국의 조지 6세에게 대접했다는 미국의 길거리 음식 '핫도그'까지 정치의 중심에서 세계를 변화시킨 음식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지식'의 장을 연다.

'전쟁 편'을 연 건 육포다. 대다수가 '전쟁' 하면 싸우는 것만 생각하지만, 정작 '전쟁'에서 관건이 되는 건  '병사들이 먹고 싸울 수 있는 식량'이다. 바로 그 '식량 배급' 문제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준 몽골의 육포는 곧 그들의 세계 정복을 가능케 한 신의 한 수라고 <상상식탁>은 정의 내린다.

방송은 전쟁이라는 과정 속에 또 하나의 변수가 된 전쟁의 식량으로 영국의 '피시엔 칩스'를 조명한다. 1, 2차 대전 과정에서 전쟁터가 된 영국 국민들이 '배급 물품'에서 제외된 '생선'과 '감자'로 '기아'를 버텨냈다는 이야기다. '음식'이 곧 역사의 산 증인이 된 것이다.

이미 채널A <외부자들>을 통해 전문적 영역 MC로서 인정을 받은 남희석이 '인문학 MC' 자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자칫 황교익으로 '과점'화될 우려가 제기된 '음식 평론계'에 새롭게 등장한 음식 전문기자 유지상, 건축이 직업이지만 음식 비평이 특기가 된 이용재가 합류하여 음식 평론의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상상식탁

상상식탁 ⓒ ebs


거기에 팟 게스트 <지대넓얇>의 이독실이 '공대생 특유의 장기를 살려 데워먹는 전투 식량을 실험해본다'는 식으로 자칫 처질 수 있는 방송 분위기에 활기를 불어 넣는다. 사랑을 주제로 한 방송에는 심리카운슬러 박상희가 나왔고 정치편에는 전여옥 전 의원이 전쟁편에는 군사전문가 양욱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출연해 깊이를 더했다.

물론 과연 이 두 프로그램들이 전통주의 홍보를 넘어, 혹은 이미 한편에서는 상식이 되어가는 인문학적 지식의 '편집'을 넘어서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남는다. 하지만 '먹방'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가지고 '인문학' 등 시청자들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영역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려는 건 반가운 일이다.

전통주와 음식의 역사에서 발견하게 되는 '인간들의 삶'은 먹고사니즘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부디 이러한 시도들이 활발하게, 다각도로 진행되어, 방송의 질을 높이는 데 일조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상상 식탁 말술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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