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업사이드다운>

세월호 참사를 다룬 영화 <업사이드다운> ⓒ 시네마달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결과는 익히 알려진 대로다. 476명의 탑승 인원 중 생존한 사람은 172명. 304명의 승객이 사망했다. 당혹스러웠다. 배는 누구도 모르는 사이 순식간에 가라앉은 것도 아니었다. 점점 기울어지는 세월호의 모습은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나처럼 방송을 보던 많은 사람들은 마음은 졸이고 있었겠지만 신속하게 움직이면 모두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마주한 결과는 참담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세월호 참사는 정쟁의 소재가 되어 있었고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특별법 제정은 계속 미뤄졌다. 유가족들은 정부의 책임 있는 해결을 촉구하며 청와대를 찾았지만 박근혜 정권은 경찰 차벽으로 응답했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도 점차 이상해져갔다.

지겹다는 말이 나왔다. 교통사고나 다름없는 일인데 어떻게 대통령에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이냐는 주장도 등장했다. 유가족들이 해도 너무 한다는 볼멘소리가 점점 더 많이 들렸다. 보상금을 얼마나 받으려고 저러냐는, 아니 이미 유가족들이 수억의 돈을 챙겼다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이나 평소에도 제정신일까 의심스럽던 극우 언론인들 입에서만 나오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터넷에서도 택시를 타도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주변의 평범해 보이는 어른들도 쉽게 그런 말을 뱉었다.

끔찍했다. 나는 그 때 사람은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단지 지옥을 떠날 뿐이라는 문장을 되뇌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광경이 하나가 있다. 진상 조사를 촉구하며 단식 시위를 하는 유가족이 뉴스에 등장한 날,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도대체 왜 저럴까."

 영화 <업사이드다운>

영화 <업사이드다운>의 한 장면. ⓒ 시네마달


왜 사람들은 '지겹다'고 말했을까

누가 살아야 한다는 의미일까. 유가족들이? 아니면 그들을 제외한 우리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 때 살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왜? 남겨진 사람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해서? 계속해서 추모를 했기 때문에? 왜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분노하는 사람을 같은 공동체 안에 두고 우리는 제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걸까.

영화 <업사이드다운>에서 공정식 코바 범죄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은 그런 사람들이 유가족들의 고통에 일정정도 공감을 하고 있다고 본다고. 때문에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회피를 하는 것이라고. 지겹다고 말하고 정치나 경제적인 면에서 발목을 잡히고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입한 그 고통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었을까. 다른 대형 참사를 두고 사람들은 손쉽게 '지겹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왜 누군가는 그런 비인간적인 말을 하면서까지 외면하고 싶어 했을까. 도대체 세월호 참사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말이다.

<업사이드다운>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다각도에서 탐구한고 갈무리한다. 결론을 요약하자면 막막하기 그지없는 총체적 난국이다. 구조, 예방, 사후 조치 등 어떤 것 하나 제대로 이루어진 게 없었다. 국가도 언론도 정치와 행정도 이 초유의 긴급 사태 앞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이는 새로운 사실도 아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예견된 사건이었음은 이미 몇 년 간의 분석 끝에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영화 <업사이드다운>

영화 <업사이드다운>의 한 장면 ⓒ 시네마달


차마 마주하기 힘든 불편한 진실

<업사이드다운>은 익히 알려진 사태의 원인을 하나의 키워드로 수렴한다. 이윤 혹은 이익, 이기주의다. 가령 정부 발표를 받아쓰는 보도에 너무도 잘 길들여진 언론들은 보도경쟁 때문에 '전원구조'라는 초유의 오보를 터트렸다. 빨리 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할수록 더 많은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과 유가족들의 고통이 새로운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자 이후에는 유병언 추적에 대한 보도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에 출연한 CBS 변상욱 기자의 분석에 따르면 그 소식들은 마치 수사극을 보는 듯한 흥미를 독자와 시청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의 역할은 무엇보다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지만 이들은 이익에 눈이 멀어 그 자격을 포기했다.

그러는 동안 정부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테드 겁 에머슨 대학 언론학과 학장은 이렇게 언급한다. 진실이 드러나게 되면 사람들은 더 많은 행동을 요구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정부는 성난 국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더욱 자극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에게 그 선택은 해경 해체였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결국 정부는 진정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사람들을 조용히 만들고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쇼를 벌인 셈이다. 정부와 언론뿐일까. 애초에 세월호 침몰 원인으로 지목된 부족한 평형수와 선박 과적, 그리고 무리한 증축 역시도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들이 자신 있게 안전규정을 어긴 이면에는 거액의 돈을 받고 뒤를 봐준 퇴직 관료들의 존재했다.

 영화 <업사이드다운>

영화 <업사이드다운> 포스터 ⓒ 시네마달


세월호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것

<업사이드다운>에서 더불어 민주당의 진선미 의원은 말한다. 민주주의의 통제와 시민의식의 강화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명정대함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 자원의 분배는 어그러진다. 그래서 누구나 원칙을 지키면 자신만 손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것부터 챙기게 된다. 낯설지 않다. 우리는 그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살아온 지 오래다. 그런 행태들이 뭉쳐 거대한 부조리를 형성할 때까지도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은 것은 그것에 이미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300여 명의 소중한 목숨이 한 순간에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적응해버린 이 세상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업사이드다운. 영화의 제목처럼 누구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밑바닥까지 내려와버렸고 그게 자연스러운 듯 살아왔다.

어쩌면 회피의 욕구는 그래서 발생하는지도 모르겠다. 세월호 참사의 진정한 원인은 제도의 결함과 개인의 무능을 넘어 보다 근본적인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세상을 다시 뒤집지 않으면 바닥은 다시 아래를 향할 수 없다. 사회 조직과 체제뿐만 아니라 이를 기초로 형성된 인식과 정서가 완전히 뒤바뀌어야 한다. 무너진 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익숙한 부정은 규모에 상관없이 지속될 것이다. 그다지 쓰고 싶지 않은 거창한 말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적합한 표현일 정도로 이 일은 거대하고 막막하기 그지없다.

차라리 눈을 질끈 감는 것이 속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공정식 연구소장의 말처럼 그렇게 외면한다면 같은 일은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드러낸 진실을 우리는 계속해서 마주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업사이드다운>은 서두에서 언급한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에 이렇게 답하는 듯했다.

중요한 건 산 사람이 사는 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영화 <업사이드다운>

영화 <업사이드다운>의 한 장면 ⓒ 시네마달



세월호 업사이드 다운 진실 민주주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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