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용 감독

한국 멜로의 거장으로 꼽을 수 있는 곽재용 감독이 일본과 협업한 영화 <바람의 색>을 들고 관객과 만난다. ⓒ 이정민


다시 멜로의 바람이 분다. 최근 개봉한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200만 관객을 넘기며 흥행하자 일각에선 한국 멜로 장르의 부활을 점치고 있다. 멜로하면, 이 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대와 2000년 초반을 통틀어 한국 관객들이 함께 울고 웃었던 여러 멜로 대표작을 연출한 곽재용 감독이다.

<비오는 날의 수채화> <엽기적인 그녀> <클래식> 등 곽 감독의 인장이 담긴 여러 멜로 영화는 그간 몇몇 한국영화에서 오마주하기도 했다. 2016년 SF 영화 <시간이탈자>로 색다른 도전을 했던 그가 최근 일본과 협업한 <바람의 색>을 들고 왔다. 역시 멜로다.

홋카이도와 도쿄 사이  

언제부턴가 곽재용 감독은 한국을 넘어 일본과 중국 등 범 아시아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싸이보그 그녀>로 일본 배우와 작업했고, <미스 히스테리>로 중국과 합작을 경험했다. 한국을 넘어 곽재용표 멜로의 명성이 아시아 곳곳에 퍼져있다는 증거다.

<바람의 색>은 후루카와 유우키, 후지이 타케미 등 일본 신예 배우가 출연했다. 영화는 도플갱어(자신을 닮은 또 다른 존재가 세상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개념)라는 소재를 가지고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엇갈리고, 만나는 과정을 그렸다. 일본 홋카이도 지역과 도쿄를 오가며 담은 풍광이 아름답다. 영화 속 주요 배경에 인물의 감성을 풀어내며 감독은 극적 효과를 노렸다. 

 영화 <바람의 색>의 한 장면.

영화 <바람의 색>의 한 장면. ⓒ 아시아픽쳐스엔터테인먼트


- 홋카이도의 여러 마을과 도쿄, 그리고 정지된 사진 이미지를 활용해, 사계절이 영화에 다 담긴 느낌이 난다. 총 제작 기간이 궁금하다.
"43일 만에 찍었다. 2015년 3월 5일부터 4월 25일까지. 3월에 겨울풍경을 담고, 동경에 가니 벚꽃이 질 때가 됐더라. 비 오는 장면이 담겨 여름처럼 느껴지긴 한다. 지금까지 영화하면서 배우들에게 비를 많이 맞혔는데 이번엔 겨울바다 속에 빠뜨렸다. 남자 배우가 고생을 참 많이 했다. 일본 배우들이 흔히 말하는 '곤조'라고 근성들이 있다. 한국에서 온 감독에게 누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하더라."

- 기획 자체가 홋카이도 여행 중 받은 여러 느낌에서 시작됐다고 들었다. 도플갱어라는 소재도 그렇고 이걸 멜로로 정리해야 겠다는 확신이 든 건지.
"<싸이보그 그녀>(2008)가 끝나고 홋카이도 여행을 제대로 했다. 영화적 풍광을 그때 봤고, 다녀와서 기본 개요를 짰다. 일본에선 오리지널 시나리오만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 어렵다. 원작 소설이 있거나, 만화 원작이 있는 게 유리하더라. 그래서 만화 <바람의 색>을 작업하도록 해서 일본 출판사인 소학사와 한국 포털 사이트에 연재했다. 홋카이도가 정말 좋다. 도쿄가 높은 건물들로 인한 수직선 중심이라면 홋카이도는 수평선이 존재한다.

시나리오 자체는 삿포로에서 썼다. 2010년 12월 한 달 동안 썼는데 영화화되기까지 오래 걸렸다. 일본 자체가 워낙 오래 걸리기도 하고, 제작사도 큰 곳이 아니라. 본래 지난해 중국과 일본에 동시 개봉하려 했는데 사드 문제 등이 있어서 좀 더 늦춰졌다. 처음 영감이 떠올랐을 때부터 멜로였다.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남자 마술사와 여자 캐릭터를 생각했다. 그리고 보통 도플갱어라고 하면 호러나 스릴러를 떠올리잖나. 도플갱어가 사랑에 빠지면 어떨까를 떠올렸다. 한 여자를 혼란에 빠뜨린 두 남자의 죄의식도 반영하려 했다."

- 제목을 <바람의 색>으로 잡은 이유는?
"'바람의 색'은 홋카이도 프로덕션 회사 이름이다. 직원들 명함 색깔이 서로 다르더라. 총 7가지 색이라고 한다. 홋카이도에 장소 헌팅하러 갔을 때 그 회사 사장에게 영화 제목으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또 영화에 등장하는 후디니라는 마술사 이름 중 후가 '바람 풍'자이기도 하다. 또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흐르는 것을 바람에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 감정의 색이 여러 가지이듯 바람의 색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니까."

 곽재용 감독

ⓒ 이정민


한국을 넘어

-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 두 남녀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할 때 각각 레옹과 마틸다로 변장하는 장면이 흥미롭다.
"영화는 곧 아이덴티티에 대한 이야기잖나. 두 사람이 각자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완전 다른 사람이 되는 걸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가장 좋은 게 레옹과 마틸다 같더라. <로마의 휴일> 등 다른 영화도 생각해봤는데 <레옹>을 떠올린 이후 그 이상 적합한 걸 찾기 어려웠다. <레옹>의 포스터도 영화 속에 담으려 했는데 뤽 베송이 허락하질 않았다. 그래서 법적으로 검토하니 옷을 따라 입고 이름을 사용하는 건 괜찮더라. 결국 그 포스터를 떼고 제 과거 영화인 <미스 히스테리> 포스터를 붙이고 찍었다."

- 한국 배우를 쓸 수도 있었는데 일본 배우들과 작업한 것, 한일 양 영화계의 협업 등을 고려한 것인지.
"그런 면도 있지만 홋카이도가 배경이라 한국 사람이 들어가는 게 더 낯설겠더라. <바람의 색> 웹툰을 보면 한국사람 이름이 나오긴 한다. 배경 역시 한국이고, 영화와 달리 여자주인공이 어릴 때 학대를 받았다고 설명된다. 하지만 애초에 제가 시나리오를 썼을 땐 지금의 영화처럼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었다." 

- 멜로 영화를 꾸준히 만든 감독으로서 한국을 넘어 일본과 중국에서 작업하는 등 행보가 남다르다.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지(웃음). 특별히 계획을 세운다고 그렇게 일이 이뤄지는 건 아니니까. 다만 아쉬운 건 미국에 진출할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다. <클래식>을 할 즈음 미국에서 러브콜이 왔었다. 국내 감독 중 거의 처음일 것이다. 근데 영어를 잘 못한다는 공포감이 있었다. 그때 그냥 갔으면 영어만 배우고 왔을지라도 큰 경험이 됐을 텐데 아쉽다.

아시아에서의 기회는 <엽기적인 그녀> 덕이라고 생각한다. 저 역시 그렇게 성공할 줄 몰랐다. 당시 한 해외영화제에 심사하러 온 한국 영화인이 '관객의 사랑을 받았으니 이 영화로 상 받을 생각은 말라'고 하셨다. 근데 일본 심사위원과 또 다른 외국 심사위원이 <엽기적인 그녀>를 그렇게 좋아하더라. 홍콩에서도 성공해서 아, 아시아 사람들이 좋아할 영화라는 걸 느꼈다. 아마도 제 영화에 한국적인 색이 별로 없어서인 듯하다. 이탈리아의 한 영화제에서도 제 영화 다섯 편을 상영한 적이 있는데 그곳 사람들이 <클래식>을 가장 좋아하더라. 사실 <엽기적인 그녀> 보다 더 한국적인 게 <클래식>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지(웃음)."

 곽재용 감독

ⓒ 이정민


멜로의 재정의

멜로 장르 전성기를 직접 경험했기에 지난 10여 년 간 '한국형 멜로'가 잠적하다시피 한 현상에 대해 물었다. 곽재용 감독은 예상 외로 '겸손'했다. "멜로가 너무 많이 만들어지다 보니 또 다른 장르에 대한 욕구가 생겼던 것 같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 어느 순간 스릴러, 범죄물 등이 한국영화 내 주요 흐름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형 멜로가 자취를 감춘 것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남성 중심의 영화로 바뀌었지. 정치적 원인도 있다고 생각한다. 보수정권이 들면서 억압된 사람들이 뭔가 억눌림을 해소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남성 캐릭터들이 몰려다니며 범죄를 저지르거나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영화들이 나왔지. 지금은 또 정권이 바뀌지 않았나. 사람들이 다시금 멜로를 보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저도 개인적으론 열심히 촛불 집회에 나갔다. 두 번 정도 빠지고 광장에 갔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으며 질서를 지키더라. 제겐 참 대단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 영화만의 멜로정서가 있다고 본다. 곽재용 감독이 생각하는 한국형 멜로란 어떤 것인지.
"보통은 신파가 강하고,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특징도 있다. 사실 과거 한국 멜로를 보면 여성의 잔혹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1970년대를 풍미한 멜로 영화들을 보면 여성들이 학대당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산업화 시대에 여성이 나름 노력하다가 성노리개로 전락한다든가 그런 영화들이 많았다. 이장우 감독님의 <바보선언> 등을 봐도 여성이 결국 술집에 나가게 되잖나."

남성에게 학대당한 한국 여성들의 역사가 참 길다. 위안부부터 따지면 더 그렇지. 전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위치에서 사랑하는 걸 좋아한다. <엽기적인 그녀>는 오히려 여성이 더 강했지. 흔히 나오는 밀당 설정도 안 좋아한다.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를 그려왔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바람의 색>을 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데뷔작인) <비 오는 날의 수채화> 때부터 다루려 했던 감정을 반복해서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배우 운용에 있어서도 특장점이 있다. 반면 평단에서의 평가가 박했다는 건 감독 개인의 아쉬움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론 배우들의 매력이 작품 속에서 잘 살아났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감독은 누구나 영화를 잘 만들고자 한다. 게다가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야 하잖나. 그만큼 수명이 짧기 쉽고, 오래 버티기 어렵다. 식당은 같은 레시피로 돈을 벌지만, 감독은 계속 새롭게 이야기를 내야 돈을 번다. 그런 면에서 너무 작품을 놓고 신랄하게 비판받는 경우는 좀..."

- 그럼에도 정통멜로와 SF 요소를 결합하는 등 끊임없이 멜로 안에서 판타지성을 탐구해 온 면에선 독보적이다.
"감독마다 작품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겠지만 전 현실이 힘들다고 영화마저 그렇게 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괴롭게 한 나머지 현실에 동참하게 하는 영화들도 의미가 있겠지만 사랑으로 살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형 멜로라는 게 어쩌면 현실 속 한국사회의 남녀를 다뤘다면 제 영화는 판타지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평단의) 인정을 못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영화를 만들어 온 게 기적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멜로만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 말이다."


곽재용 바람의 색 멜로 지금 만나러 갑니다 손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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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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