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시작은 뒤통수였다.

극중 경유로 분한 이진욱이 옆으로 드러누워 까치집을 한 채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뒷모습. 왜 뒤통수가 시작이었을까. 재미, 의미, 감각 등 여러 기준에 따른 정말 많은 선택이 가능했을 텐데, 이광국 감독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호랑이, <노인과 바다> 등의 핵심 모티프도 영화 속에서 살짝 아귀가 맞지 않게 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일부러 아귀가 맞지 않도록 의도한 영화적 장치가 작동했다기보다는 맞추려고 애썼지만 어긋난 모종의 낭패감. 정치하고 일관되게 밀고가 높은 완성도를 보인 영상에 비해 스토리가 성겨서, 그래서 더 아쉬웠다.

영상과 고현정만으로도 뒤통수의 앞쪽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어느 정도는 달랠 수 있었던 게 기대치 않은 소득이었다고 할까.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포스터 이진욱과 고현정

▲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포스터이진욱과 고현정ⓒ 영화사 벽돌


호랑이

제목에도 들어있는 호랑이는 이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동물원에서 호랑이가 탈출한 어느 겨울날, 여자 친구(현지, 류현경) 집에 얹혀살던 경유(이진욱)는 여자 친구의 부모님이 올라온다는 말에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짐을 간단하게 챙겨 집을 나선다. 변변한 직업 없이 대리운전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처지라 여자 친구 부모님께 당당하게 인사드릴 수 없었던 경유는 이틀 뒤에 돌아올 요량으로 단출한 캐리어를 들고 어디론가 향한다. 관객이 곧 알게 되듯이 여자 친구의 부모님 운운은 무능한 경유를 떠나보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아침밥을 한 상 잘 차려 먹이고 "호랑이 조심하라"고 걱정하며 배웅하는 장면은 처음에도 그렇지만 나중에 더 애틋하게 기억된다.

극중 류현경과 이진욱의 사랑은 가난한 이들의 사랑이다. 류현경은 대형 서점의 비정규직 점원으로 추정되고, 이진욱은 고정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이 대리운전을 거의 본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 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 proletariat를 합성한 조어)이다. 사랑에서 어쩌면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게 가난이다.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한 달 전에 비정규직으로나마 일하던 직장에서 잘린 데다 집주인은 방세를 올려달라고 한다. 같이 사는 남자, 사랑하는 그 사람은 직업이라곤 가져본 적이 없이 그때그때 대리운전으로 살아가는, 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사실상 무능력자이다. 이사를 가야할 텐데, 제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처지에서, 그것도 방을 줄여가야 하는 처지에서, 남자라는 이삿짐을 가져가는 게 가당한 일이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남자에겐 희망이 없다.

남자 입장에서도 물론 희망이 없다. 소설가로 살아가는 게 그에게 가장 희망적인 시나리오였겠지만 남자에게 그런 시나리오는 주어지지 않았다. 주변화한 인생으로 자존감을 버려야 생존 가능한, 자신이 어려서 모색한 삶과는 다른 삶이 주어졌다.

영화 속에서 경유에겐 두 개의 사랑이 주어진다. 야반도주하듯 여자 친구가 방을 빼 사라지면서, 가난한 사랑이 "fade-out"하고 허무한 사랑이 "fade-in"한다.

한때 사랑한 사람들의 재회만큼 심란한 소재가 없다. 그 소재는 친숙한 것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나지만 결말은 조금씩 다르다. 경유에게 유정(고현정)과 재회는, 이별 그것도 버림받은 이별의 깊은 상처가 미처 아물지 못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그저 잔잔한 인수인계처럼 사무적으로 진행된다. 소라게가 집을 바꾸듯 캐리어는 옛 애인의 집에서 더 옛 애인의 집으로 옮겨진다. 경유는 여전히 여자에게 얹혀산다. 영화에서 설명하기 전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으로는 옛 애인에게나 더 옛 애인에게나 성적으로 무능하기까지 하다.

아주 미미한 자존심만으로도 그렇게 비참한 이전을 선택하지는 않으련만, 그나마 얹혀살 수 있는 친구 부정(서현우)마저 결혼 때문에 경유를 받아줄 수 없는 형편이다. 아무튼 소라게에겐 연약하고 부드러운 배를 감싸줄 빈 고동 같은 게 필요하다. 사랑이든 집이든.

"fade-out"에 여전히 힘들어하지만 "fade-in"이 생각만큼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유정은 경유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한 소설가가 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경유는 유정에게 이중으로 열등감을 느낀다. 그나마 "fade-in"이 사랑이 아닌 의도였다는 의심을 품게 되면서 화가 난 이 소라게는 소라껍질 없이 연약한 배를 땅에 질질 끌고 다니면서 세상과 맞서게 된다. 맞선다는 표현은 과하고 세상을 표류한다.

이제 호랑이 얘기를 해보자. 경유의 두 여자가 모두 "호랑이 조심해"라고 말한다. 영화는 호랑이의 동물원 탈출로 시작해 나중에 호랑이를 (희화적으로 동시에 과장되게) 대면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프레카리아트로 살아가는 한 남자. 옛 애인에게 버림받고 더 옛 애인에겐 (정확하지 않지만) 이용당한 이 남자에게 호랑이는 무엇일까.

이광국 감독이 프레스 키트에서 밝힌 얘기를 옮겨보자.

"어느 여름날 '여름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 라는 관용구를 들었을 때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영화의 제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무서운 손님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부지런히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쓰면 겨울에는 촬영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겨울손님으로 바꾸어 제목을 정했습니다. 그렇게 제목이 정해지고 나니 다양한 생각들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먼저 어느 겨울날 호랑이 한 마리가 동물원에서 탈출을 하게 되고, 한 남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여자 친구에게 버림을 받는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하나씩 꼬리를 물고 이어진 것 같습니다. 이 시기에 저는 저의 비겁함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혹은 어떤 상황 앞에서, 어떤 일 앞에서 두려움 때문에 비겁하게 도망친 적이 많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어렵더라도 그 두려움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했으면 하는 바람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안에 담고 싶었습니다. 경유라는 비겁한 한 남자가 어떤 여정을 통해 결국은 자신의 두려움을 대면하면서 이야기가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야기 안을 떠도는 호랑이의 존재는 우리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두려움에 대한 은유입니다. 영화의 엔딩에 경유가 마주하는 호랑이는 경유 안에 있는 두려움이며 그것을 온전히 대면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길지만 모두 옮겼다. 결국 호랑이는 '두려움'의 은유이다. 주인공 경유는 비겁한 남자이고 영화적 전개를 통해 마지막에 자신의 두려움을 대면한다는 구성이다.

감독의 생각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이 영화는 포스터가 보여주는 외양과 달리 사랑보다는 존재를 다룬다. 남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자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우선 드는 생각은 주인공이 비겁한 남자인가? 내가 보기에 그는 비겁하지 않다. 재능이 없고 무능력할 뿐이지 결코 비겁하지는 않다. 그는 당당하게 세상에 맞서 싸우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에서 도망 다니지는 않는다. 자신의 방식으로 무력한 실존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나는 비겁을 연상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호랑이는 두려움의 은유인가? 사르트르가 남긴 "타인이 지옥"이란 유명한 말(이 감독도 "우리는 서로에게 무서운 손님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라고 비슷한 말을 했다)의 설득력은 "동물원을 탈출한 호랑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동물원을 탈출한 호랑이가 두려움의 은유가 되기는 힘들다. 탈출한 호랑이는 크나큰 두려움에 휩싸인, 관점에 따라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의 야생 호랑이나 조선시대 인간과 공존한 호환의 주인공 호랑이와 동물원을 탈출한 호랑이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특히 은유로 사용됐다면 그 차이는 더 극명해진다.

동물원을 탈출한 호랑이는 (시베리아 야생 호랑이와 달리) 호랑이에게 (응당) 주어졌어야 할 삶을 살지 못하고 동물원에서 강박적으로 살아가다가, 우연찮게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어진 여건에 의해) 탈출하게 됐을 때,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의 문명사회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다가 결국 사살당할 운명에 직면한 존재이다. 동물원을 탈출한 호랑이는 경유가 마주대하는 두려움의 은유가 아니라 오히려 경유 자체의 은유에 가까운 셈이다.

일관되지 못하고 다소 어긋난 호랑이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나와 같은 종류의 관객으로 하여금 엔딩 크레디트를 보며 어쩐지 뭔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영화 또한 텍스트이기에, 지향하는 성격에 조응하는 내적 문법을 완벽하게 갖췄을 때 비로소 좋은 영화라는 평을 들을 기본 조건을 갖추게 된다.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 스틸사진 이진욱

▲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 스틸사진이진욱ⓒ 영화사 벽돌


노인과 바다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이 영화에서 호랑이에 버금가는 키워드이다. 결론적으로 '동물원을 탈출한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이광국 감독이 좋아하는 소설인 건 상관없지만, 중요한 의미요소로 채택할 때는 <노인과 바다>에 대해 조금 더 고민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우리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태도들"이 <노인과 바다> 안에 담겨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노인과 바다>는 실패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헤밍웨이는 마초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노인과 바다>에는 그러한 마초적 성취욕구와 기념비적 서사의 추구가 담겨 있다. 감독과 나의 생각 중 어느 게 더 합당한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러한 혼선이 존재한다면 소품 <노인과 바다>의 이미지 또한 흔들리게 되고 만다.

나아가 "<노인과 바다>의 노인의 여정과 경유의 여정이 닮아있다"는 생각은 오해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승리자인 반면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의 청년은 감독의 표현으로는 비겁자이고, 내 의견으론 슬픔을 일상화한 평범한 (동시에 분열된) 현대인이다. 여정만이 닮아있을 수는 있지만,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서 주체의 성격의 배제한 객관적 의미노출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노인과 바다>는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로 끝난다. 물론 호랑이나 사자나 둘 다 고양이과 동물이긴 하다만.

고현정을 위한 고현정의 영화

비겁한 남자가 "fade-out"과 "fade-in"의 연속된 사랑과 피곤한 일상을 통해 종국에 두려움을 대면하게 된다는 줄거리보다, 소설가이지만 글을 쓰지 못하게 된, 슬픔의 후광을 왕관처럼 지닌 알코올 중독자 여자가 옛 남자의 "fade-out"한 공간을 "fade-in"하고 들어가며 얼기설기 삶의 조각들을 움켜쥐는 모습이 더 가슴에 남았다.

경륜을 보여주는 고현정의 연기는 영화 내내 빛을 발했는데, "경유(이진욱)의 캐리어 앞에서 짓는 알 수 없는 표정과 몸짓" 말고도 많은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아파트 벤치에 펜과 공책을 들고 앉은 C자로 구부러진 모양의 실루엣. 이진욱과 헤어진 뒤 계단을 내려와 뒤돌아보는 모습. 자신의 집에서 의자에 앉은 이진욱을 바닥에 앉은 채 몸 뒤에서 끌어안은 장면. 그 장면에서 고현정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이진욱을 감싸 안은 팔만 처연하게 노출된다.

<노인과 바다>와 연결 지은 고현정의 이미지는 무리에서 쫓겨나 홀로 사바나를 배회하는 암사자가 고단한 몸짓으로 사냥감을 바라보는 모습이라고 해도 좋겠다. 자주 언급된 한우 장면에서는 이진욱뿐만 아니라 서현우의 아무 것도 안 한 연기가 눈길을 끌었다는 감상을 덧붙인다.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스틸사진 고현정

▲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스틸사진고현정ⓒ 영화사 벽돌


공간분할과 선(線)활용의 영상

영상의 미학은 영화의 전편을 지배했다. 화면에서 일관되게 공간의 분할과 선(線)의 균형적 배치가 목격됐고, 분할된 공간과 배치된 선에 조응한 인물의 포지셔닝(positioning)이 이어졌으며, 카메라는 너무 다가서지 않았으며 적당한 시간만큼 화면을 지탱해줬다. 공간분할과 선의 배치가 집착으로 보일 만큼 시종 관철되어 자칫 불편할 수 있었지만, 다른 측면의 절제와 맞물려 불편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영상에 대해 이 감독은 "정확하면서도 여백이 살아있는 샷들로 채웠다"고 했는데, 그 이상이었다.

공간분할과 선의 활용은 경계에서 우왕좌왕하는 등장인물의 심리를 비대사적으로 묘사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4월 12일 개봉된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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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평론하고, 래디컬 정치를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청소년/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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