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어진 게임이나 만화, 영화는 서로 다른 매체지만 대단한 몰입감을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하거나, 만화책을 빌려와서 쌓아놓고 읽다가 밤을 새우고, 영화 내용에 완전히 빠져들어 2시간이 후딱 지나가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입니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최상의 몰입감을 제공하는 가상 현실 게임 '오아시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험을 그린 작품입니다. 2045년의 미국, 주인공 웨이드(타이 쉐리던)는 빈민가에서 이모에게 얹혀사는 신세지만, '오아시스' 안에서는 '파르지발'이라는 이름의 수준급 플레이어입니다. 그에게는 목표가 있습니다. 바로 '오아시스'의 개발자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일런스)가 남긴 세 개의 열쇠를 찾는 것이지요.

몇 년 전 '오아시스'의 설계자인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일런스)는 이런 유언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자신이 게임 속에 숨겨 놓은 비밀의 열쇠 3개를 찾는 사람에게 회사의 지분을 넘기겠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것을 찾기 위해 열을 올렸지만, 아무도 그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단지 '첫 번째 열쇠는 레이싱 게임을 완주해야 얻을 수 있다'라는 단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대중문화의 수많은 아이콘은 반갑지만...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한 장면. 웨이드(타이 쉐리던)는 가상 현실 게임 '오아시스'의 실력자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한 장면. 웨이드(타이 쉐리던)는 가상 현실 게임 '오아시스'의 실력자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이 영화에는 알려진 대로 수십 가지 대중문화의 캐릭터와 상징물들이 등장하여 향수를 자극합니다. 할리우드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드로리안과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의 바이크,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샤이닝>, 미국 홈비디오 게임기의 원조 '아타리'부터 '스트리트 파이터'나 '메탈 기어', 그리고 최근에 나온 '오버 워치'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작 게임들이 인용됩니다.

이들을 아이맥스 스크린에서 3D로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운 경험입니다. 각각의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에 얽힌 개인적인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니까요. 미국의 소설과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로 유명한 '아이언 자이언트'와 일본 로봇의 대명사 '건담'이 힘을 합쳐 일본 괴수 '메카고질라'와 맞붙는 장면을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문제는 이런 향수 어린 기억들 외에는 딱히 재미있는 구석이 없다는 겁니다. '오아시스' 안에서 열쇠를 찾기 위해 수수께끼 풀이를 해나가는 과정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평소에 지나쳤던 단서를 재발견해서 발상의 전환을 하고 돌파구를 마련하는 단계들이 잘 꾸며진 편입니다. 하지만 영화로 보기에는 딱히 재미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같은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게임을 직접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웨이드가 현실 세계에서 겪는 모험들은 생각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단순하고 평면적이어서 몰입이 쉽지 않습니다. 최대의 적수로 설정된 IOI 같은 대기업과 벌이는 대결이나, 게임 속 친구들과 실제 세계에서 만나 힘을 합쳐 싸우는 과정은 게임 속의 모험에 비교하면 확실히 재미가 덜합니다. 성공했을 때의 보상이 크다면 그만큼 실패했을 때의 위험도 크게 부각되어야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게 없습니다. 이 역시 잘못되면 다시 시작하면 그만인, 게임에 더 어울리는 방식입니다.

결말로 접어들수록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현실과 가상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라는 식의 메시지도 거슬립니다. 물론 의도는 좋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다 아는 얘기를 굳이 콕 집어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일부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게임, 만화, 영화 등이 제공하는 '가상 현실'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굳이 충고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은 진짜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유기체이기 때문에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하며 화장실도 가야 합니다. 그러니 반드시 현실로 돌아와야 합니다. 영화 속 설정을 따른다고 해도 그런 가상 현실 기기로는 인간의 생리 작용까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현실과 가상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각자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 세계에서 계속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미국 리버럴의 안이한 현실 인식, 대안은?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한 장면. 웨이드는 할리데이의 기억 저장소에서 예전 영상을 돌려보며 단서를 찾는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한 장면. 웨이드는 할리데이의 기억 저장소에서 예전 영상을 돌려보며 단서를 찾는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레디 플레이어 원>은 현실 세계의 문제를 단순화하고 개인 차원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정도에 그치는, 백인 남성 중심의 1980~90년대 모험 영화를 연상시킵니다. 웨이드와 그의 친구들이 성별로나 인종적으로 골고루 섞여 있다고는 하나, <블랙 팬서>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같은 영화가 인기를 끄는 요즘의 기준으로 보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입니다.

이 영화의 해결 방식은 현실 문제를 도덕적 정당성의 문제로 단순화해 버리는 미국 리버럴 계층의 태도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서부 해안 지역이나, 개방적인 동부 연안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 계층은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강조하며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 승리를 보장한다고 믿는 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지난 대선만 봐도 그렇지요. 저 역시 트럼프같이 흠결 많은 인간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라는 생각에서 나온 안이함이 어쩌면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상대가 도덕적 문제를 거론하는 동안, 트럼프는 지역별 맞춤 공약으로 전략 지역에서 표를 긁어모았으니까요.

미국 리버럴들의 이런 안이함은 예전 두 번의 대선에서 보여 준 우리나라 민주 세력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도 이명박, 박근혜의 부족한 자질만 부각하려다가 연거푸 실패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탄핵 심판 이후 치러진 지난 대선에서 승리한 문재인 정부의 노력입니다. 이번 정부는 매사 치밀하게 준비하고 작은 문제부터 해결해 나가는 자세, 그리고 실용적인 태도로 많은 성과를 거두면서 국격을 높이고 있습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배경이 되는 오하이오주는 공교롭게도 미국 대선의 승리를 좌우하는 징크스가 있는 곳입니다. 역사상 이곳을 빼앗기고도 대통령이 된 경우는 존 F. 케네디가 유일하다고 하죠. 하지만, 이 영화는 오하이오주 사람이나 지역 사회의 특징을 다루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더 큰 도덕적 담론만을 다룰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도덕적 정당성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각론입니다. 지금 미국 리버럴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또 한 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지역 간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습니다. 지역의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 <윈드 리버>, <쓰리 빌보드>, <로건 럭키> 같은 영화들을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 타이 쉐리던 마크 라일런스 스티븐 스필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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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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