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취향은 있다. 다만 때로는 어떤 상황 앞에서 취향을 잠시 접어두거나 아쉽지만 오랫동안 포기해야 하는 순간도 찾아온다. 그런 순간에 우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영화 <소공녀>는 취향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취향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순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세상은 비싸고, 좋아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진다"는 영화 홍보 문구가 이를 담아냈다. 소재나 줄거리가 꽤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묵직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취향을 지키기 위해 거처를 포기한 미소

 영화 <소공녀> 스틸 사진

영화 <소공녀> 스틸 사진ⓒ CGV아트하우스


극 중에서 주인공 미소(이솜 분)는 타인의 집안 청소를 대신 하면서 돈을 버는 가사도우미다. 도심의 오피스텔과 주택을 오가며 청소하는 미소, 하지만 그의 집은 정작 작고 초라한 단칸방이다. 제대로 된 가구도 없고, 먹을 것도 요리할 도구도 없다.

난방도 되지 않고 차가운 바람이 고스란히 들어오는 작은 원룸. 그마저도 미소가 취향을 위해 거처를 포기하기로 마음 먹으면서 사라진다.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 사랑하는 남자친구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는 미소. 하지만 그는 임금은 그대로인데 2014년 새해부터 담배값이 오르자 짐을 싸서 방을 정리하고 나온다. 담배와 위스키에 쓰는 돈을 줄일 수 없으니 차라리 월세를 쓰지 않고 절약하는 방안을 선택한 것이다.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추운 겨울, 커다란 캐리어에 몇 벌의 옷과 사진 등을 담고 청소용품을 담은 작은 가방을 들고 미소는 거리로 나선다.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미소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까?

10년 전 밴드 멤버들의 집으로 향하는 여정

 영화 <소공녀> 스틸 사진

영화 <소공녀> 스틸 사진ⓒ CGV아트하우스


짐을 챙기던 미소는 10년 전 자신이 속했던 밴드 멤버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잠시 신세지기로 마음먹고 한 명씩 찾아간다.

먼저 베이스를 치던 문영(강진아 분)의 회사로 찾아가는데, 야근에 시달리는 문영은 점심시간에 휴게실에서 영양제를 링거로 맞으며 버티는 신세다. 혼자 살지만 다른 사람을 재워주기 어렵다고 말하자 미소는 다음 멤버의 집으로 향한다.

미소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서울 외곽에 사는 키보드 멤버 정현정(김국희 분)의 작은 빌라. 현정은 결혼 후 남편과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밥을 모두 하느라 쉴 틈 없이 집안에서만 산다. 미소는 가까스로 현정의 집에서 하루 잠을 자는데, 여기서도 오래 지내지 못할 상황이란 걸 깨닫고는 현정의 한끼 밥을 요리하고는 집을 나선다.

이후 찾아간 곳은 드럼 멤버였던 한대용(이성욱 분)의 집. 고급 아파트에 사는 한대용은 신혼 1년차지만 미소가 들른 당시 혼자였다. 어렵사리 결혼에 성공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헤어진 것으로 보인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대용은 술에 취해 울면서 미소에게 한탄을 늘어놓는다.

"결혼하려고 아파트를 마련했는데... 여긴 집이 아니라 감옥이야, 감옥. 내 월급이 190인데 한달에 여기(아파트)에 들어가는 돈이 100이야. 그렇게 20년을 내야 해. 그렇게 20년을 내면 내 집이 되는데 그땐... 낡겠지?(울음)"

이후 밴드 멤버들에게 신세질 수만 없다고 판단한 미소는 보증금이 적은 방을 알아본다. 복덕방 아줌마를 따라 반 지하, 2층집 방을 보던 미소가 "보증금을 낮출 수 없을까요"하고 묻자 나타난 방은 산 꼭대기의 좁은 단칸방. 눈앞의 막막한 현실에 미소는 한숨만 쉴 뿐이다.

 영화 <소공녀> 스틸 사진.

영화 <소공녀> 스틸 사진.ⓒ CGV아트하우스


극 중에서 남자친구 한솔(안재홍 분)과 함께 영화 티켓을 얻으려고 '헌혈 데이트'를 하는 장면은 짠하다. 하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10대~20대의 데이트와 꽤 닮은 지점이기도 하지 않을까.

21세기 한국판 '소공녀'가 보여주는 어떤 '품격'

'걸리버여행기'에서 걸리버가 그랬듯, 자신이 살던 곳보다 엄청나게 큰 주택과 아파트, 혹은 사람 수에 비해 좁은 빌라를 오가며 미소가 보는 광경은 무얼 말할까. 미소가 밴드 멤버의 집에 들를 때마다 관객은 미소의 시선으로 각자 다른 삶의 풍경을 엿보게 된다.

"더 큰 회사에 갈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당장의 업무에 지친 회사원, "매일 내 밥이 맛 없어서 잔뜩 남기네"라고 자책하는 가정 주부, 결혼했지만 아파트로 인한 빚더미를 떠안은 남자와 "아기를 키우면 수행이 된다"는 엄마까지. 한때 밴드에서 각자의 악기와 스타일을 갖고 살던 사람은 이제 다들 다른 모습이 됐다. 집, 결혼, 가정 등 '사회가 요구하는' 구색을 갖췄지만 정작 그들의 얼굴과 삶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밴드 멤버 중 한 사람은 위스키와 담배를 위해 집을 포기했다는 미소에게 "그 취향, 참 염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인이 갖춰야 할 삶의 요소를 가졌지만 미소보다 오히려 더 불행해보이는 그들의 삶은 '정작 필요한 건 집이나 어떻게든 결혼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생각과 취향'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결국 미소의 '도시 하루살이'를 통해 <소공녀>는 한국 사회를 어느 정도 풍자한 셈이다. 서로에게 '이 정도는 가져야지' 하고 사회적인 기준을 만들어 강요하고 눈치 봐야 하는 세태를 말이다.

 영화 <소공녀> 스틸 사진

영화 <소공녀> 스틸 사진ⓒ CGV아트하우스


특히 자신의 취향을 지키려는 미소의 모습은 이 시대 우리가 본보기로 삼아야 할 '품격'을 보여준다. 미소는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집을 포기하지만, 그런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며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스스로 행복의 울타리를 보호하려 할 뿐, 타인의 가치관을 평가하거나 간섭하려 들지도 않는다. 자신의 '취향 존중'을 위해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영화 <소공녀>의 굵직한 줄거리는 1905년작 동명 소설 <소공녀>처럼 단순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장면에서 전해지는 울림은 꽤 묵직하다. 맛집 한번 찾아가기도, 내 집 마련도 힘든 오늘날 젊은 세대에 공감하며 위로가 되어주는 영화다. 사회적 체면과 물질적 기준의 '평균치'를 포기하고  자기만의 행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미소의 모습을 그린 <소공녀>. 이 영화는 먼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나 '정상적인 가치를 따르라'는 압박을 이겨내며, '마이너'한 취향을 꿋꿋하게 지켜나가는 사람들을 위한 헌사일지도 모른다.

 영화 <소공녀> 포스터.

영화 <소공녀> 포스터.ⓒ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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