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경 작가의 새 드라마 tvN <라이브>는 지구대 경찰들이 일상 속 사건들을 풀어가는 이야기이다. 일상의 이야기들, 하지만 결코 소소하지 않은 사건들을 신참과 고참의 눈으로 그려가며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툭 던지듯 이야기한다. 동시에, 경찰로서 또는 가정 안에서의 다양한 역할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내면 역시 다채롭게 펼쳐진다. 워낙 여러 캐릭터와 사건들이 얽혀 있어, 보는 이들마다 서로 다른 캐릭터에게 끌릴 것만 같은, 하지만 어디에 포인트를 두어 보아야할지 몰라 조금은 어려웠던, 이 드라마에서 곱씹어 보아야 할 대사를 만났다.

같은 경찰 동료이자 남편인 오양촌(배성우)에게 드라마 첫 회부터 이혼을 요구해왔던 안장미(배종옥)는 5회 이혼서류를 찢어버린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tvN <라이브>의 한 장면.

tvN <라이브>의 한 장면. ⓒ tvN


 tvN <라이브>의 한 장면.

tvN <라이브>의 한 장면. ⓒ tvN


"내 인생에 한 번쯤은 니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가 있을 줄 알았어. 근데 아니더라. 난 너 없이도 다 할 수 있더라. 아이 낳을 때, 아이 아플 때. 우리 엄마 아버지 내 아이들 키우다 골병들어 쓰러져 병 수발할 때. 그리고 두 분 장례식까지. 너 없이 나 혼자 다할 수 있더라구. 물론, 그런 때 니가 내 옆에 있었다면 좋았겠지. 내가 무섭고 두렵고 절박했던 그런 순간에. 근데 넌 단 한순간도 내 옆에 없었어."

그리고 아내의 이혼요구에 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때렸니, 바람을 폈니, 돈을 안벌어왔니!" 라고 항변해오던 오양촌은 아내가 털어 놓은 속마음에 이렇게 항변하듯 오열한다.

"나도 일했잖아. 누나. 놀러 다닌 게 아니라. 그래두. 그래두 미안해. 진짜."

장미가 이혼을 원하는 이유와, 양촌이 이혼을 거부하는 이유는 '돌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는 가부장적 전통이 만든 슬픈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남성 중심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전통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의존적인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남성적 시각에서 약자로 간주된 여성은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물리적인 보호를 받아야 했다. 대신, 남성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를 해주고, 자녀를 양육하고, 정서적 위안을 제공해야 하며, 동시에 성적 욕구까지 만족시켜주는 것이 여성다움의 가치로 인정받아왔다. 그리고 이 '돌봄제공자'로서의 역할은 자연스런 성역할로 포장되어 남성은 물론 여성들 스스로도 당연히 여기도록 사회화되어 왔다.

물론, 현대사회는 다르다. 이제 여성은 경제적인 이유는 물론, 자아 성취를 위해서도 일할 수 있고, 여성의 사회활동은 장려된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여성이 '돌봄제공자'의 역할만 하길 가르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여성의 사회생활을 드러내놓고 막는다는 건 몰지각한 일로 규정된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가정에서의 '돌봄제공자'로서의 역할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라는 것이다. 맞벌이를 하는 많은 여성들은 퇴근 후 집에서 또 다시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다른 가족들의 일상이 불편하지 않도록 기꺼이 '돌봄노동'을 담당한다. 전업주부들은 남편이 직장에서 일하는 사이, 가정의 대소사를 처리하고, 아이를 돌보고 교육시키는 일을 담당하면서도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와 쉬고 있을 때 조차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남편'을 위해 계속해서 돌봄노동을 한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전통적인 여성성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달라진 요즘에도, 결국 돌봄은 여성의 몫이라는 사고는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일단 결혼이라는 제도에 들어선 후부터는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자신 혹은 남편의 가족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끊임없이 돌봄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여성들은 누구의 돌봄을 받아야 할까? 부모로부터 돌봄을 받는 시기가 지나고 결혼한 여성들은 과연 그 누구의 돌봄을 받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 것일까?

드라마 <라이브> 속 장미가 이혼을 선언한 이유는 아마도 결혼 후 제대로 돌봄 받지 못한 채, 돌봄을 제공만 해 온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최후의 선언이었을 것이다. <라이브>의 장미는 경찰로 일하면서 아이를 낳았고, 친정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아이를 키웠다. 가사는 물론이고, 양가 부모님의 병수발도 들었다. 그 사이 양촌은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경찰로 경찰집단에서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양촌의 아버지 집에 전시된 많은 표창장과 상장들은 양촌이 경찰로서 일궈낸 성과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과연 장미가 가정을 돌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많은 업적을 일궈낼 수 없었을까? 장미가 일에만 몰두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도, 부모님의 병수발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더라면, 과연 양촌이 경찰로서 사명감을 불태울 수 있었을까?

 tvN <라이브>의 한 장면.

tvN <라이브>의 한 장면. 오열하는 양촌(배성우). ⓒ tvN


당연히 아닐 것이다. 양촌은 장미의 돌봄노동에 의존해 사명감 투철한 '전설 경찰'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양촌은 "때리지도 않았고,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고, 돈도 벌어왔다"며 이혼의 이유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장미의 입장에서는 친정 부모님의 장례마저 홀로 치르고 난 후에도 '사수'를 잃은 자신의 감정을 어루만져 달라고 항변하는 양촌의 태도에 '돌봄노동'을 착취당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또한 장미는 말한다. "그런 때 니가 내 옆에 있었다면 좋았겠지. 내가 무섭고 두렵고 절박했던 그런 순간에. 근데 넌 단 한순간도 내 옆에 없었어"라고. 이는 장미에게도, 여성에게도, 정서적으로 돌봄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음을. 여성 역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우자에게 정서적인 돌봄을 받아야 함을 의미하는 대사다.

양촌은 일방적으로 돌봄을 제공받았으면서도, 장미의 정서를 돌보아주지 않았다. 양촌은 "나도 일했잖아. 놀러 다닌 게 아니고"라고 호소하지만, 부부사이에서 필요한 건, 단지 때리지 않고, 바람 피우지 않고, 돈 벌어오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직 이것만으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리고 자신에게 제공한 아내의 돌봄노동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나아가 착취하는 건, 남편으로서 명백한 직무유기다. 때문에 장미의 이혼 요구는 타당하다.

여성이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고는 남성의 시각에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가부장적 시선에 불과하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시선의 피해자는 여성 뿐 만이 아니다. <라이브>에서 '없는 게 더 편한' 아빠이자 남편인 양촌이 행복해 보이는가? 그 누구를 돌볼 줄도 모르고 가족 안에서의 역할에서 오는 기쁨을 전혀 모른 채, 일에서의 성공에만 집착해 살아가는 남성들의 삶이 온전해 보이는가? 성별에 관계 없이 모두를 위해서, 돌봄의 가치는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 모두가 함께 가정을 돌보고, 서로를 보듬으며 돌봄받을 권리를 지켜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과도한 회식 문화 등 남성이 '돌봄'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구조와 문화들도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더 이상 장미와 양촌처럼 불행한 부부가 탄생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 모두가 성별에 상관없이, 보다 삶을 온전하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tvN <라이브> 포스터

tvN <라이브> 포스터 ⓒ tvN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송주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라이브 돌봄 페미니즘 이혼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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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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