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버드> 속 크리스틴(시얼샤 로넌 분)

<레이디 버드> 속 크리스틴(시얼샤 로넌 분)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프란시스 하> 그레타 거윅의 독창적이고 감각적인 감독 데뷔작


크리스틴 '레이디버드' 맥피어슨(시얼샤 로넌 분)에게 캘리포니아 중서부 새크라멘토는 너무 좁다. 한창 꿈 많고 하고 싶은 것 많을 열일곱 여고생은 고즈넉하고 엄숙한 카톨릭계 고등학교 대신 예술과 자유가 있는 동부, 특히 그중에서도 뉴욕에서의 대학 생활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넉넉지 못한 경제 상황에 가족들은 애정 대신 날카로운 모습을 더 자주 보이고, 공부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데다 수줍은 첫사랑도 삐걱거린다. 당돌한 크리스틴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대신 또 다른 별칭 '레이디버드(Ladybird)'로 자신을 불러주길 바란다.

<레이디 버드(Lady Bird)>는 배우에서 감독으로 데뷔한 그레타 거윅의 자전적인 영화다. 작품 속 레이디버드처럼 그 역시 새크라멘토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동부 배경의 영화에 출연하며 '뉴욕의 연인'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크리스틴이 곧 그레타 거윅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는 마냥 추억을 옮겨놓은 자서전이 아니다. 기억 속의 유년기를 미화하며 꾸며놓지도 않았고, 많은 것을 담으려다 모두 놓치는 우를 범하지도 않았다. 뛸 듯이 기뻐 즐겁다가도 달리는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온 세상이 사랑만 남은 듯 달콤하다가도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비참해지는 사춘기 감정의 파고. 영화는 그 자연스러운 순간, 때로는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놓치기 쉬운 그 순간들을 은은하게 포착해낸다. 청춘 영화로 호평받은 <프란시스 하>에서 주연은 물론 각본까지 공동 집필했던 그레타 거윅의 독창성이 이번에도 돋보인다.

 <레이디 버드> 속 크리스틴(좌)와 단짝친구 줄리(우)

<레이디 버드> 속 크리스틴(좌)와 단짝친구 줄리(우)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 보이후드 >와 같지만 다르게... 흔치 않았던 <걸후드(Girlhood)>

여기에 '여자 감독이 바라본 여고생'의 시선이 더해진다. 단짝 친구 줄리(비니 스타인펠트 분)와 함께 성체용 떡을 몰래 먹으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가계 신경 쓰느라 날카로운 엄마와 말다툼하면서도 예쁜 드레스에 감탄하는 장면 등은 기성의 눈이 담지 못한 영역이다. 마치 보편적인 일상을 새롭게 재발견한 기분이다.

이는 지난 실제 한 소년의 12년의 성장기를 추적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보이후드>와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영화계에서 소년의 성장 스토리는 많이 있었어도 소녀의 꾸밈없는 일상과 성장 드라마는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보통 아들 인생의 이정표를 설정해주는 건 아빠지만, '레이디버드'의 아빠 래리(트레이시 레츠 분)는 실직의 위기를 겪고도 묵묵한 애정으로 딸을 응원해준다. 잔소리하고 괴롭히는 쪽은 아버지가 아닌 엄마 매리언(로리 맷칼프 분)이다. 아들이 아버지와 서먹서먹하듯 '레이디버드'는 매리언의 깐깐하고 억척스러운 생활이 불만스럽고, 매리언은 힘든 경제생활 속에 말을 듣지 않는 딸이 속상하다. 사실상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매리언은 억척스러운 생활로 사랑한다는 말조차 잘할 수 없는 엄마의 안타까운 상황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레이디 버드> 속 크리스틴(좌)과 엄마 매리언(우)

<레이디 버드> 속 크리스틴(좌)과 엄마 매리언(우)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우리 모두가 겪었을 사춘기의 방황, 그녀도 겪으며 어른이 된다

호기심 많은 '레이디버드'에겐 불만이 많다. 왜 나는 멋진 차를 끌고 다니는 섹시한 몸매의 제나(오데야 러쉬 분)처럼 예쁘지 않을까 한탄하고, '철로가 낡은 집'이 싫어 이웃의 이층짜리 파란 집을 동경한다. 동부 학교를 가기 위해선 돈이 필요한데 가정 형편은 빠듯하고 성적도 여의치 않다.

수수한 대니(루카스 헤지스 분)와는 '저 별은 우리 별'을 속삭일 정도로 달콤한 사랑을 나누지만 우연한 기회에 끝나버리고, 지역 밴드의 시크한 남자 카일(티모시 샬라메 분)과의 연애도 순탄치가 않다. 겪어보지 못해 불안하던 10대 시절의 감정 - 질투, 꿈, 열등감, 우정, 사랑 -을 폭넓게 풀어내는 영화는 손쉽게 우리의 추억 속 한 페이지를 불러온다.

십 대의 우리들이 그러했듯 '레이디버드'에게 중요한 건 앞날, 내일이자 미래다. 추억, 되돌아보기를 논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스무 살이 된 우리가 그러했듯, 18세가 되어 운전면허를 따고 대학에 진학하며 모르는 남자와 진탕 술에 취하고 난 후에야 '레이디버드'는 새크라멘토를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지금의 나를 키운 건 다름 아닌 그 시절의 모든 불만과 갈등, 어설픈 사랑, 단짝 친구와의 소중한 추억, 그리고 그 좁은 동네였다는 걸. 깨달음과 함께 '레이디버드'는 다시 자신을 크리스틴으로 부른다. 그렇게 소녀는 어른이 되어간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도헌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브런치(https://brunch.co.kr/@zenerkrepresent/14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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