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일을 시작한 뒤 월화수목금토일, 주 7일 동안 꼬박 오후 10시까지 일해야 했습니다.

작가 일을 시작한 뒤 월화수목금토일, 주 7일 동안 꼬박 오후 10시까지 일해야 했습니다. ⓒ 픽사베이


* 이 글은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 막내 작가들 4-5명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저는 올해 2년차가 된 막내작가입니다. 방송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방송사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를 통해 방송계에 입문하게 되는데요. 한 학기 사립대 등록금에 버금가는 돈을 내고 들어간 첫 수업에서 제가 강사에게 들은 말은 "부모님이 좀 사시니? 방송작가를 하려면 집에 돈이 아주 많아야 돼"였습니다.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을 받고 사는 만큼 메인작가가 되기 전까지는 힘든 생활을 견뎌야한다는 얘기였습니다.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처음으로 한 방송국 본사가 제작하는 프로그램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정규직 PD(피디)였던 면접관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월급은 130이야. 내규가 그래. 메인작가가 되면 돈 많이 버니까 배운다고 생각해."

저는 면접관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습니다. '면접관님도 배운다는 생각으로 최저 임금도 되지 않는 돈을 받으면서 일하셨나요?' 하지만 저는 그 말을 삼켜야만 했습니다. 돈은 좀 적었지만 그 분 말처럼 일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고 무엇보다도 제가 너무나 하고 싶은 프로그램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감사한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근무에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이라고 말했던 그곳에서 저는 월화수목금토일 주 7일 동안 오후 10시까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섭외가 되지 않거나, 취재할 분량이 많거나, 결과물이 엎어지기라도 하면 때때로 철야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날이면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 숙직실에서 쪽잠을 잤습니다. 황금연휴다, 대체휴일이다, 명절이다 하는 것도 저에게는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이었습니다. 택시비는 물론 식비조차 나오지 않는 그곳에서 저는 일 년 내내 생활비 걱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쉴 시간도 없이 일을 하는데 적금은커녕 생활비조차 감당하기 힘든 저임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그래도 힘을 내서 하루하루 즐겁게 일을 했던 건 바로 방송이 주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힘들게 만든 방송이 전파를 타고 엔딩 크레디트에 제 이름 석 자가 올라갈 때면 부모님은 물론이고 소식이 뜸했던 친구들에게도 전화를 걸어서 자랑을 하곤 했습니다. 시청률은 얼마나 나왔는지, 시청자 반응은 어떤지... 게시판을 샅샅이 훑고 기사에 달린 댓글을 하나하나 읽어보기도 했었죠. 하지만 이런 기쁨의 순간은 힘들고 지치는 현실에 비해 너무나 짧았습니다.

막내작가가 겪는 삼중고... 비정규직, 청년, 여성이라는 굴레

 방송준비로 밤을 새고 녹화까지 하고 나면 몸은 녹초가 된다.

방송준비로 밤을 새고 녹화까지 하고 나면 몸은 녹초가 된다. ⓒ 방송작가유니온


방송작가는 기본적으로 프리랜서입니다. 우리 같은 막내작가들도 마찬가지죠.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 즉 비정규직 신세입니다. '프리랜서'라는 단어를 인터넷에 검색해봤습니다. 프리랜서는 '특정한 사항에 관하여 그때 그때 계약을 맺고 일을 하는, 집단이나 조직의 구속을 받지 않고, 자기 자신의 판단에 따라 독자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현재 상급자, 그러니까 담당PD의 업무 지시를 받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상주하며 근무합니다. 이건 저희 선배 작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로그램에 따라 출퇴근이 자유로운 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담당PD의 업무 지시·감독을 받습니다.

특히나 여성, 청년, 비정규직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인 저희 막내작가들은 '작가'가 아닌 '막내'로 통하며 더 큰 부조리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막내작가의 주된 업무는 프리뷰와 자료조사, 섭외와 취재, 자막과 홍보문 작성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여성'이면서 팀의 '막내'인 우리들에게는 암묵적으로 주어지는 또 다른 범주의 노동이 존재합니다.

"우리 막내작가 정말 성격 좋아"라는 말은 커피나 담배 심부름을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하는 걸 뜻합니다. "걔 진짜 근성 있어"라고 하는 건 비인격적인 대우나 폭언, 도를 넘는 성희롱에도 웃는 얼굴을 유지해 팀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걸 뜻합니다.

때로는 이게 취재를 잘 하거나 보도자료를 잘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막내작가의 자질로 평가됩니다. 싹싹하지 않아서, 말대꾸를 해서, 내 기분에 맞춰주지 않아서, 각종 심부름을 달가워하지 않아서, 무엇보다도 감히 자기 권리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지금도 수많은 막내작가들이 해고 통보를 받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프로그램 연출 권한을 가진 PD는 프로그램에 패널을 세팅하듯, 작가를 세팅합니다. 방송사가 작가를 직접 고용하지 않기 때문이죠. 작가의 고용과 해고가 담당 PD의 손에 달려 있는 고용 구조는 작가와 PD를 갑을관계로 만듭니다. 특히 팀에서 가장 어리고 경력이 적은 막내작가는 이런 구조 속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PD에게 잘 보여야 입봉을 하고 다음 일자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어느 선배 작가가 이런 말도 했습니다. "서브 작가로 입봉하려면 어때야하는지 알아? 글 잘 쓰는 것만 가지고는 안 돼. PD와 관계가 좋아야 해." 그래서 저는 오늘도 기꺼이 을이 됩니다.

작지만 큰 변화의 시작, "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세요"

 작년 11월 방송작가 노조가 출범했다.

작년 11월 방송작가 노조가 출범했다. ⓒ 방송작가유니온


방송작가를 꿈꾸면서 아카데미를 다녔을 때 선생님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이거였습니다. "너는 왜 방송작가를 하려고 하니? 내가 니 나이면 이 짓 안 한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얼른 다른 일 찾아봐." 이런 조언은 학원이 아닌 방송국에서도 계속됩니다.

선배 작가들은 저희들에게 입을 모아 "하루라도 빨리 그만둬라, 아까운 젊음을 왜 이런 데서 낭비하니, 나야 그만둘 타이밍을 놓쳐서, 배운 게 도둑질이라 작가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서일까요? 방송 아카데미 동기들을 만날 때 우리의 안부 인사는 어느새 이 한마디가 되어버렸습니다. "너 아직도 작가 일 하니?"

작가 일을 그만둬야겠다. 지금이라도 중소기업에 취직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을 즈음 저에게 아주 작은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이런 부조리와 관행에 대해 속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들만의 공간이 생긴 거죠.

지난해 11월 출범한 '방송작가유니온(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은 작가들의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 생긴 '방송계갑질119' 오픈채팅방은 썩은 갯벌에서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살아온 우리들의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작은 숨구멍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곳이 생긴 뒤 우리는 내가 겪은 일이 나만의 고민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약자였던 건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내가 혼자였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이런 우리들의 고민에 조금씩 귀 기울여주는 PD들과 기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 또한 기분 좋은 변화입니다.

그 변화의 끝에 과연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저는 이런 미래를 꿈꿔봅니다. 제가 서브작가가 되고 메인작가 됐을 때 적어도 작가 후배들에게 "야, 방송작가 하지 마"라는, 기형적인 대답은 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방송작가라는 직군이 맞닥뜨리고 있는 모순을 바꿔나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기를. PD와 더 나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진정한 동료로 마주하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숫자로 본 막내작가
막내작가 평균 노동시간 55.7시간
평균 급여 120만 6259원(시간당 임금 3,888원)
방송작가의 94.6%가 여성

출처: 2016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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