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월 칼바람이 매섭게 불던 무렵, 나는 국도변에 자리 잡은 한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모으고 있었다.

좋지 못한 집안 사정 때문에 집을 떠나 장학금+기숙사 입사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지방의 국공립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기숙사가 잠시 문을 닫던 방학 때도 집에 오는 걸 포기하고 근처 학과 선배들의 자취방을 전전하던 시절이었다.

운좋게 구한 일자리였지만 교통 사정이 좋은 대도시와는 판이하게 2~3시간 간격으로 한대 씩 운행되는 버스로는 감히 출퇴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용케 마련한 낡은 자전거 페달을 20여 분 정도 밟으며 교대 근무 방식으로 아침부터 때론 밤 늦게까지 트럭, 승용차 주유구에 "총질"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런저런 라디오 프로그램이 들려주는 다양한 음악들을 사무실에서 틈나는대로 들으면서 일했기에 통장에 쌓이는 잔고와 함께 쏠쏠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학창시절 무척 좋아했던 (김)광석 형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라디오 뉴스로 접하며 슬퍼했던 것 역시 그 무렵의 일이기도 했다.

읍내 작은 음반 가게에서 구입하던 카세트 테이프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하며 모은 용돈으로 구입했던 카세트테이프.  이젠 비틀스의 < Anthology 3 > 외엔 단 한개의 테이프도 남아있지 않다.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하며 모은 용돈으로 구입했던 카세트테이프. 이젠 비틀스의 < Anthology 3 > 외엔 단 한개의 테이프도 남아있지 않다. ⓒ 김상화


받은 급여 중 나중에 쓰게 될 각종 생활비를 따로 통장에 넣어두고 남은 돈으로 상표조차 없는 싸구려 일렉 기타를 사서 연주하고 읍내 작은 레코드점에 들러 카세트테이프를 구입해 듣던 일 등은 당시 고된 하루의 피로를 잊게 만들어주던 청량제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CD와 카세트 테이프가 음반 시장을 장악하던 무렵이었지만 CD를 들려줄 오디오도 없었고 테이프의 가격이 팝 음반 기준으로 1/3 이상 저렴했기 때문에 중고교 때부터 틈틈이 모은 용돈 대부분을 테이프 구매에 쓰곤 했다.

비록 서울 유명 매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숫자의 CD·테이프가 비치된 아쉬움은 있었지만 아쉬운대로 비틀스, 마이클 볼튼 같은 팝부터 안치환, 이승환 등의 가요 음반을 하나둘씩 사모을 수 있었다.

이렇게 쌓인 테이프들은 낡은 삼성 마이마이 플레이어와 이름 모를 브랜드의 이어폰을 통해 항상 내 귓 속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당시의 단골 가게는 학교 졸업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라졌고 이후 재건축 등으로 빌딩이 들어서면서 엣 흔적마저 사라진 지 오래라고 한다.

마치 음유시인처럼 긴머리 휘날리며 틈틈히 'Dust In The Wind'(캔자스)를 통기타로 치던 사장 아저씨는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계실지 때론 궁금해지곤 한다.

가난한 고학생, 드디어 CD를 구입하다

 학창 시절 큰 맘먹고 구입했던 첫번째 수입 CD였던 스틸리 댄의 4장 짜리 전집 < Citizen 1972~1980 >.  스틸리 댄은 필자의 아이디, 닉네임 등으로 자주 애용할 만큼 좋아한 밴드 중 하나였다.

학창 시절 큰 맘먹고 구입했던 첫번째 수입 CD였던 스틸리 댄의 4장 짜리 전집 < Citizen 1972~1980 >. 스틸리 댄은 필자의 아이디, 닉네임 등으로 자주 애용할 만큼 좋아한 밴드 중 하나였다. ⓒ 김상화


자잘한 아르바이트 생활은 졸업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주말 학교 근처 농장에서 자잘한 일손을 돕는 것부터 학과 교수님의 연구 프로젝트를 도우며 "근로 장학생" 명목으로 적은 금액이지만 한푼 두푼 모았다. 어찌보면 지금보다 더욱 악착같이 일을 하던 시기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던 어느날, 간만에 들른 집에 못보던 물건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CD플레이어가 달린 오디오가 그 주인공이었다. 당시 직장 생활을 하던 누님이 낡은 TV를 새 걸로 교체하면서 큰맘 먹고 오디오까지 장만한 것이었다.

이걸 본 나는 순간 욕심이 생겼다.  테이프로는 발매되지 않은 탓에 그저 "그림의 떡"일 수 밖에 없었던 이른바 해외 팝-재즈 명작 CD를 한번 사볼까 하는... 

남들은 당시 새로 생겨난 강남과 명동 타워레코드라던든 유명 대형 매장에서 값비싼 수입 CD를 사고 자랑하기도 했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못한 입장에선 그렇게 까지 하기란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찾은 한 매장에서 오랜시간 서성이던 끝에 샀던 음반은 바로 스틸리 댄(Steely Dan)의 4장짜리 전집 < Citizen 1972-1980 >이었다.

지금도 아는 사람은 잘 아는, 하지만 모르는 이들은 정말 모르는 스틸리 댄은 국내 연주자 부터 음악 마니아들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존재감을 인정받았던 명그룹이었다. 또한 지금 <오마이뉴스>의 회원 아이디로 사용할 만큼 나로선 각별한 애정을 지닌 팀이기도 하다.

CD의 전곡을 60분짜리 공 테이프 여러개에 나눠 복사하고 밤낮 가리지 않고 도서관, 학교 기숙사에서 이 음반을 들으며 고단했던 대학 생활을 버텨 나갔다.

이젠 몇장 남지 않은 책장 한 구석의 음반들

 필자가 소장중인 CD 중 일부.  한때 2000여장 이상 달했던 각종 음반을 정리하고 지금은 300여장만 남겨둔 상태다.

필자가 소장중인 CD 중 일부. 한때 2000여장 이상 달했던 각종 음반을 정리하고 지금은 300여장만 남겨둔 상태다. ⓒ 김상화


시간은 흘러 어느덧 CD와 카세트테이프는 추억 속 한 페이지로 사라지다시피 했다.  어느 순간 "CD든 스트리밍 음원이든 mp3 파일이든 형태만 다를 뿐 똑같은 음악"이라는 생각이 머릿 속에 들어왔다.

결국 수백개 이상 있었던 테이프는 몇차례의 이사를 거치면서 비틀스의 < Anthology > 음반 딱 하나만 남겨둔 채 없애 버렸고 학교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며 모았던 한때 2천여 개 이상 달했던 CD마저도 300여 장을 제외하곤 여러 대의 하드디스크에 나눠 백업하고 대부분 정리했다.

중고 처분으로 내 손을 떠난 음반들이 어느 누군가의 집에서 새로운 주인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이제 그 빈 자리는 mp3 파일 또는 각종 사이트의 수많은 등록 음원이 대신 메워주고 있다.

이를 지켜본 주변 사람들은 이런저런 고생 끝에 모은 걸 왜 정리했냐고 대신 안타까워 해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

'여우야'(더 클래식)를 들으면 당시 좋아했던 그녀를 위해 여러 곡들을 밤새 카세트테이프에 모아 녹음하던 일도 생각나고 '취중진담'(전람회)을 접하면 이 곡을 즐겨 부르던, 하지만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한 후배의 모습도 아른거린다.

"누군가에게 음악은 예전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가장 최상의 도구"라는 이름 모를 이의 말 처럼 비록 실물 형태만 없을 뿐, 예전의 아련한 기억들은 그 시절 음악을 들을 때면 되살아나곤 한다.

쉽지 않던 20대를 보낸 나에게 행복 그 이상의 가치를 마련해준 그때의 음반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덧붙이는 글 '덕질 때문에 OO까지 해봤다' 응모글입니다.
덕질 아르바이트 CD 카세트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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