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칸 영화제 풍경, 올해도 가볼 예정이다.

2016년 칸 영화제 풍경, 올해도 가볼 예정이다. ⓒ 신진화


지난 2월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영화 보러 갔다가 우연히 부천 국제영화제 김종원 부집행위원장을 만났다. 2017년 5월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우연히 술 한 잔 하며 알게 됐는데, 또다시 영화제에서 만난 거다. 칸에서 만났을 때 "프랑스에서 과학 공부하는 박사과정 학생입니다"라고 소개했을 뿐,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다. 그런데 베를린에서 선생님이 '네가 학생인 거 말곤 아는 게 없구나'라고 날 궁금해했다. 그는 영화제에 영화 보러 왔을 사람에게 가볍게 물어보기 좋은 질문을 제일 먼저 툭 던졌다. "너 좋아하는 영화감독 세 명만 대봐." 선생님의 질문에 순간 당황해 "선생님, 저 실은 10년 동안 영화를 끊어서 누굴 좋아했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라고 답했다.

너무 사랑해서 우린 10년 동안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한때 영화를 너무 사랑했다고 했다. 영화를 보다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고 했다. 매일 눈을 뜨고 감는 순간까지 영화만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2004년 처음 가 본 부산 국제영화제였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 그저 큰 영화제가 열린다고 하니, 영화가 궁금해서라기보단 영화제가 궁금해서 가봤던 자리였다.

영화제가 처음이니까 어떤 영화를 봐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내가 볼 수 있는 상영시간대의 영화 중 포스터가 제일 예쁜 영화를 골랐다. 그래도 양심상 시놉시스 한 줄은 읽었다. 더 많이 읽으면 혹시나 기대감이 생길까 봐 딱 한 줄만. 감독 이름도 안 봤다.

슬레이트라도 치고 싶었던, 열정적이었던 날들

 2017년 뤼미에르 영화제 폐막식에서 왕가위 감독님.

2017년 뤼미에르 영화제 폐막식에서 왕가위 감독님. ⓒ 신진화


제일 처음 본 영화는 람춘유에 감독의 <할리우드의 고양이>라는 작품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엄마 아빠 손에 이끌려 시원한 할리우드 영화만 봤다. 두 분이 좋아하는 건 액션물이라, <스피드>나 <다이하드> 같은 엄청난 속도와 시원한 스토리 중심의 영화들이었다. 이후 홍콩 독립영화를 보고 너무 놀랐다. 일단 저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게 뭔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내 고민과 생각들을 영상으로 만들고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게 영화라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영화가 끝나고 진행된 감독과의 대화를 마치자마자 감독에게 달려가 이야기를 나눴다. 감독이 명함을 주더니 '연락하고 지내자'라고 해서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그해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노동석 감독의 <마이 제너레이션>이라는 영화가 화제였다. 영화제가 끝나고 화제의 작품을 부산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했다. 영화를 보고 집에 가는데 '꼭 영화 만드는 현장에 있고 싶다. 슬레이트 치는 일이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참 강렬했다.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았다. 부산 시네마테크에서 2006년 겨울 영화 제작 워크숍 수업을 들으며 그 꿈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다가 영화를 만들게 됐다는 말은 이 상황을 두고 한 말이다.

당시 두 달 동안 팀을 이뤄 필름과 디지털 형식으로 팀당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내 생각을 이야기로 넣을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그때는 너무 좋아서 하루에 잠도 두 시간씩만 잤다. 눈 뜬 시간 동안엔 어떻게 영화를 만들지 생각하고 어떤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하곤 했다.

그때 수업 들으며 참 많이 영화를 봤다. 최초의 영화인 뤼미에르 형제가 찍은 단편 <기차의 도착>부터 훌륭하다는 고전들까지 두루두루 봤다. 물론 작품적으로 우수하단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려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보다가 졸기도 했다. 그땐 인생의 경험이 부족해서 영화 주인공의 감정을 마음으로 대하기보단 머리로 이해하려 했으니 흐름을 못 좇았다 할까. 그래도 좋다고 졸면서 보러 다녔다. 지금 충무로에서 활발히 작품 활동하는 나홍진 감독, 이경미 감독 그리고 김종관 감독의 장편들은 영화를 10년 동안 끊었던 터라 못 봤지만, 그들의 단편들은 그때 다 봤다.

그때 워크숍이 끝나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영화 계모임을 만들었다. 모임 이름은 'F2.8'이었다. 영화 촬영 카메라 조리개 값에서 따왔다. 우리는 F2.8은 카메라 조리개가 활짝 열린 것을 의미한다고 우린 '뇌를 오픈하고 다닌다'는 의미로 붙였다고 했다. 반면, 그때 영화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은 어두울 때 저 조리갯값을 쓴다면서 우리를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 영화 만드는 것도 보는 것도 너무 좋아서 뇌를 활짝 오픈한 채 정신줄을 놓고 시네마테크를 돌아다녔으니 딱 우리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렇게 F2.8 친구들과 모여 작은 영화들을 만들었다. 한 일 년 동안 크게 든 작게 든 참여한 작품이 9편 정도인가. 심지어 그때 만든 영화들을 영화제에 출품도 했다. 정말 부끄럽지만 다음 영화에 검색하면 내가 영화인으로 나온다. 그러다 돌연 영화를 끊었다. 아니 그냥 내가 돌아서야만 했다.

한동안 영화를 볼 수 없었던 이유는

 이번 베를린 영화제에서도 영화 구매 가능한 표 중 포스터가 가장 이쁜 영화를 봤다. 저기 작품 중 L'Animale을 봤는데, 내가 본 베를린 영화제 작품 중 최고였다.

이번 베를린 영화제에서도 영화 구매 가능한 표 중 포스터가 가장 이쁜 영화를 봤다. 저기 작품 중 L'Animale을 봤는데, 내가 본 베를린 영화제 작품 중 최고였다. ⓒ 신진화


왜냐면 그때 당시 난 대학교 졸업반이었다. 졸업 후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데, 영화가 날 미친 듯이 흔들어 놨던 거다. 영화가 좋아서 영화로 먹고살고 싶어졌다. 근데 단순히 몇 년 동안 영화를 좋아했다고 영화 쪽으로 장래를 틀 수 없었다. 재능이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도망쳤다. 그 이후로 영화를 안 봤다. 흔들릴까봐. 그렇게 십 년이 지났다.

김 선생님께, 쭉 내가 왜 영화를 도망쳤는지 이야기 드린 후 그때 했던 고민을 선생님 앞에 다시 꺼내보았다. 영화로 일하시는 분의 의견이 궁금해서였다. 선생님이, "열정이 제일 중요하지"라고 말씀해주셨다. 근데 그 말이 참 아팠다. 이젠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길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땐 이런 고민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예술적 감각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갑자기 영화를 공부하겠다는 저 말이 참 부끄러워서 말을 꺼낼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영화를 좋아하기 이전엔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지구과학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그래서 지구 과학을 평생 공부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로서도 재능이 없을 것 같아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영화라니. 가만 생각해보면 그땐 내 재능들이 다 희미해 보여서 무언가를 선택하기에 자신감이 없었다.

그렇게 지내다 한 번은 심심해서 사주를 봤다. 운명의 직업으로 연구소의 연구원과 영화 평론가가 있었다. 어쩌면 영화가 내 운명의 직업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은 마음속 미련으로 남아서 이루지 못한 꿈의 가장자리에서 귀신처럼 계속 맴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영화제에 이끌려 돌아다니는 것 같고, 영화제 속에서 내 옛 추억들을 찾아내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다. 칸 영화제에서 부천 국제 영화제에서 일하시는 선생님들과 해변가에서 술 한잔할 땐, 영화 촬영 후 첫 버스가 올 때까지 술을 마시며 놀던 때가 생각났다. 작년에 뤼미에르 형제의 이름을 딴 프랑스 리옹에서 열린 뤼미에르 영화제에 다녀왔을 때, 뤼미에르의 작품들을 보고 단편영화가 무엇인지 한참 고민했던 내가 생각났다. 이번 베를린 영화제는 부산국제영화제 키즈가 어른이 되어 영화제를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영화를 끊은 지 10년 만에 다시 영화를 보기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젠 다시 내가 영화에 미쳐도 본업을 버리고 다시 들어갈 수 없을 테니까. 다른 직업을 갖기엔, 나이도 너무 많고, 그러기엔 내가 너무 멀리 딴 길로 왔으니까. 그래서 이제 다시 용기를 내 다시 영화를 좋아해 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지금 잠시 유럽에 사는 기회를 이용해서 유럽에서 열리는 영화제를 돌아다녀 볼까 싶다. 영화제는 나도 모르는 취향을 발견해 주는 유일한 공간이니까. 그래서 이번주 우리 옆 동네 스위스 프리부르 국제 영화제에 간다. 나의 덕질은 십 년 만에 부활했다.

덧붙이는 글. 2015년부터 프랑스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2015년도 칸 영화제에 뤽 자케 감독의 <빙하와 하늘>(원제: La Glace et le ciel) 영화가 경쟁부문에 선정되었다. 우리 연구소 출신의 선대 연구자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인데 딱 내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연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게다가 저 영화에 내 지도교수님도 나온다. 내가 연구하는 연구소의 배경으로 내 연구에 대한 내용이 영화로 나오다니. 영화는 내겐 어쩌면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의 무엇일지도.

덕질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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