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방 책장에는 책보다 블루레이가 더 많이 꽂혀있다.

내방 책장에는 책보다 블루레이가 더 많이 꽂혀있다. ⓒ 구건우


오늘은 나의 영화 덕질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풍요'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었던 어린 시절, 우리집엔 비디오 플레이어(VTR)가 없었다. 당연히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 테이프란 걸 빌려본 적도 없다. 고등학교 때까지 영화관에 갔던 건 3번에 불과했던 내가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MBC <주말의 명화>, KBS 2TV <토요명화> 같은 영화 상영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새벽에 출근하던 부모님은 밤 8~9시 사이에 주무시곤 했는데, 소리에 민감하셨던 아버지 탓에 맘편히 영화를 보기도 어려웠다.

이런 나의 성장과정은 영화에 대한 갈증을 남겼던 것 같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친구들과 영화관에 가는 게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군 입대 전 대학교 1, 2학년 때 상업영화에서 독립영화까지 가리지 않고 섭렵했다. 특히 군 입대 직전에는 극장 상영작 중 내가 보지 않은 영화가 없을 정도였다. 군 제대 이후에는 상영관을 찾는 일이 많이 줄어 들었다. 대신 영화 잡지를 사서 틈틈이 읽기도 했고 꾸준히 한달에 1~2편씩은 영화관에서 관람했다.

사실 이때만 해도 '영화 덕후'라고 말하기엔 좀 거리가 있다. 남보다 영화를 조금 더 보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본격적인 '영화 덕질'은 아마도 영화DVD를 수집하면서부터였다. 대학 시절 내내 겨울방학 때면 나는 근로 장학생으로 학교에서 일했다. 근무시간이 1시간도 채 안 됐던 탓에 특별히 약속이 없는 날에는 일을 마치고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공부도 독서도 하기 싫은 날이면 도서관에서 영화 DVD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비디오 테이프 보다 월등한 화질은 물론, 삭제 장면과 메이킹 영상 등 다양한 부가 영상을 수록한 DVD에 금방 빠져들었다. 특히 PC로 DVD를 볼 땐 영어 자막과 한국어 자막을 동시에 볼 수 있어 겸사겸사 영어공부에 활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영어공부를 하겠다는 미명 아래 여윳돈이 생길 때면 DVD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수집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여지껏 모은 DVD와 블루레이가 1000장이 넘는다. 최근에는 감각적인 디자인과 다양한 구성으로 판매되는 한정판 블루레이에 필이 꽂혔다. 인기 영화의 블루레이 한정판은 예약 판매가 시작되는 당일 품절이 되곤 해서 주문전쟁을 치른다. 작년 7월 5일, 배우들의 랜덤 사인엽서 및 시나리오 포토 콘티북 등이 담겨있는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밀정> 블루레이 한정판 프리오더가 오후 2시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난 1시반부터 회의가 연달아 잡혀 있었다.

회의가 다 끝나려면 4시는 넘어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예약판매 시간에 알람을 맞춰 놓고, 첫 회의 중간에 전화 온 척 회의실을 나가 구매에 성공했던 기억이 있다. 예상대로 <밀정> 블루레이 한정판은 예약 판매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품절되었고, 상품평 하단에는 당일 구매에 실패한 사람들의 볼멘소리들이 적혀있었다. 당시 일찌감치 구매에 성공한 난 편안한 마음과 밝은 얼굴로 미팅을 이어갈 수 있었고, 며칠 뒤 송강호 배우의 사인 엽서가 동봉된 <밀정> 블루레이를 받을 수 있었다.

DVD&블루레이 수집은 단순히 영화에 대한 소장 욕구만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DVD&블루레이에 수록된 메이킹 필름은 내게 좋은 교재이며, 코멘터리는 영화를 보는 시각을 넓혀주는 확대경 같은 역할을 해준다. 영화 < 400번의 구타>로 유명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은 아래와 같은 말은 남긴 적이 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좋아하는 영화를 2, 3번 보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그 영화에 대한 평을 쓰는 것이며,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영화를 사랑한다는 표현이 왠지 낯간지럽지만, 좋아하는 영화를 2, 3번씩 보던 나는 트뤼포 감독이 이야기한 영화를 사랑하는 두 번째 방법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2013년 봄, 네이버에 영화를 주제로 한 블로그를 개설한 것이다. 주로 영화 리뷰와 뒷이야기들을 정리해 올리곤 했는데, 가끔 내가 쓴 글이 네이버 영화 섹션에 소개 되어 관심을 받기도 했다. 특히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개봉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설국열차 해외 반응'이라고 검색하면 당시 내가 <설국열차>의 해외 반응을 모아 소개했던 포스팅이 가장 상단에 소개된 것. 하루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관심 속에 나는 블로그에 빠져들었고 나만의 영화 미디어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렇게 꾸준히 영화 관련된 글을 써왔던 나는 2014년 2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바로 '네이버 지식in'이다. 시작 동기는 거창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지식을 나눈다는 큰 뜻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우연히 이벤트 때문에 시작한 거였는데, 답변을 달다 보니 감사 인사도 받고 채택된 답변으로 기부도 할 수 있어 지식in에 정을 붙이게 되었다. 당연히 주로 영화 분야에서 활동을 했는데, 답변을 달고 등급을 올리는 게 마치 RPG 게임에서 '레벨 업'하는 것 같은 재미가 있었다.

 네이버에서 받은 파워지식iN 감사패

네이버에서 받은 파워지식iN 감사패 ⓒ 구건우


급기야 '레벨업'에 눈이 먼 나는 지식in에 답변을 달기 위해 영화를 공부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 이르렀다. 급속도로 지식in에 빠지게 된 나는 하루에 15~20개씩 답변을 달기도 했는데 결국, 시작 4개월만에 '지식in 영화 에디터'로 선발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바로 내가 '2014 네이버 파워 지식in'에 선정된 것이다. 한때 열심히 했다고는 하지만, 영화분야에서의 지식in 순위가 불과 76위에 불과했던 터라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놀라웠다. 나름 좋아하는 일로 인정받아서인지 상당히 기분이 좋았었다. 돌이켜보면 답변 달겠다고 영화전문서적을 탐독하고, DVD&블루레이에 수록된 작품 해설과 제작과정을 챙겨보았던 내 행동들이 훗날 기사를 작성하는데 큰 밑거름이 된 것 같다. 그렇게 지식in 활동은 내게 큰 성취감과 영화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다 주었다. 훗날 내가 시민기자에 도전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런 나의 이야기는 '지식iN 15주년 기념 수기 공모전'에서 당당히 1위 차지하며 내게 상금 100만 원을 안겨주기도 했다. 근래에는 예전만큼 지식in 활동을 하고 있진 않지만 틈틈이 답변을 달며 내가 '파워 지식in'이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원래 대전 충남권에서 살았던 나는 회사 이전으로 인해 2015년 겨울을 앞두고 경남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이사 이후에 가끔씩 차로 1시간30분여 걸리는 부산 '영화의 전당'에 가고 있다. 영화의 전당에서 가끔 GV행사가 있는 영화들을 관람하기는 하지만 그곳에 가는 주 목적은 따로 있다. 바로 영화 포스터 팸플릿을 모으기 위해서다.

2015년부터 새로운 영화 덕질을 시작했다. 그게 바로 영화 팸플릿 수집이다. 영화의 전당은 대형 멀티플렉스에서 좀처럼 상영하지 않는 독립 영화들도 상영한다. 당연히 그곳엔 독립영화의 영화 팸플릿도 구비되어 있다. 게다가 엽서형태의 팸플릿까지 비치되어 있어 영화의 전당은 내게 보물섬 같은 존재다.

하지만 거리가 꽤나 먼 탓에 자주 가지는 못 한다. 작년엔 영화의 전당 회원인 친구에게 공수를 부탁해서 영화 팸플릿을 받기도 했다. 재미난 건 나에게 공수 해주던 그 친구가 이젠 나처럼 영화 팸플릿 수집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영화 팸플릿 수집은 DVD&블루레이 수집과 달리 돈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고, 클리어 파일에 넣어 가득 채우면 마치 한 권의 책을 완성한 듯 뿌듯한 기분도 든다. 시간이 흐른 영화 팸플릿를 다시 볼때면 그 시절만의 정취가 풍겨와 마치 내가 그 시간을 수집한 듯한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특히 요즘 재개봉 영화들이 많아지면서 오래된 영화의 팸플릿을 수집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다. 그것들을 볼 때면 추억의 소품을 찾은 것처럼 무척이나 반갑다.

 재개봉 영화는 내게 영화전단지라는 선물도 안기고 있다.

재개봉 영화는 내게 영화전단지라는 선물도 안기고 있다. ⓒ 구건우


아마도 나의 영화덕질이 만들어낸 최고의 결과물은 바로 시민기자 활동을 통해 만들어 낸 기사들일 것이다. 2016년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 제도를 알게 되었고, 그해 8월 두 번의 퇴짜 끝에 첫 기사가 등록되었다. 영화 <아수라> 개봉을 앞두고 김성수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 정우성이 함께했던 옛 영화들을 돌아보는 기획 기사다. 그리 관심을 받지 못한 기사였지만 내겐 기념비적인 기사였다. 왜냐하면 어릴적 많은 꿈 중에 하나가 바로 기자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취재기자는 아니지만, 어린시절 꿈의 절반은 이룬 것 같아 기분이 무척 좋았다.

이후 영화 관련 기획기사와 영화 리뷰 그리고 할리우드 소식 등을 꾸준히 작성하여 올렸는데, 내 기사가 대형 포털사이트 메인에 소개되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을 때면 무척이나 신기하고 뿌듯했다. 그해 10월부터 [숨은영화찾기]라고 국내 극장에서 미개봉되었지만 홈무비로 손색없는 영화들을 소개하는 기사도 비정기적으로 올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소개했던 영화가 <플립>인데, 이 영화가 내가 소개한 지 9개월 뒤에 정식으로 개봉했다. <플립>이 북미 개봉 이후 7년만에 국내에 정식개봉하여 나름 잔잔한 흥행을 거두는 걸 보면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최근엔 내 직업적 지식을 활용한 [보안쟁이가 들려주는 영화속 보안이야기]란  영화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최근엔 내 직업적 지식을 활용한 [보안쟁이가 들려주는 영화속 보안이야기]란 영화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 구건우


작년 연말부터는 내 직업적인 지식을 활용한 [보안쟁이가 들려주는 영화속 보안이야기]란 기사도 쓰고 있다. 시민기자라는 타이틀을 얻은 지 약 19개월 정도가 흘렀는데, 270개가 넘는 기사를 작성했으니 나름 열심히 활동한 편이다. 큰 액수의 원고료는 아니지만 내 용돈 정도는 얻을 수 있고 언론에 참여하는 시민이란 자부심 안겨주는 시민기자 활동은 어느덧 나의 또 다른 직업같이 느껴진다.

전성기 땐 하루에 12만 명을 불러들였던 영화 블로거, 네이버 영화 분야 파워지식iN, DVD&블루레이 1000편과 영화전단지 1200장을 모은 당당한 영화 수집가 그리고 영화분야 시민기자로 활동까지, 영화 덕질로 얻게 된 이 또 다른 이름들은 내게 자존감을 높여주는 원동력으로 언제나 새로운 도전으로 이끌고 있다.

영화 블루레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두 아이의 아빠이자 영화 좋아하는 네이버 파워지식iN이며, 2018년에 중소기업 혁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보안쟁이 입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