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포스터

▲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포스터 ⓒ THE픽쳐스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누군가에게 죄가 있다면 그 사람은 얼마 동안이나 그에 대한 값을 치르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만일 그 죄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해 놓은 수위 내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적절한 수준의 대가인지에 대한 문제는 남겨두더라도, 산술적으로 계산 정도는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지점의 죄가 있다는 것. 우리가 도의적이라고 부르는 수준의 문제이거나, 한 개인이 타인이 아닌 자신 스스로에게 짊어지게 만들어 버린 문제들 같은 것들이다. 이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그런 문제를 짊어지고 있는 한 남자, 그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문턱을 넘으며 그 동안 애써 모른 척하며 지나 온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02.

영화는 시작과 함께 주인공인 리 챈들러(케이시 에플렉 역)의 모습을 뒤따른다. 자신의 고향인 맨체스터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의 거리에 있는 보스턴이라는 도시. 그는 그 곳에서 혼자 지내며 아파트 관리인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쁘지도 않은 생활의 연속.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딱히 열정을 갖고 있거나, 이를 통해 자신의 어떤 미래를 그려본 적도 없어 보인다. 시시콜콜한 잡일이 끝나면 마을 구석에 위치한 펍으로 달려가 농을 걸어오는 여자들과 술잔을 기울이거나, 그런 자신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내놈들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어주는 게 취미라면 취미일까. 그는 자신의 삶을 딱 그 언저리에 위치해 놓은 뒤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03.

그러던 어느 날, 그런 그에게 하나 밖에 없는 가족이었던 형, 조 챈들러(카일 챈들러 역)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사인은 심장마비. 형은 원래 심장이 약해 몇 번이나 쓰러지곤 했었다. 그 때마다 형이 살고 있던,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이 도시 맨체스터를 찾아와 조카인 패트릭(루카스 헤지스 역)을 돌봐주곤 했던 건 리였다. 어쩌면 그가 고향을 떠나면서도 더 먼 곳으로 가지 못한 것은 그런 형이 갖고 있던 문제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그 때만큼은 꼭 그 곁에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하지만 영화는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왜 리 챈들러라는 인물이 자신의 고향을 그렇게 견디지 못했는지, 또 가족들의 곁을 떠나야만 했는지를 속 시원히 알려주지 않는다. 인과관계를 설명하기보다 그저 그가 움직이는 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스틸컷

▲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스틸컷 ⓒ THE픽쳐스


04.

고향으로 돌아와 형의 죽음을 확인한 그는, 조 챈들러의 죽음과 관련된 일들을 빠르게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조금도 이 도시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홀로 남은 조카의 삶에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다만, 어린 조카 대신 어른인 자신이 해결해야만 하는 일들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장례 절차와 관련하여 조금도 패트릭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도 묵묵부답. 배도 팔아버리려고 하고, 형의 시신도 돌아오는 봄이 될 때까지 냉동고에 넣어둘 생각이다. 아버지의 시신을 그렇게 둘 수 없다고 패트릭이 소리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일들을 직접 열거하며, 하고 싶으면 직접 해보라고 소리친다.

패트릭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간섭하려 하지 않는다. 처음에 패트릭이 자신의 여자친구를 밤에 집에서 재워도 되겠냐고 묻는 말에도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 시큰둥하게 그러라는 리 챈들러. 그의 그런 모습이 무언가 모순적으로 다가온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은 그의 의견을 묵살해가면서까지 해결하려고 하고, 그 외의 것들은 그가 원래 갖고 있던 생활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말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 그런 대사가 나오기는 한다. "아빠는 어떻게 했어?" 이 장면을 두고 리 챈들러의 입장에서 형인 조 챈들러가 아들을 교육하던 방식을 따르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만약 그가 그렇게까지 패트릭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장례 절차 상에서 그가 원하는 것들도 들어줬어야 하는 게 아닐까.

05.

그가 갖고 있던 진짜 문제는 형의 재산 상속 문제로 찾아간 변호사 사무실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형의 재산 상속이 당연히 그의 아들인 패트릭의 이름으로 정해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자신의 이름이 그의 대리인이 되어 있었던 것. 그리고 그 순간 리 챈들러는 과거의 한 순간을 떠올리고 만다. 자신이 그 동안 치열하게 잊으려고 노력했던 그 악몽 같은 순간을 말이다. 이 장면에서 그가 떠올리게 되는 과거의 사건 시점과 현재의 시선이 교차되는 장면은 이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앞으로 남은 러닝타임 동안 나아갈 방향을 암시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드라마틱하고 격정적인 감정의 표출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사실 내용 상으로만 따지자면, 이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절정)에 해당된다. 주인공의 행동을 설명하는 동기와 그 실마리가 표현되고 있는 장면이다. 이 부분을 통해 관객들은 리 챈들러라는 인물이 형의 죽음 이후에 자신의 고향인 맨체스터를 왜 그렇게 빨리 떠나고 싶어하는지, 그 동안의 시간을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일반적이라면 이런 지점의 내용들은 영화의 후반부에 배치되어 관객들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부여 받게 되는데, 그 방법이 극을 치닫게 만드는 데 더 유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 했듯, 이 작품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보여주고자 하는 지점은 내러티브의 폭발을 통한 감정적 공감이 아니라, 관조적인 태도를 견지한 상태에서의 이성적 이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시선이 처음부터 끝까지 극 속 인물들에게 밀접하게 다가가지 않고, 관망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또한 동일하다.

06.

영화에서는 보스턴에서 그의 삶이 어땠는지 정확하게 설명되고 있지 않지만, 맨체스터로 돌아 온 이후 그는 과거에 자신이 묻어두었던 기억들과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무력해진다. 그가 맨체스터를 떠나 보스턴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은 과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일종의 속죄라고 보는 게 가장 일반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어떤 무력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고가 일어난 직후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아내를 따라 가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며, 그런 자신에게 죄가 없다며 집으로 돌아가라는 경찰들의 이야기에 조금도 수긍하지 못한 채 권총을 집어 뽑아 자살을 시도하려고 하는 모습 또한 그렇다. 그 몸부림이 처음에는 부정적인 태도로 드러나다가 조금씩 현실적인 방안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처음 제기했던 물음이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만약 그의 행동을 두고 어떤 법적인 조치가 취해졌더라면, 그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 몸부림의 정도가 조금은 덜하지 않았을까?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스틸컷

▲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스틸컷 ⓒ THE픽쳐스


07.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그의 아내였던 랜디(미쉘 윌리엄스 역)라는 인물 또한 자신의 거짓말 같은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독한 노력을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 사고를 겪은 이후에 다른 남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또 다른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심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 일이 벌어진 것이 남편인 리 챈들러의 악의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서로 연락을 끊고 지냈던 그 시간 동안 패트릭의 가족들과 최소한의 교류를 하며 지냈던 것이고, 조 챈들러의 슬픈 소식에 먼저 연락해 왔을 것이다. 길 위에서 두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에서 랜디가 리에게 미안했다고 이야기 하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 이유다. 어쩌면 그녀가 계속해서 리를 만나고 싶어했던 것이, 어쩌면 그녀가 그를 밀어냈던 시간 동안 그가 혼자 짊어지고 있었을 그 과거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 힘든 시간을 겪어왔지만, 이제 나도 이렇게 살고 있으니, 너도 이제 그만 내려놓아도 괜찮아 라고 말이다.

08.

현실에는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그대로 두는 것과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는 것. 이 둘 사이에는 무엇이 되었든 차이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 설령 미래에 그 결과가 같을 것이라 여겨진다고 해도, 어쩌면 그 과정이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맨체스터로 다시 돌아온 그의 모습에서 답을 조금은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뿐만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어떤 상처를 받고 아픔을 느끼는 것은 동일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꽤 인상적이다. 불편해 보이기는 하지만 서로의 관계를 날카롭게 잘라내지 않고, 자신이 처한 상태가 곧 무너질 것 같지만 다시금 일어나는 모습. 어쩌면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그런 비슷한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용한 위로를 전하고 있는 작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무비 맨체스터바이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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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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