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극 <더 헬멧>에서 '헬멧 B'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손지윤. <룸 서울>에서는 운동권 전투조 대장 '미친개', <룸 알레포>에서는 어린 시리아 소녀 '키파'와 시리아 내전을 취재하러 온 기자 역을 번갈아 수행한다.

▲ 일상에서의 저항 "연출이 '저항하는 사람들의 얘기'라고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것이 폭력이든 전쟁이든 죽음이든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저항하는 사람들의, 저항하는 얘기라고요." ⓒ (주)StoryP


"우리에겐 가장 어두운 시대에조차, 어떤 등불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 한나 아렌트

연극이라는 공연 예술 자체에 대해 회의와 불신이 팽배하다. 연극은 과연 '시대의 거울'을 자처할 수 있는가. 연극은 사회 비판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해낼 자격이 있는가. 관객이 보고 행복해하는 무대 뒤에는 누군가의 불행이 쌓여 있던 건 아닐까.

그러나 이런 시대에도 연극은 계속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시대이기에 더더욱 연극이 제 역할을 해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회사 사무실에 딱 들어가면 <더 헬멧> 쓰여 있고, 그 밑에 작게 '폭력적인 시스템에 맞선, 일상성의 회복을 위한 저항'이라고 쓰여 있어요. 한 줄로."

지난 4일 막을 내린 연극 < The Helmet(더 헬멧)-Room's Vol.1 >(아래 <더 헬멧>)은 대학로에서 열심히 타오른 등불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지이선 작가와 김태형 연출의 협업 결과물이다. 이번엔 라이선스 작품을 각색한 게 아니라 순수 창작이다. '지탱극'이라고 불리는 두 사람의 컬래버레이션은 대학로의 '믿고 보는' 브랜드가 되고 있다. 단순히 재미 때문만이 아니다. 파격적인 형식과 극적 재미에 이어 무거운 주제의식까지 한데 아우르기 위해 노력했다. 1987년의 대한민국 서울과 2017년의 시리아 알레포를 조명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하얀 헬멧을 쓴 '백골단'과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얀 헬멧을 쓴 '화이트 헬멧'이 등장한다.

특히나 두 사람은 여성 캐릭터를 위한 서사를 위해 많은 고민을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의 첫 협업이자, 2007년 초연 이후 꾸준히 올라오며 관객의 박수를 이끌어내고 있는 학원형 누아르 연극 <모범생들>의 주인공은 남학생 4명이었다.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더 헬멧>은 여성을 이야기의 중심에 내세웠다. <더 헬멧>이 '지탱극'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작품인 이유이다.

그러나 공연은 연출과 작가의 손에서만 완성되는 게 아니다. 이를 구현하기 위한 배우들의 고민도 필수적이다. 이번 <더 헬멧>에서 헬멧 B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손지윤도, 이번 작품을 소화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지난 1월 14일, 그를 대학로 카페에서 만난 기록이다.

[룸 알레포] 시리아 내전에 희생된 아이 그리고 내전을 취재하는 기자

 연극 <더 헬멧>에서 '헬멧 B'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손지윤. <룸 서울>에서는 운동권 전투조 대장 '미친개', <룸 알레포>에서는 어린 시리아 소녀 '키파'와 시리아 내전을 취재하러 온 기자 역을 번갈아 수행한다.

▲ 카메라에 대한 고민 "기자 덕분에 저희가 사건을 접하고 알게 되는 거지만, 해변가에 떠내려 온 크루디 사진이나, 폐허에서 구해낸 피범벅이 된 아이 사진을 봤을 때는 ‘아니 얘를 일으키지 않고 뭐하는 거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또 <독수리와 소녀> 사진(케빈 카터) 있잖아요. 알려야 할 것을 알렸는데 또 괴로운 일이 생겼었으니까. 그런 지점들이 정말 어려웠어요." ⓒ (주)StoryP


"알레포는 사실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많아요. 전쟁이라든가, 시리아 사태라든가…. 그래서 영상이나 종군기자분들이 쓴 기사들을 많이 접하고, 간접체험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던 게 사실이에요. 특히나 조심스러웠던 것도 있고요. 에피소드 자체가 현실과 환상을 오가기 때문에 '아, 이걸 어떻게 채워야할까', '관객들이 어떻게 보실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다행히 그거를 이해해주시면서 같이 봐 주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죠.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이 들기는 했거든요."

<더 헬멧>은 독특한 구조의 극이다. 일단 '룸 알레포'와 '룸 서울'이라는 두 개의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룸 알레포'는 시리아 알레포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이야기이다. 시리아 반군의 손에 가족을 잃은 정부군이 자살 폭탄 테러를 기획하면서 사건이 벌어진다. 갑작스레 폭격이 시작되고, 건물이 붕괴될 위험에 처한다.

네모난 극장의 각 면에서 공연을 바라보던 관객들은, 그때부터 앉아있던 위치에 따라 다른 시점에서 연극을 보게 된다. '빅 룸'에 앉아 있는 관객들은, 곧 완전히 무너질지 모르는 이곳으로 들어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화이트 헬멧 단원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스몰 룸'에 앉아 있는 관객들은, 화이트 헬멧의 구조를 기다리는 9살 남자아이 '소마'가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전하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헬멧 B는 여기서 시리아 내전을 취재하기 위해 화이트 헬멧과 동행하는 서방 세계 출신 기자이다. 기자의 시선은 때로 불편하고, 불쾌하며 심지어 약간은 폭력적일 때도 있다. 그는 카메라에 화이트 헬멧 단원들의 분투를 담아낸다. 누구는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해 약이라도 더 받으려고 하지만, 누구는 구조에 방해만 되는 저 기자가 귀찮을 뿐이다. 그가 진심으로 짜증을 내자 기자는 오히려 그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담아낼 정도이다. 그러다 누군가의 생명이 눈앞에 달린 순간, 기자는 카메라를 내려놓는다.

"전쟁 상황 안에서 다양한 입장을 가진 캐릭터들이, 결국에는 아이를 구하겠다고 모두 구조에 나서는 입장으로 바뀌잖아요. 그 지점 때문에 배치를 그렇게 하지 않으셨나 싶어요. 그리고 제가 기자 역할로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렇게 캐릭터가 쓰이지 않았나 싶고…. 저도 제가 괜히 민폐인 것 같다고 생각해요. 괜히 일하는 데 말 시키고, 민망해요. (이)호영 오빠나 (이)정수가 눈에 힘을 주고 봐서 무서워 죽겠어요.

저는 일단, 자살폭탄테러범 발견하는 순간부터 데리고 나가야 하지 않나, 한 명이라도 구해야 하지 않나 싶었죠. 손지윤이면 그렇게 할 텐데…. 그래서 그 지점을 찾는 게 굉장히 어려웠어요, 기자로서. 왜냐면 극 중 제 얘기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기록하는 입장에서 구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지점으로 어디를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작가님한테 '카메라 언제 놔야 해요? 나 놓고 싶은데' 했더니 '네 마음이 그렇게 움직일 때 놔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연극 <더 헬멧>에서 '헬멧 B'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손지윤. <룸 서울>에서는 운동권 전투조 대장 '미친개', <룸 알레포>에서는 어린 시리아 소녀 '키파'와 시리아 내전을 취재하러 온 기자 역을 번갈아 수행한다.

▲ 또 다른 참여 “호날두 유니폼에 있는 숫자와 영문은 제가! 제가! 그렸습니다. 김태형이 그리라고 해서 그렸는데, 너무 잘 그렸다고 또 뭐라고 하더라고요. ‘이게 뭐냐’고. 뭘 해도 욕하는 스타일이라 저랑 싸우는거야. 복수할거예요.” ⓒ (주)StoryP


헬멧 B는 동시에 갇힌 소마의 친구이자 화이트 헬멧 단원의 딸이었던 '키파'를 1인 2역으로 소화한다. 원래 키파의 것이었던 축구공에는 그의 이름이 쓰여 있다. 그 공이 소마의 것이 되었을 땐 소마의 이름도 쓰였다. 그 둘이 만났을 때, 소마는 같이 축구를 하자고 제안했다. 키파는 비눗방울을 불었다. 공습 비행기가 수시로 오가는 하늘을, 아이들은 올려다볼 일이 없다. 하지만 비눗방울이 있으면, 비눗방울을 보기 위해서라도 하늘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런 키파의 옷에는 아이가 그린 듯한 다정한 상징과 기호들이 가득하다.

"스몰 룸이 폐허 속 아이의 의식의 흐름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잖아요. 연출님이 주문하신 건 처음에, '그 아이의 의식의 흐름에서 나타나는 환상 속 캐릭터였으면 좋겠다. 천사였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키파라는 캐릭터가 아이라고 해서 '아이 연기를 해야 되겠다'라고 보진 않았어요. 본질적으로 접근해봤을 때, 혼자 폐허 속에 있는 소마에게 '이 모든 건 다 전쟁 때문이야. 너는 잘못이 없어. 다 알아. 다 괜찮아'라고 얘기해주는 인물이잖아요. 뭔가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연기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죠. 다만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건 뭐 제가 (이)석준 오빠나 (정)원조 오빠에 비하면 어렵다고 말하기도 너무 부끄럽고요.

그 그림이 아이의 기억 속에 있는 추억일 수도 있고, 인물에 대한 감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만약에 그것이 추억이라면 즐거운 기억들이었으면 좋겠는 게 개인적인 바람이었고요. 그래서 그렇게 표현해주신 것 같아요. 저희 팀에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스태프 친구가 있거든요. 연출이 요구한 대로 그 친구가 크레파스로 직접 그린 거고요."

하지만 그들이 함께한 시간은 길지 못했다. 키파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자신을 구하러 온 단원에게, 소마는 자신이 어른이 될 수 있는지 묻는다. 소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훌륭한 어른 말고, 그냥 어른. 키파는 결국 되지 못했지만 자신은 그토록 되고 싶은 그 어른. 지금도 시리아의 수많은 아이들이 되지 못하고 있는 어른. 불과 4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아이들이 되지 못한 어른.

"지금도 시리아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무고한 희생을 당하고 있잖아요, 아무 죄 없이. 그런 친구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린 아이들에게 앞으로의 삶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 클 수 있도록 희망을 주는,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어른으로 한국에서 우리가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책임감을 가지게 되더라고요."

[룸 서울] 1987년 운동권 막내, 1991년 전투조 미친개

 연극 <더 헬멧>에서 '헬멧 B'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손지윤. <룸 서울>에서는 운동권 전투조 대장 '미친개', <룸 알레포>에서는 어린 시리아 소녀 '키파'와 시리아 내전을 취재하러 온 기자 역을 번갈아 수행한다.

▲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점 "결국 선택의 문제인 것 같아요. 하얀 헬멧을 두고 한쪽은 구조를 택하고, 한쪽은 폭력을 택하잖아요. 연속된 선택의 과정 속에서 ‘난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관객 분들이 생각해보실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들의 선택으로 인해서 세상이 바뀌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들도 또 생각해보시면 좋겠어요." ⓒ (주)StoryP


캠퍼스에서 매캐한 냄새가 나고, 소주병은 꽃병(화염병)이 되던 시절. 1987년 서울은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가 한창이었다. 서울 대학가 서점으로 두 학생이 피신한다.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광주에서 올라온 선배 남학생은 다리를 다쳤다. 서울에서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 여학생을 돕기 위해서였다. 지하까지 백골단원들이 들이닥치려고 하자 서점 주인은 두 학생을 비밀공간으로 안내하고 문을 닫는다. 빅 룸에서는 두 백골단원과 서점 주인 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스몰 룸에서는 들키지 않으려고 숨죽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학생의 사연이 펼쳐진다.

"1987년도의 '어리바리' 여학생이 저랑 가장 비슷한 인물인 것 같아요. 가장 부대낌 없이 접근했던 인물이기도 하고, 제 모습이 많이 나오는 캐릭터이기도 하고요. 주체적인 인물은 아직 조금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밖에서 서점 주인이 능숙하게 백골단원들을 대처하는 동안, 1980년 5월 광주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기억하는 선배는 그날 먹었던 '무진장떡볶이'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후배는 자신이 본 영화 <에일리언2>가 얼마나 명작이었는지 칭찬한다. 그 순간, 백골단 대장이 비밀 공간과 큰 방 사이 구멍을 위장하는 용도로 붙어있던 <에일리언2> 포스터를 떼어낸다. 프락치가 있었다. 이 서점 지하에 운동권 학생들을 숨겨주는 곳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백골단이 서점 주인을 인질 삼아 위협하자, 작은 방에 있던 남학생은 결단을 내린다. 여학생을 포대 자루에 숨겨주며 프락치가 있다는 사실을 지도부에 꼭 알리라고, 무사히 나가서 속편보다 늦게 개봉하는 <에일리언1>을 꼭 보라고 당부한다. 빈 소주병을 팔아 떡볶이 사 먹는 날을 꿈꾸던 선배는 혼자 방을 나가 끌려간다. 방에는 그가 두고 간 펜 한 자루와 여학생이 숨죽여 끅끅거리던 포대 자루가 남았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여학생은 경찰 방패를 타고 날아다니는 운동권 전투조 대장 '미친개'가 됐다.

 연극 <더 헬멧>에서 '헬멧 B'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손지윤. <룸 서울>에서는 운동권 전투조 대장 '미친개', <룸 알레포>에서는 어린 시리아 소녀 '키파'와 시리아 내전을 취재하러 온 기자 역을 번갈아 수행한다.

▲ '미친개'의 성장 “미친개라는 단어만 봤을 때, 삭막하고 냉혈한 여성 선배로 그려질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웃고 떠들면서 알게 모르게 연대의식을 느끼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야 그 뒤에 오는 반전이나 절망감도 더 크더라고요. 사실 그 와중에도 눈을 마주치며 수많은 갈등을 해요. 선배의 펜을 쥐고 ‘미워하지 않을 거다, 분노하지 않을 거다’라고 스스로에게 계속 다짐해요. 물론 쉽지 않았겠지만, 미친개가 성장을 하고 다양한 감정을 갖고 있는 캐릭터가 완성되지 않았나 싶어요.“ ⓒ (주)StoryP


"떡볶이 선배의 희생이 저한테는 가장 커요. 그 4년 동안 태권도 검은 띠도 따고, 프락치도 미친 듯이 찾으러 다닌 건 대사에 나오는데, 선배에 대한 건 (극 중) 굉장히 묻혀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프락치를 만날 때까지, 그동안 얼마나 뉘우치고 깨닫고 터트리기도 하면서 힘들게 살아왔을지…. '선배의 희생으로 인해서 선배의 영향을 계속 받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사실 공연하면서도 저는 펜을 잡고 있으면서 선배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그 공간(방) 안에 들어오면, 그때(1987년) 기억이 나는 거는 어쩔 수 없으니까, 그 지점을 항상 기억하면서 공연하고 있어요."

1991년이 되어 그때 숨어들었던 방에 다시 들어온 미친개. 4년 전에 자신을 구해주려던 선배와 들어온 것처럼, 이번엔 자신이 후배를 구해주려다가 잡혀서 들어왔다. 작은 방에서 자신이 구해준 여후배와 대화를 하던 그는, 자신이 지난 4년 동안 미친 듯이 찾아 헤매던 프락치가 바로 이 학생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슬퍼진다. 그 후배는 커피를 너무 잘 탔다. 얼마나 경찰들 커피를 많이 탔으면 그랬을까. 운동권 안에서 여자는 문선에 동원되거나, 커피나 타는 처지였다. 바로 그 지점에서 미친개는 이 프락치의 일면이 또 이해가 됐다.

그는 떡볶이 선배를 끌려가게 만든 이 프락치가 아니라, 그를 끌고 간 전투조 대장에게 맞선다. 백골단으로 차출되어서 출신 학교 쪽으로 배치된 밖의 두 남자와 암구호를 주고받는다. "시고니 위버!" 용감하게 싸워서 괴물을 물리친 <에일리언> 속 시고니 위버처럼, 미친개는 전투조 대장을 난투 끝에 기절시키고 무사히 그 방을 나간다.

"제가 마지막에 책상에 올라가서 대사를 하고 대장과 싸우지만, 저는 제가 싸울 때 저 혼자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요. 우리 배우들과 같이 싸우고 있고, 관객들과 함께 싸우고 있고, 내가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오히려 더 힘을 받아가는 것 같아요."

4년 전 이 방을 나갔지만 나간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미친개. 4년이 지난 지금에야 드디어 이 방을 나가게 된 그. 미친개는 떡볶이 선배를 만났을까. 새 학기에 복학은 무사히 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사실…. 저는 제가 그 선배를 만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일단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게 나온 사람도 있었다'라는 대사, 저는 선배를 염두에 두고 하는 대사거든요. 굉장히 안타깝지만, 그 일로 인해서 내가 조금 더 큰 충격과 자극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만나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그쪽(남영동)으로 끌려갔을 테니까….

방을 나간 이후에 대해서는 행복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일상으로 분명히 돌아갔을 것이다'라고요. 1991년 이후에 연애도 하고, 공부도 하고, 취직도 하고,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평범한 일상을 살았을 거라고 항상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 그동안 운동한 거니까. 만약에 혹시 계시다면, 지금은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분으로 성장해 있겠죠? 촛불집회나 여러 가지 다양한 운동들에 나서면서, 어딘가에서 계속 목소리도 내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여성

 연극 <더 헬멧>에서 '헬멧 B'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손지윤. <룸 서울>에서는 운동권 전투조 대장 '미친개', <룸 알레포>에서는 어린 시리아 소녀 '키파'와 시리아 내전을 취재하러 온 기자 역을 번갈아 수행한다.

▲ '룸 서울'의 포인트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오늘 처음 만난 낯선 후배를 위해서 희생하는 떡볶이 선배의 모습. 그리고 그 선배로 인해서 제가 미친개로 성장해가는 과정과 지점들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두 여성의 연대의식과 아이러니한 상황들도요.“ ⓒ (주)StoryP


대중문화 전반에 '페미니즘'의 바람이 불고 있다. 남성 중심의 서사, 남성 권위적인 서사가 지닌 문제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공연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녀' 아니면 '창녀'로 분류되거나, 남성에 의해 도구적으로 소비되거나,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의존적이었던 기존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성찰이 더해졌다. 근 몇 년 동안 주체적인 여성이 서사의 중심에 서서 극을 이끌고 가는 작품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더 헬멧>은 여성'만'의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남성을 중심에 두고 여성을 그 주변에 머무르게 하던 관습을 타파했다. <더 헬멧>에서 남성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는 때로 갈등하고 때로는 연대하며 호흡한다. 룸 알레포에서 여성은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낸다. 축구공의 소유자 키파는 여자아이였고, 화이트 헬멧의 리더도 여성이었다. 룸 서울에서는 성장하는 여성,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여성, 투쟁해서 승리하고 쟁취하는 여성이 그려진다.

"<더 헬멧>이 가지는 차별점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은 굵직한 현대사를 다룬 작품에서 주로 주변 인물로 나오잖아요. 딸, 엄마, 조력자 등으로 배치되는 상황에서 이런 여성 캐릭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자 배우들은 반가움을 느껴요. 일단 연습 초반부터 '이것은 여성 중심의 서사'라고 작가님이 박아놓으셨고, 연출도 '이 이야기는 영웅서사이고, 이 작품은 영웅물이다. 근데 이 영웅을 우리는 무조건 여자로 설정하겠다'고 쐐기를 박아놓고 시작하셨어요. 근데 그 여자가 제가 될 줄은 몰랐죠. '그래 마음대로 해!'라면서 '저게 설마 나겠어?' 싶었는데, 그게 제가 됐고…. (웃음)

프락치 같은 경우에도 성별은 후반쯤에 정해졌어요. 헬멧 B는 '무조건 여자로 가겠다'고 하셨고, 나머지 배역들은 성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시다가, 프락치 역할까지 여성으로 지정되면서 여자 얘기가 더 강화됐거든요. '서로 적이지만, 둘이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여성으로서 어느 순간 연대의식을 갖고, 그것을 통해서 서로 이해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라고 연출이 말했어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니, 그 부분을 꼭 연기를 잘 해달라고 하셨죠. 그렇게 여자로 설정이 되면서 커피에 침을 뱉는 행위나, 허벅지에 손 올리는 그런 대사들이 추가가 됐고요.

'너도 그런 상황이 있었잖아. 너도 그렇지 않았니? 그럴 땐 그냥 짖어버려'라고 미친개가 이야기하는데, 이게 참 아이러니하게도 적을 앞에다 두고 하는 말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친구이고 여성으로서, 더 나아가서는 여성 관객들에게 하는 응원의 말이 됐으면 좋겠다'고 오빠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얘기했었거든요. 그때는 '저 인간이 뭐라고 하나' 싶었는데, 공연을 하면서 제가 더 느낀 것 같아요. 관객분들도 느끼신 것 같고."

손지윤은 좋은 배우다. 좋은 작품을 더욱 돋보일 수 있도록 좋은 연기를 한다. 특히 <글로리아> 켄드라나 <수탉들의 싸움> W처럼 대사에서 재미를 주는, 지능적이고 말로 풀어내는 옷을 입었을 때 탁월했다. 그리고 <더 헬멧>을 통해 손지윤은 더 좋은 배우가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 스스로 "도전"이라고 말하듯이 액션부터 시작해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는 무대였다. 고민과 실천을 아울러 해냈다.

<더 헬멧>이 재연과 삼연으로 얼른 돌아오기를, 그리고 원제의 'Vol.1'이 'Vol.2'로 그리고 'Vol.3'로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상처 입은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한마디 건넬 수 있는 이런 극이, 이 어두운 시기에 횃불처럼 대학로 곳곳에 더 밝혀져야 한다. 수많은 여성이 권력을 지닌 이들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해온 게 폭로되고 고발되는 현실 아닌가.

이 횃불이 들불로 번져서 낡고 부정한 것들을 다 태워버린다면, 그 재를 거름 삼아 우리는 더 멋진 공연계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그 과정에서 배우 손지윤도 있을 것이다. 그는 뭐든지 할 수 있는 배우가 됐으니까. 'Girls Can Do Anything'이니까.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이니까. 

"저한테 굉장히 큰 도전이었고, <더 헬멧>을 하게 되면서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 저한테는 다른 면에서 터닝 포인트가 되는 지점이 있어요. '여배우로서 나는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 뭐든 할 수 있다'가 됐어요. 그거 엄청난 거잖아요. (웃음)"

배우 손지윤은 오는 20일 개막하는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의 레이디로 한 번 더 '지탱극'과 연을 맺는다.


더헬멧 손지윤 필동댁 GIRLSCANDOANYTHING 미친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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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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